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콧 베선트 미국 재무부 장관(가운데)과 아카자와 료세이 일본 경제재생상(오른쪽)이 5월 1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DC에서 2차 관세 협상을 위해 만나 악수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스콧 베선트 미국 재무부 장관(가운데)과 아카자와 료세이 일본 경제재생상(오른쪽)이 5월 1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DC에서 2차 관세 협상을 위해 만나 악수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미국과 일본의 관세 협상에서 ‘쌀’이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일본 정부가 관세 철폐를 위한 협상 카드 중 하나로 미국산 쌀 수입 확대를 검토하자 ‘농민 표’를 의식한 집권 자민당의 반발이 거세지고 있다. 일각에선 일본산 쌀 공급 부족으로 가격이 급등한 점을 고려하면 수입을 늘릴 경우 관세 철폐와 쌀 가격 안정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한국도 일본으로 쌀 수출에 나섰다. 관세 협상 카드로 떠오른 ‘쌀’
최근 자민당은 미·일 관세 협상을 둘러싸고 미국산 쌀 수입 확대에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쌀 수입을 늘리면 일본 내 생산 기반이 무너진다며 식량안보를 명분으로 쌀을 ‘성역화’하는 모습이다.

“자동차 관세를 낮추기 위해 농림수산품을 희생시키는 협상 방침은 결코 수용할 수 없다.” 자민당 2인자이자 식량안보강화본부장을 맡은 모리야마 히로시 간사장은 지난 4월 25일 이런 내용의 본부 결의안을 에토 다쿠 농림수산상에게 전달했다.

앞서 일본 정부 내에선 미국산 쌀 수입 확대가 관세 협상 카드로 부상했다. 일본은 무관세로 매년 약 77만 톤의 쌀을 수입하고 있으며 이 한도를 초과하면 kg당 341엔의 관세를 부과하고 있다. 이번 협상에선 미국산 쌀을 연간 7만 톤 정도 추가 수입하는 방안이 거론되고 있다.

일본 정부도 지금까지 무역 협상에서 쌀을 보호해 왔다. 그러나 미국 관세 대상에서 일본 제품이 제외되려면 일정한 양보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앞서 미국 측은 자동차 안전기준, 쌀 수입 등에 대해 불만을 제기하고 수입 확대를 요구했다.

여기에 일본 쌀 가격 급등도 영향을 미쳤다. 일본에선 지난해 여름부터 ‘이상고온’ 등에 따른 쌀 공급 부족과 가격 고공 행진으로 이른바 ‘레이와의 쌀 소동’이 빚어졌다. 1993년 냉해에 따른 ‘헤이세이 쌀 소동’ 당시 태국산과 미국산 쌀을 긴급 수입한 전례가 있다. 자민당 “쌀에 손대면 정권 무너져”
자민당 내에선 위기감이 높아지고 있다. “쌀에 손을 대면 정권이 무너진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올여름 참의원(상원) 선거에서 쌀 농가의 표가 승패를 가를 것이란 이유에서다. 모리야마 간사장은 미국산 옥수수나 대두 수입 확대를 허용할 방침을 밝혔으며 주식인 쌀은 지키겠다는 입장이다.

자민당이 내세우는 식량안보는 흉작 등에 대비해 식량 자급률을 높이자는 정책이다. “수입 쌀이 늘면 중장기적으로 국내 농가 경영이 악화하고 국내 생산이 줄어들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에 따라 쌀 수입 확대가 실제 카드로 활용될지 여부는 불투명한 상황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관세정책에 대응하려면 쌀을 협상 카드로 제시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한 전직 각료는 “일본으로선 자동차를 최우선으로 지키는 것이 당연하다”며 “농업을 성역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일본에선 오는 7월 20일에 치러질 가능성이 큰 참의원 선거가 관세 협상에 중요한 변수가 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미국의 상호관세 90일 유예가 7월 9일에 끝나는 만큼 협상 결과가 선거에 미칠 영향을 염두에 둘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시바 시게루 내각이 조기 타결을 목표로 한다면 협상을 통해 관세를 최소화하는 성과를 내야 선거에 호재가 될 수 있다. 반면 협상 결과가 정권에 대한 실망감만 키울 가능성이 크다면 아예 협상 타결을 선거 이후로 미루는 게 득이 될 것이라는 평가다. 한국도 일본에 쌀 수출 나서
이런 가운데 한국도 일본에 쌀 22톤 수출을 추진하고 있다. 관련 통계가 있는 1990년 이후 35년 만에 최대 물량이다. 농협경제지주 자회사인 NH농협무역의 일본지사 농협인터내셔널은 지난 3월 쌀 2톤을 일본으로 수입해 4월에 판매했다.

이 회사는 1999년 설립 이후 처음으로 쌀을 한국에서 수입했다. 한국산 쌀은 ‘한국 농협’ 홈페이지와 온라인쇼핑몰 아마존, 도쿄 내 코리아타운인 신오쿠보 슈퍼 등에서 판매됐다. 이 쌀은 전남 해남에서 수확한 것이다.

농협인터내셔널은 일본 쌀값 급등과 한국산 쌀 소비 촉진 운동 등을 계기로 수입을 결정했다. 5월 중에 10톤을 더 들여올 예정이다. 통관 등을 거쳐 5월 중순께 판매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에 더해 추가로 10톤의 수입 시기 등을 조율하고 있다. 합쳐서 총 22톤을 들여오는 것이다.

농협인터내셔널이 운영하는 홈페이지 기준 한국산 쌀의 배송료 포함 가격은 10kg이 9000엔, 4kg은 4104엔이었다. 일본 슈퍼에서 팔리는 쌀 가격이 5kg에 4000~5000엔에 달하는 점을 고려하면 비슷하거나 조금 싼 편이다.

한국산 쌀만이 아니다. 일본의 상사 등 민간 업체도 쌀 수입을 늘리고 있다. 일본 민간 기업이 지난해 수입하겠다고 정부에 신청한 쌀 물량은 991톤이었다. 민간 업체의 연간 쌀 수입량은 2020년 426톤으로 가장 많았는데 지난해 약 2.3배로 늘었다. 대형 상사 중에는 유례없이 많은 양인 1만 톤 수입을 추진하는 업체도 있다.

일본 기업들이 쌀 수입에 적극적으로 나선 배경에는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쌀값이 있다. 수입 쌀은 수송비 등을 포함해도 1kg에 보통 150엔인데 여기에 관세를 더하면 500엔 정도가 된다. 현재 일본 소매점에서 판매되는 쌀은 1kg에 약 900엔이어서 수입 쌀 가격이 훨씬 저렴하다. 비축미 방출에도 꿈쩍 않는 쌀값
일본 서민들은 쌀값 급등에 부담이 커지고 있다. 일본의 3월 소비자물가는 지난해 같은 달보다 3.2% 올랐는데 쌀류는 92.1%나 급등했다. 비교할 수 있는 통계가 있는 1971년 이후 최대 상승폭이다. 일본에서 가계 소비지출 중 식비 비율을 나타내는 엥겔지수는 지난해 28.3%로 1981년 이후 43년 만의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쌀값 등 식품 가격 상승이 엥겔지수 악화에 영향을 준 것으로 풀이된다. 식품 가격 급등은 개인소비의 짐이 되고 있다. 지난해 2인 이상 가계의 평균 소비지출은 가구당 30만243엔으로 물가 변동분을 제외한 실질 기준으로 전년보다 1.1% 감소했다.

일본에서 쌀값이 뛰는 원인 중 하나는 늘어난 쌀 수요다. 지난해 일본의 쌀 수요는 10년 만에 증가세를 보였다. 농림수산성은 일본을 방문하는 관광객 증가를 10년 만에 쌀 수요가 늘어난 요인으로 꼽았다. 소비 증가에 따라 쌀 재고량은 통계를 집계하기 시작한 1999년 이후 역대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고시히카리 등 인기 품종은 공급이 원만하지 않아 일부 매장에서 판매 수량에 제한을 두는 사례도 있다.

일본 정부는 쌀값이 고공행진하자 비축미 관련 운용 지침을 개정해 지난 3월 두 차례 입찰을 통해 약 21만 톤의 비축미까지 방출했다. 일본 정부가 쌀 유통량을 늘리기 위해 비축미를 방출한 것은 처음이다.

비축미는 3월 하순부터 일부 점포에서 판매되고 있으나 쌀 가격은 내려가지 않고 있다. 슈퍼에서 판매되는 쌀 가격은 16주 연속 올랐다. 비축미 유통에 지역별 편차가 있다는 지적이다. 이에 농림수산성은 7월까지 매달 비축미 입찰을 추가로 실시해 공급량을 늘리겠다고 발표했다.

효과는 미지수다. 일본 각지 농업협동조합(JA)은 쌀값 오름세가 이어지자 이례적으로 일찍 가을에 수확될 쌀을 확보하기 위한 경쟁에 돌입했다. 그러나 일부 JA가 올해 매입할 쌀 가격을 작년보다 30∼40% 정도 높게 책정해 향후 햅쌀이 시중에 풀리더라도 쌀 소매가가 크게 떨어지지 않을 수 있다는 전망이다.

도쿄=김일규 한국경제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