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부야 스크램블 스퀘어 모습. 사진=김일규 한국경제 특파원
시부야 스크램블 스퀘어 모습. 사진=김일규 한국경제 특파원
일본에서 주요 대기업 신입사원 ‘월급 30만 엔’ 시대가 열렸다. 일본 기업은 ‘잃어버린 30년’을 겪으면서 임금 인상을 억제했지만 정부가 ‘임금과 물가의 선순환’을 통한 디플레이션 탈출에 나서자 호응하는 모습이다.

일본 기업의 임금 인상은 소비 진작으로 이어지고 있다. 특히 일본에서 1990년대 중반 이후 태어난 Z세대가 소비를 견인하는 모습이다. 일본의 Z세대는 임금과 물가가 오르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인플레이션 세대’다. 이들은 쓸 때 쓰고 아낄 때 아끼는 소비로 일본 경제를 변화시키고 있다는 분석이다. 대기업 초봉 줄줄이 인상
유니클로로 잘 알려진 일본 패스트리테일링은 올해 3월 입사하는 대졸 신입사원 월급을 30만 엔에서 33만 엔으로 인상했다. 일본 3대 메가뱅크인 미쓰이스미토모은행은 대졸 신입 월급을 25만5000엔에서 30만 엔으로 올리기로 했다.

일본에서 대기업 초봉 인상 움직임이 가속한 것은 2022년부터다. 전문 인력이 부족한 게임이나 정보기술(IT) 업계 주요 기업이 경쟁적으로 인상에 나섰다. 니혼게이자이신문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주요 기업의 평균 초봉은 약 24만800엔으로 2021년 대비 8.8% 상승했다.

기업이 초봉을 인상하는 이유 중 하나는 물가상승이다. 작년 봄철 노사교섭에서 33년 만에 최고 수준의 임금 인상이 실현됐지만 물가상승률은 3년 연속 일본은행 목표인 2%를 웃돌고 있다. 물가를 감안한 실질임금은 지난해까지 3년 연속 전년 대비 마이너스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인재 쟁탈전이 격화하는 것도 초봉 인상을 부추긴다. 일본 리크루트 조사에 따르면 올해 대졸 구직자 대비 구인 수 비율은 1.75배로 3년 연속 상승했다. 일본의 1980년대 ‘거품 경제’ 시절 대거 입사했던 버블 세대가 50대 후반이 되면서 향후 퇴직자가 급격히 증가할 것으로 예상됨에 따라 신입 채용을 서두르고 있다.

일본은 잃어버린 30년을 겪으면서 초봉은 낮은 수준으로 억제되고 나이가 들면서 임금이 오르는 연공서열이 표준이었다. 그러나 이제 초봉 인상률이 전체 평균을 웃돌면서 세대 간 임금 격차도 줄어들고 있다. 지난해 20대 초반과 40대 초반의 평균 월급 차이는 11만8000엔으로 10년 전인 2014년 12만7000엔에 비해 9000엔 정도 줄었다.

일본 재계 대표 단체인 게이단렌은 올해 5% 이상 임금 인상을 독려하고 있다. 임금과 물가의 선순환을 통한 디플레이션 탈출에 기업이 앞장서 달라는 주문이다. 도쿠라 마사카즈 게이단렌 회장은 “2023년이 임금 인상의 기점이었다면 지난해에는 임금 인상을 가속했고 올해에는 이를 정착시킬 것”이라고 강조했다. 젊은 세대 소비 들썩
대졸 초임 인상이 잇따르면서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소비가 들썩이는 모습이다. 미쓰이스미토모카드의 데이터 분석 서비스로 작년 신용카드 결제금액을 분석한 결과 20대는 코로나19 확산 전인 2019년에 비해 20% 이상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세대별 결제금액 증가율 1위를 차지했다.

Z세대의 특징은 절약하면서도 원하는 것에는 돈을 쓰는 ‘강약 소비’에 있다. 좋아하는 아티스트를 응원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K팝 붐을 계기로 한국을 여행하는 젊은 여성이 늘어나는 모습이다. 지난해 해외여행 지출을 2019년과 비교하면 20대가 30% 증가해 가장 많이 늘었다. 전체 세대에서 10% 감소한 것과 대조적이다.

각 기업은 고가의 상품을 투입해 Z세대를 유인하고 있다. 식품 기업 가고메가 지난해 여름부터 가을까지 한정 판매한 토마토 주스 가격은 385엔 전후로 일반 제품에 비해 40% 비싸다. 미용 효과가 재조명되면서 50~60대에서 20~30대 여성으로 소비층이 확대됐다. 인플레이션 가속
인플레이션 세대의 부상은 일본은행이 10년 동안 ‘차원이 다른 완화’를 지속해도 움직임이 미미했던 ‘기대 인플레이션율’을 높이는 데 한몫했다. 기대 인플레이션율은 일본은행이 마이너스 금리 정책을 도입한 2016년부터 코로나19가 확산한 2021년까지 0.5%를 넘지 않았지만 2023년 1%를 돌파했고 최근에는 1.5% 정도까지 상승했다.

가격 변동이 거의 없어 ‘암반 품목’ 중 하나로 분류됐던 월세도 작년부터 크게 올랐다. 부동산 정보 업체 앳홈에 따르면 작년 12월 도쿄 23구 임대 맨션 평균 월세는 30㎡ 이하 싱글용 물건 기준 9만6000엔이다. 전월 대비 1.5% 오르며 7개월 연속 최고치를 경신했다.

지난 1월 소비자물가(신선식품 제외 기준)는 지난해 같은 달보다 3.2% 올랐다. 상승률은 2023년 6월 이후 1년 7개월 만의 최고 수준이다. 신선식품을 포함한 전체 소비자물가는 4.0%나 올랐다. 4%대 상승률은 2023년 1월 이후 처음이다.

일본의 물가상승은 일본은행 기준금리 인상 요인으로 작용한다. 일본은행은 지난 1월 기준금리를 연 0.25%에서 0.5%로 인상했다. 금리인상은 지난해 7월 이후 6개월 만이다. 지난해 3월 마이너스 금리를 해제한 이후 세 번째다. 우에다 가즈오 일본은행 총재는 “경제와 물가가 전망한 대로 움직이면 계속 금리를 인상할 것”이라고 밝혔다. 엔저에서 엔고로
일본은행의 금리인상 전망에 최근 일본 10년 만기 국채금리는 연 1.5%를 넘어서며 16년 만에 최고치로 치솟았다. 반면 대규모 금융 완화 조치가 예상되는 중국 10년 만기 국채금리는 하락세를 이어가고 있다. 일본과 중국 간 10년 만기 국채금리 역전이 임박한 것이다.

일본이 ‘아시아 최저 금리’를 벗어나면서 글로벌 자금 흐름에도 변화가 나타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도쿄 외환시장에서는 “엔화 매도 압력이 상대적으로 약해질 것 같다”는 관측이 나온다. 실제로 엔화 가치는 오르고 있다. 최근 달러당 148엔 안팎에서 움직이는 모습이다.

수출 업계에선 엔화 가치가 오르는 것이 달갑지 않다는 반응도 나온다. 예상 엔·달러 환율보다 실제 환율이 하락(엔화 가치 상승)하면 실적에 악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엔저는 지금까지 수출 기업 실적을 뒷받침해왔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이 12월 결산 기업 약 90곳의 올해 예상 환율을 집계한 결과 평균 달러당 약 148엔으로 나타났다. 달러당 150~155엔 미만이 46%로 가장 많았다. 이어 145~150엔 미만이 36%였다. 155엔 이상으로 예상한 기업도 9%였다.

캐논은 올해 예상 환율을 달러당 150엔으로 설정했다. 달러 대비 엔화 가치가 1엔 상승하면 영업이익이 31억 엔이나 감소한다. 엔고가 진행될수록 이익을 압박하는 것이다. 니토리 아키오 니토리홀딩스 회장은 “일본은행이 금리인상을 계속하면 연내 기준금리가 연 1%까지 오르지 않겠냐”며 “그렇게 되면 달러당 140엔대는 틀림없다”고 말했다.

엔고는 일본 주식시장에도 부담이 되고 있다. 닛케이지수는 지난 한 달간 5% 이상 떨어졌다. 시장의 관심은 올해 기업 실적에 쏠리고 있다. SMBC닛코증권의 야스다 히카루는 “일본은행의 조기 금리인상 관측이 강해져 대폭적인 엔저를 예상하기 어렵다”며 “올해 실적 상승 효과는 제한적일 것”이라고 말했다.


도쿄=김일규 한국경제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