
2024년 9월 추석 연휴 직전부터 영풍·MBK 연합 측의 공개매수전으로 격화된 경영권 분쟁은 1월 21일 법원이 ‘임시주총에서 집중투표 방식으로 이사를 선임해서는 안 된다’는 영풍·MBK 연합 측 주장에 손을 들어주면서 최 씨 일가의 패배로 마무리되는 것 아니냐는 전망이 우세했다.
분쟁은 반전에 반전을 거듭했다. 현재 영풍·MBK 연합과 최 회장 측의 우호지분율은 각각 40.97%(의결권 46.7%), 34.24%(의결권 39.16%)로 추정된다. 최 회장 측이 영풍·MBK 측에 약 7%포인트가량 밀리는 상황에서 집중투표제는 경영권 방어를 위한 사실상 최후의 승부수로 꼽혔다.
법원이 영풍에서 고려아연을 상대로 낸 임시주총 의안상정금지 가처분을 인용하면서 최 회장 측의 패색이 짙어진 상황이었지만 최 회장 측이 판을 흔드는 또 한번의 반전을 만들었다.

1월 23일 서울 용산구 그랜드하얏트서울에서 열린 고려아연 임시주총은 최 회장 측의 영풍 의결권 제한을 두고 영풍·MBK 측과 극한 대립이 펼쳐지며 커다란 혼선이 빚어졌다.
당초 오전 9시에 개회 예정이었으나 출석주주와 중복위임장 확인이 지연된다는 명목으로 오후 2시가 되어서야 개회가 선언됐으나 출석주식 수 미공개 등 절차상 문제로 10여 분 만에 파행됐다가 속행하는 등 혼돈 그 자체였다.
주총 의장 자격으로 나선 박기덕 고려아연 사장이 영풍이 보유한 지분의 의결권이 없다고 선언함에 따라 임시주총에서 영풍이 보유한 고려아연 지분 약 25%(526만2000여 주)에 대한 의결권이 제한됐다.
영풍 측 대리인은 “의결권이 제한된다니 너무나 황당하고 강도당한 기분”이라며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호주 회사가 이유도 모른 채 한국 회사의 주식을 샀다. 의결권 제한을 받는 당사자에 대해선 일언반구 설명도 없었다”고 항의했다.
임시주총에선 최 회장 측이 제시한 △집중투표제 도입△이사 수 19명 이하 제한 안건이 모두 통과됐다. 당초 이사 수 제한 안건은 부결될 것이 확실시됐지만 이날 적용된 영풍 보유 고려아연 주식에 대한 의결권 제한 효과에 힘입어 통과됐다.
앞서 1월 22일 고려아연의 호주 손자회사인 선메탈코퍼레이션(SMC)은 영풍정밀과 최윤범 회장 및 일가족(최창규·최창근·최정운·유증근)으로부터 영풍 주식 19만226주(10.33%)를 575억원에 장외 매수했다.
영풍은 고려아연 지분 25.42%를 보유하고 있다. 이번 지분 거래로 ‘고려아연→선메탈홀딩스(SMH)→선메탈코퍼레이션(SMC)→영풍→고려아연’의 순환구조가 형성돼 영풍이 보유한 고려아연 지분은 임시 주총에서 의결권이 제한된다는 게 고려아연의 입장이다.
상법상 순환출자 구조 내 회사 간에는 의결권을 행사할 수 없다. 이 주장대로라면 영풍·MBK가 확보한 고려아연 주식 40.97% 중 의결권이 15.55%로 줄어들어 과반 이상의 의결권이 제한된다. 영풍 지분 약 25%의 의결권 효력이 사라지면서 최 회장 측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구도가 형성된 것이다.
영풍·MBK는 “상호주 소유에 관한 상법 조항들은 ‘국내 법인’인 ‘주식회사’들 사이에만 적용된다”며 SMC는 외국기업이자 유한회사라 상법상 상호주 의결권 제한 규정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영풍·MBK는 최 회장이 공정거래법상 순환출자구조의 허점을 이용했다며 “정부에서 사실상 금지하고 있는 외국 법인을 이용한 순환출자규제를 회피함으로써 또 하나의 역외 탈법행위를 자행했다”고 비판했다.

양측은 경영권 사수 및 탈환을 위해 각종 경영 기법을 총동원하는 치열한 전략싸움을 이어왔다.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분쟁 과정만 봐도 재계, 자본시장 역사에서도 새로운 이정표를 썼다는 평가가 나온다.
한 재계 관계자는 “쓸 수 있는 경영권 공격과 방어 카드는 다 나온 것 같다”고 했다. 실제로 양측은 경영권을 공격하고 방어하기 위한 각종 전략적 카드를 주고받았다. 공개매수로 시작해 유상증자, 집중투표제, 상호주 의결권 제한까지 등장했다.
영풍은 사모펀드인 MBK파트너스와 손잡고 2024년 9월 13일 주당 66만원으로 공개매수를 시작했다. 이후 9월 26일 1차 공개매수가를 조정하며 주당 75만원으로 높였다. 최 회장 측은 10월 2일 자사주 공개매수에 나서며 맞불을 놨다. 그 과정에서 공개매수가를 83만원에서 89만원으로 높이면서 자사주 공개매수를 마무리했다.
이후 고려아연은 2024년 10월 30일 “공개매수 이후 주식 유통 물량 부족으로 인한 비정상적인 주가 폭등 현상, 향후 상장폐지 위험을 유상증자를 통해 해소하겠다”며 유상증자 계획을 발표했다가 시장의 거센 비판에 직면, 금융감독원 제재를 받고 2주 만에 자진 철회하기도 했다.
고려아연 분쟁은 상속 과정을 거치며 총수 일가의 지분이 쪼개져 최대주주가 낮은 지분율로 기업을 지배하고 있는 재계 그룹 대다수에 언제든지 경영권 위협에 노출될 수 있다는 위기감을 심어줬다.
하지만 재계에선 고려아연 분쟁에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다. 단순한 사모펀드의 경영권 공격이 아닌 1대주주(영풍 장형진 고문 일가·MBK 측)와 2대주주(고려아연 최윤범 회장 일가) 간 분쟁이고 1대주주가 경영권 확보를 위해 사모펀드와 손을 잡은 특이 케이스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영풍 장 씨 일가와 고려아연 최 씨 일가 모두 재벌가라는 점에서 어느 한 편의 손을 들어주기 힘든 상황이었다.

게다가 경영권 방어 전략 일환으로 최 회장 측이 꺼내 들었던 집중투표제도 그간 재계가 반대해온 제도라는 점에서 섣불리 찬성을 표명했다간 집중투표제 요구가 재계 전반으로 확산하는 ‘역풍’을 맞을 수도 있다.
집중투표제는 일반적인 상황에서 대주주보다 소수주주에 유리한 제도로 대기업 중 실제 도입하고 있는 곳은 손에 꼽을 정도다. 최 회장 측 우군으로 분류되는 한화, 현대차, LG화학 등도 임시주총에서 집중투표제에 찬성표를 던진다면 자사에도 도입 필요성을 인정하는 명분이 될 수 있어 딜레마였다.
고려아연 경영권 분쟁에서 최 회장 측의 ‘우군’으로 분류됐던 현대차는 고려아연 임시주총에 불참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차(HMG Global)는 2024년 말 기준 고려아연 지분 5.76%(의결권 기준)를 보유하고 있다. 재계에서는 현대차의 고려아연 임시주총 불참을 놓고 경영권 분쟁 상황에서 중립을 지키려는 것이란 해석이 나온다.
최 회장이 임시주주총회 전날 밤 기습적으로 내놓은 상호주 의결권 제한 카드 역시 논란의 여지가 있다. 고려아연이 호주 자회사를 활용해 신규 순환출자고리를 만든 것은 영풍의 의결권을 무력화해 임시주총에서 영풍·MBK 측 신규 이사 선임을 막으려는 목적으로 풀이된다. 순환출자 형성은 공정거래법상 금지되고 형사처벌 대상이다.
상호출자 제한과 관련해 상법 해석의 논란 소지가 있으나 최 회장 측은 자회사 SMC가 호주 법인이라는 점을 이용했다. 이에 고려아연은 “공정거래법상 상호출자제한은 법 명문상 국내 계열회사에만 적용된다”고 주장했다.
임시주총에서 의결권 행사가 막힌 영풍·MBK 측은 의결권을 부당하게 제한하고 임시주총을 진행했다는 이유로 법원에 주총에 대한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을 하고 가처분을 받는 즉시 임시주총을 다시 열겠다는 계획이다. 임시주총 이후에도 상호주 의결권 제한 관련 소송전이 이어지며 경영권 분쟁이 장기화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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