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질소득 그대로여도 소득세 늘어, 중산층에 가장 타격
선진국처럼 물가에 연동하는 과세제도 도입해야

마은성 연세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마은성 연세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조용히 찾아오는 증세만큼 무서운 건 없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고 법도 바뀌지 않았지만 어느새 세금은 늘고 있었다. 이는 소득세 과세구간이 물가와 무관하게 고정된 결과다.

한국의 소득세는 누진세 구조를 취하고 있다. 소득이 증가할수록 더 높은 세율을 적용하는 합리적인 방식이다. 하지만 문제는 과세표준 구간이 수년째 고정된 명목 기준이라는 점이다. 물가가 오르면서 명목임금도 함께 상승하면 실질소득은 변하지 않았음에도 더 높은 세율 구간에 진입하게 된다. 이른바 ‘브래킷 크리프(Bracket Creep)’ 현상이다.

연봉 4800만원을 받던 직장인이 물가상승률만큼 임금이 올라 5040만원을 받게 되면 기존에는 15% 세율이 적용되던 것이 24% 구간으로 넘어갈 수 있다. 실질 구매력은 그대로인데 세금은 더 내야 한다. 이는 ‘소득 능력에 비례한 과세’라는 조세의 기본 원칙을 훼손하는 구조적 문제다. 국회가 세율을 조정하거나 증세를 공표한 것도 아닌데 결과적으로 납세자의 실질 세 부담은 증가한다.

미국을 포함한 주요 선진국들은 이 문제를 제도적으로 차단하고 있다. 미국은 1980년대 중반부터 소득세 과세표준과 공제 항목을 소비자물가지수에 따라 매년 자동으로 조정하고 있다. 캐나다도 모든 연방 세율 구간과 기본공제를 물가에 맞춰 해마다 갱신한다.

반면 한국은 물가상승에 비해 임금이 오르지 않는 것도 문제지만 설령 임금이 오른다 해도 조세 구조가 이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해 또 다른 부담이 발생한다. 만약 향후 트럼프발 관세전쟁, 지정학적 리스크 등으로 인해 물가는 오르고 경기가 정체되거나 둔화하는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 환경이 도래한다면 이 문제는 더욱 두드러질 수밖에 없다. 물가가 오르면 임금도 오를 수밖에 없고, 이에 따라 더 높은 세율이 적용되면 정부가 민간소비를 억제하는 자동 긴축 효과가 나타나게 된다. 이는 불황기에 시행되어야 하는 확장적 재정정책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물가에 연동되지 않은 조세제도는 그 부담이 특히 중산층에 집중되는 구조를 보인다. 한계세율이 높은 이들 계층은 과세 구간이 조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명목소득이 조금만 상승해도 더 높은 세율 구간에 진입하게 된다. 이에 따라 실질 소득의 변화 없이 가처분소득이 크게 줄어드는 충격을 겪는다. 반면 고소득층은 상대적으로 한계세율 인상 여지가 적거나 이미 최고세율이 적용되는 구간에 위치해 명목소득이 상승하더라도 추가적인 세 부담이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이처럼 인플레이션을 반영하지 않는 과세 체계는 의도와 무관하게 세후소득 분배를 왜곡한다.

게다가 많은 경제학자들이 지적하듯, 저물가 시대는 이미 막을 내렸다. 과거에는 중국의 값싼 노동력 덕분에 전 세계가 저렴한 수입 물가의 혜택을 누렸지만 이제 그 기반이 약화되고 있다. 여기에 더해 보호무역 기조, 고령화 등 인구구조의 변화, 지정학적 리스크까지 겹치며 중간 수준 이상의 물가상승이 지속되는 ‘중물가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이제는 ‘조용한 증세’의 실체를 직시하고 해법을 실행에 옮겨야 한다. 어렵지 않다. 법률로 정해 매년 물가상승률에 맞춰 과세표준 구간과 공제액을 자동 조정하면 된다. 납세자 입장에서도 예측 가능성과 공정성이 확보된다. 이제 정치권이 이 문제를 더 이상 외면해서는 안 된다. 조세구간 물가연동은 단순한 기술적 조정이 아니라 실질소득 보호와 조세정의 실현을 위한 최소한의 제도 장치다. 지금 필요한 것은 조용한 증세가 아니라 조용하지만 본질적인 개혁이다.

마은성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