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열린 미·남아공 정상회담은 남아공에 부과된 30% 고율 관세의 유예 조치와 희토류 등 자원 협력을 논의하는 자리가 될 예정이었다. 남아공은 ‘골프광’인 트럼프 대통령의 환심을 사기 위해 골프 선수 어니 엘스와 레티프 구센까지 배석시키며 우호적 분위기를 조성하려 했다.

시릴 라마포사 남아공 대통령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저게 어디인지도 모르겠다. 어디서 촬영된 것이냐”고 트럼프 대통령에게 물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남아공이라고 답하자, 라마포사 대통령은 “영상 속 장면이 자국의 실제 상황과 거리가 있다”며 “소수 극단주의자의 주장일 뿐”이라고 말했다.

이 장면은 TV 생중계로 고스란히 송출되었다. 회담 이후 백악관은 해당 영상을 "남아공의 인종 박해의 증거"라는 제목으로 공식 유튜브 계정에 게시했다.
외신들은 즉각 반응했다. 앞서 트럼프 대통령이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도 고성을 지르며 쫓아내듯 발언해 논란을 빚었던 사건을 소환했다. BBC는 “트럼프 외교는 대외정책이 아니라 국내 유권자를 위한 리얼리티쇼에 가깝다”고 꼬집었고, 가디언도 “트럼프는 외교를 TV 이벤트로 만들고 있다”고 지적했다.
영상은 남아공 아닌 콩고민주공화국...“명백한 왜곡”더 큰 문제는 트럼프 대통령이 ‘남아공 백인 농부 학살’의 증거로 제시한 영상 중 일부가 사실과 다른 것으로 드러났다는 점이다.
로이터통신은 회담 다음 날 해당 영상의 일부가 2023년 2월 콩고민주공화국 동부 고마(Goma)에서 촬영된 자사 보도 영상이라고 확인했다. 이는 르완다 지원을 받는 반군 M23의 공격 이후 시신을 수습하는 인도주의 단체들의 장면으로, 남아공과는 무관하다.
특히 당시 현장을 직접 촬영한 로이터 영상기자 자파르 알 카탄티는 “반군과 협상하고 적십자와 조율해 어렵게 찍은 영상인데, 미국 대통령이 이를 남아공의 인종 학살 증거로 왜곡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고 말혔다. 그는 “전 세계가 지켜보는 자리에서, 미국 대통령이 내가 콩고민주공화국에서 찍은 영상을 남아공의 ‘백인 학살’ 증거로 왜곡했다”고 덧붙였다.

BBC는 “트럼프 대통령이 멀티미디어를 활용해 상대국을 압박한 전례 없는 외교 퍼포먼스를 선보였다”며 “팩트체크 없이 음모론을 공식 외교무대에 올린 점이 충격적”이라고 평가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해당 영상들을 어떤 경로로 접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뉴욕타임스는 트럼프의 일론 머스크가 SNS 플랫폼 엑스(X)에 유사한 영상을 두 차례 게시한 바 있다고 지적했다. 머스크는 미국·캐나다·남아공의 복수국적을 갖고 있다. 워싱턴포스트는 이를 두고 “트럼프가 머스크와의 콜라 몇 잔으로 남아공 현실을 이해했다고 착각한 것”이라고 꼬집었다.
미국 백인 보수층 결집을 위한 퍼포먼스?일각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의 이 같은 행동이 국내 백인 보수층 결집을 위한 전략적 퍼포먼스라는 분석한다. 남아공의 ‘백인 인권 문제’를 부각시키며 미국 내 극우적 정서에 호소한다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남아공의 '백인 문제'를 외교 현안으로 꺼내 든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그는 앞서 남아공 정부가 추진 중인 ‘토지 수용법’을 백인들에 대한 토지 몰수로 규정하며 남아공에 대한 원조를 중단하는 행정명령을 발동했다. 이어 ▲남아공 대사 추방 ▲남아공 백인 난민 지위 인정 ▲30% 관세 부과 등 남아공에 대한 고강도 압박을 지속해왔다.
심지어는 11월 남아공 요하네스버그에서 열릴 G20 정상회의 업무 중단을 지시하며 사실상 불참을 선언하기도 했다. 미국의 이러한 행보는 자국 외교적 입지를 약화시킬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 미국 고위 관리는 워싱턴포스트에 “사실상 중국에 다자외교의 무대를 넘기는 셈”이라며 “중국은 이런 회의를 자국 이익에 맞게 조직적으로 활용하고 있다”고 우려했다.
고송희 인턴기자 kosh1125@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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