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자본주의가 타락한 이유[서평]
무엇이 자본주의를 망가뜨렸나
루치르 샤르마 지음 /김태훈 옮김
한국경제신문
408쪽|2만8000원

자본주의는 언제나 삐걱댄다. 다른 모든 것들처럼…. 자본주의 체제에서 불평등이 심화하고 기업의 독점이 확대되는 것과 같은 부정적인 ‘마찰음’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정부가 망나니처럼 날뛰는 자본주의의 ‘고삐’를 강하게 죄지 않은 탓일까. 하지만 자본주의가 만병의 씨앗을 안고 태어난 저주받은 존재라는 통념은 근거가 빈약한 허상에 불과할지 모른다. 자본주가 ‘일탈’한 이유를 곰곰이 뜯어보면 경제적 자유를 확대하기 위한 노력은 등한시하지만 ‘돈 풀기(이지 머니)’의 유혹에 빠져 몸집을 키우는 데만 앞장선 정부가 자본주의를 망치고 있다는 증거는 쏟아지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본질적으로 악한 존재가 아니라 거대정부의 유혹이 자본주의를 타락시킨 주범이라는 얘기다.

‘무엇이 자본주의를 망가뜨렸나’는 25년간 모건스탠리의 글로벌 투자전략을 책임졌던 루치르 샤르마 록펠러인터내셔널 의장이 살펴본 현대 자본주의 ‘진단서’다. 월가의 투자 전설로 불리면서 파이낸셜타임스 등 영미권 유력지에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는 저자는 시종일관 경쟁과 성장이라는 자본주의의 기둥을 무너뜨리는 원흉으로 ‘정부 기능의 확대’를 꼽는다.

일반적으로 1980년대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의 등장으로 1930년대 뉴딜 정책 이후 이어진 ‘큰 정부’의 기조에 제동이 걸렸고 어느 정도 작은 정부로 되돌아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상은 일부 부분에서만 잠정적으로 정부 확대의 속도가 조금 늦춰졌을 뿐이다. 감세, 탈규제, 국영 기업 민영화, 자유무역협정 확대, 재정적자 및 공공 부채 감축은 말만 번지르르할 뿐이었다. 대신 복지와 규제는 꾸준히 확대됐다. 정부의 팽창은 결코 멈춘 적이 없었고 축소는 언감생심이었다. 오히려 큰 정부에 대한 정치적·사회적 지지는 그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2001년, 2008년, 2020년 등 주기적으로 빚어진 금융위기와 코로나19 팬대믹을 거치면서 커진 ‘시장의 실패’를 질책하는 목소리는 정부 지출의 과잉을 끝없이 부추겼다.

‘효율화’, ‘규제철폐’의 구호와 달리 실상은 비대해진 정부가 시장 결함을 조성했고, 금융시장에 대한 정부의 지속적인 지원과 개입이 자본주의의 원활한 작동을 방해했다. 엄청난 규모의 자본이 잘못 배분되는 모습이 일상화됐다. 자본주의를 왜곡시킨 주역은 정부와 중앙은행들이었다. 위기에 직면했을 때 ‘조기에 과도할 정도로 대응하는 편이 낫다’고 목청을 높이며 그들은 시장이 효과적으로 투자할 수 있는 수준보다 더 많은 돈을 경제 시스템에 쏟아부었다. 정부는 빈곤층을 넘어 중산층과 부유층으로 ‘사회안전망’을 넓혔다.

정부는 위기를 자양분 삼아 본격적으로 몸집을 키웠다. 1987년 ‘검은 월요일’을 수습하기 위해 앨런 그린스펀 미국 중앙은행(Fed) 의장이 ‘이지 머니’ 정책의 물꼬를 텄다. 정부와 중앙은행이 차입을 장려하기 위해 금리를 낮추고, 수십억 달러를 들여 채권을 사들이고, 시장을 안정시키기 위한 긴급 대출, 개별 은행이나 기업에 대한 구제 금융을 시행했다. 이는 거대한 버블을 불러왔다.

작은 정부를 공언한 정부라고 실제 행동에선 다를 게 없었다. ‘관료 체제의 파괴’를 약속하며 출범한 도널드 트럼프 1기 체제는 트럼프 대통령이 무역 관세나 기술 기업 및 독점 기업에 대한 제한 같은 특정 규제를 ‘선호’한 탓에 규제완화 시도가 무위로 돌아갔다.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의 규제완화 ‘신화’도 실상을 들여다보면 허무하기 그지없다. 영국의 15개 규제 기관 중 철도규제청부터 라디오방송청 등 12개가 대처 집권기인 1980년 이후에 만들어졌다.

필연적으로 정부 곳간은 부실해졌다. 주요 자본주의 국가는 1970년대 초 이후 해마다 국내총생산(GDP)의 1%가 넘는 상당한 규모의 재정 적자를 냈다. 영국은 지난 50년간 재정 흑자를 낸 게 고작 다섯 번뿐이었다. 일본은 같은 기간에 한 번도 재정 흑자를 낸 적이 없다. 프랑스도 1974년 이후로 줄곧 재정 적자였다. 1980년부터 2020년까지 40년간 경기가 나빴던 기간은 5년이 채 되지 않았지만 주요국의 예산은 36년 동안 큰 폭의 적자를 기록했다.

그 과정에서 미국을 필두로 선진국들은 마약성 진통제에 의존하듯 서서히 부채에 중독됐다. 정부의 구제책은 인위적으로 불경기의 빈도를 줄이고 강도를 낮췄다. 하지만 부작용으로 정상적인 시장에선 퇴출당했을 부실기업도 ‘좀비’처럼 살아남았다. 이자를 낼 돈조차 벌지 못하는 기업들이 신규 대출을 받아 가며 연명했다. 20대 경제대국의 상장 기업 10개 중 하나가 사실상 ‘좀비 기업’일 정도가 됐다. 망하는 기업이 드물어지면서 기업 생태계의 순환이 멈췄고, 한번 실패한 기업에 두 번째 기회는 주어지지 않게 됐다.

‘좀비’까지는 아니더라도 돈을 벌지 못하는 ‘무수익 기업’도 늘어났다. 장기간 수익을 내지 못하는 적자 기업들이 전 세계적으로 확산했다. 3년 연속 적자를 기록한 기업의 비중은 1990년 미국 상장사의 3%에서 최근 25%까지 높아졌다.

위기 대응이 상시화되면서 위기의 빈도와 강도가 약해졌지만 경기 회복에는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경제성장의 속도도 더 느려졌다. 이런 변화의 흐름에 올라탄 은행은 승자가 됐다. 지난 40년 동안 금융 시장 규모는 세계경제 규모의 4배 이상으로 커졌다. 금융 시장은 이지 머니 문화로부터 동력을 얻어 확대됐다. 1980년부터 2020년까지 정부채와 회사채를 포함한 미국의 신용 시장은 25배나 성장해 GDP의 275%에 이르렀다.

진보주의자들이 사회복지제도의 재원을 대고 부의 격차를 줄이는 수단으로 여겼던 큰 정부와 돈 풀기는 오히려 억만장자 계급의 부상을 가속했고 소득 격차를 넓혔다. 세대 간 갈등도 키웠다. 특히 돈이 마구잡이로 풀린 여파로 집값이 급등하면서 미국 신혼부부가 집을 사기 위한 계약금을 저축하는 데 필요한 기간은 한 세대 전 3년에서 2019년 19년으로 늘었다. 밀레니얼 세대는 부모 집에서 계속 살게 될 확률이 이전 세대보다 거의 2배나 높고 실제 요즘 20대의 거의 절반은 부모와 같이 살고 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의 고질병은 어떻게 고치나. 해법은 ‘간단’하다. 자본주의가 바른 길을 가는 것을 막은 큰 정부, 이지 머니의 유혹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현실 속 모범답안도 있다. 요즘 ‘잘나간다’는 대만은 ‘간소화’를 추구하는 정부가 산업 정책을 관리한다. 현재 대만의 정부 지출은 GDP의 20% 미만이다. 이는 선진국 평균의 절반도 안 되는 수치다. 공무원 비율도 미국, 일본, 독일, 영국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낮고 공공 부채도 GDP의 34% 수준으로 선진국 평균의 4분의 1수준이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마오주의를 강화하기 전까지 중국의 경제 규모가 비약적으로 커진 것도 정부가 경제에 대한 통제를 완화한 덕이었다.

역사는 모든 소득 수준에서 민주주의가 전제주의보다 훨씬 안정된 성장을 이룬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람들이 몰려간 곳은 더 적은 세금과 더 가벼운 규제 그리고 그에 따라 인건비의 전반적인 감소를 약속하는 곳이었다. 물론 정부가 거의 1세기 동안 걸어온 경로를 갑자기 바꾸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19세기식 자유방임 자본주의로 돌아가는 것도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다만 최근 수십 년 동안 추구한 실험이 너무 비현실적이고 비생산적이었다는 자기반성은 너무나 절실하다. 자본주의가 성공하는 기본 전제는 제한된 정부가 개인의 자유와 기회를 보장하는 것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떠밀리듯 진로를 수정할 게 아니라 하루빨리 자본주의의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얘기다. 한국 사회에서도 ‘경제 위기’를 빌미 삼아 정부의 시장 개입을 확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책이 전하는 울림이 작지 않다.

김동욱 한경BP 편집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