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러나 그날 숲길 끝에서 조용히 다가오는 고타마의 모습을 본 순간, 그들은 본능적으로 눈을 떼지 못했다. 같은 가사, 같은 삭발의 모습이었지만 눈빛과 걸음에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위엄과 평온이 서려 있었다. 그를 마주한 다섯 비구 사이엔 짧은 침묵이 흘렀다. 결국 그들은 자리를 내어주었다. 더 이상 예전의 동료가 아니었다. 그 순간부터 그는 다른 존재로 다가오고 있었다.
“너희가 나와 함께 고행할 때 내가 단 한 번이라도 ‘나는 진리를 얻었다’고 말한 적이 있었느냐?” 고타마는 자리에 앉아 조용히 입을 열었다.
비구들은 대답하지 못했다. 아니, 그 누구도 그런 말을 들은 기억이 없었다. 고타마는 계속해서 말했다.
“그땐 나 역시 길을 찾는 중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나는 그 길을 찾았다. 그리고 그것을 너희에게 전하고자 한다.”
그 말은 과시도 아니었고, 권위도 아니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강요도 교만도 없었다. 오히려 말보다 더 많은 것을 전하는 침묵과 태도, 눈빛이 있었다. 그가 무엇을 얻었는지를 증명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함께 진리를 찾던 옛 동료들에게 진심을 다해 전하고 싶은 말이 있었던 것이다.
사실 고타마는 깨달음을 세상에 알리려는 마음이 없었다. 보리수 아래에서 완전한 깨달음을 얻었을 때 그는 괴로움의 본질과 그것을 끝내는 길을 명확히 보았다. 하지만 그 진리는 말로 다 담을 수 없을 만큼 깊고 미묘했다. 그리고 그는 생각했다. 세상은 너무 번잡하고, 사람들은 욕망과 무지에 가려 있으니, 이 진리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그는 침묵하려 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숲 속에 머물고자 했다. 그러나 하늘에서 내려온 범천 사함파티가 그에게 간청했다. 이 세상에는 눈먼 자만 있는 것이 아니며, 진리를 들을 준비가 된 이들도 있다고. 고타마는 그 말에 마음이 움직였다. 그리고 그는 생각했다. 이 진리를 전할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그래서 그는 다섯 비구를 찾아왔다. 그러나 그는 그들에게 강하게 설득하려 하지 않았다. “믿어라”라고 말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들어보고, 스스로 검증하라”고 말했다. 진심을 다해, 그러나 겸손하게. 그 조용한 태도는 비구들의 마음을 흔들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중 가장 나이 많았던 콘단냐가 읊조렸다. “모든 것은 생겨나고, 머물다, 사라지는 것이구나.”
고타마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콘단냐는 깨달았다.”
그날의 장면은 단지 불교의 시작이 아니었다. 그것은 진심이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가, 그리고 설득이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그 누구보다 위대한 깨달음을 얻은 부처마저 자기의 말을 받아들이라 강요하지 않았다. 아니 못 했다. 오히려 그는 물었다. “내가 언제 너한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니?”라고. 마치 사기꾼이 진실을 믿어 달라고 애원하는 듯한 말처럼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오히려 그는 그런 말로까지 진심을 다했다. 그것도 함께 고행을 했던 동료들에게 말이다.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전한다는 건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다. 특히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마음을 전달하는 일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이번 주 한경비즈니스는 두 가지 주제를 다룬다. 하나는 불교이고, 다른 하나는 대통령 후보에 관한 이야기다. 유력한 이 대통령 후보 역시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마음을 품고 있을 것이다. 나름의 철학과 비전, 깨달음도 있을 것이다. 그런 그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단 하나다. 제발 앞서 대통령이 됐던 그 누군가처럼 윽박지르며 무턱대고 강요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 깨달음이 진리인지 아닌지도 모른 채 말이다.
대신 부처처럼 조용히, 그러나 진심을 다해 사람들을 설득해주길 바란다. 말보다 태도로, 태도보다 진실로. 그 진심이 닿는다면 결국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부처의 첫 제자 콘단냐처럼 말이다.
이홍표 기자 hawlli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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