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재명 대통령이 6월 4일 취임하며 발표한 ‘취임 선서 후 국민께 드리는 말씀’엔 이 같은 내용이 나온다. 이 대통령은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라는 백범 김구 선생의 말씀을 인용하며 “문화가 꽃피는 나라를 만들겠다”라는 포부를 밝혔다.
새 정부가 주요 과제 중 하나로 문화산업의 발전을 꼽은 것에서 알 수 있듯, 문화산업이 가진 유무형의 가치와 파급력은 막강하다. ‘문화가 곧 경제’라는 것을 우리는 지난 20여 년에 걸쳐 전 세계로 퍼져나간 한류를 통해 직접 체감하지 않았는가. ‘K디스카운트’가 아니라 ‘K프리미엄’이 붙어 제조업, 유통업 등 산업 전반에 걸쳐 한국의 위상이 드높아진 것에도 문화의 힘이 컸다.
그런데 거대한 K컬처 열풍에도 한국의 문화산업은 다양한 위험에 직면해 있다. 시장 환경이 급변하면서 영화, 방송,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등 여러 분야에 걸쳐 파열음이 발생하고 있다. 그동안은 K컬처가 자생력을 키워오며 성장을 거듭해 왔지만 더 이상은 나아가기 힘든 다양한 한계 요인이 발생했다. 넷플릭스, 유튜브 등 새로운 글로벌 플랫폼의 등장으로 시장의 셈법이 더욱 복잡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존의 틀을 유지하는 수준의 노력만으로는 금방 도태되고 거대한 변화의 물결에 휩쓸릴 수 있다. 이럴 때일수록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과 시스템 정비로 신성장동력을 마련해야만 한다. K무비의 토양 ‘영발기금’ 문제 해소해야
한국의 문화산업 가운데서도 위기감이 가장 크게 확산되고 있는 분야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넷플릭스를 포함한 OTT를 중심으로 산업이 재편되면서 한국 영화 시장은 극심한 침체를 겪고 있다. 그중에서도 한국 영화의 성장과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영화발전기금(이하 영발기금) 개선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2007년 신설된 영발기금은 영화 제작과 유통, 상영 지원 등 전 분야에 걸쳐 활용되어 왔다. 좁고 열악한 시장 환경에도 뛰어난 한국 영화와 감독이 꾸준히 나올 수 있었던 것엔 영발기금의 힘이 컸다.
그런데 영발기금의 상당 부분은 영화관 관람료의 3%를 받아 충당하고 있다. 이를 둘러싸고 최근 혼란이 가중되기도 했다. 지난 정권에서 3% 부과금이 폐지됐다가 올해 3월 다시 징수를 의무화하는 법 개정안이 통과된 것이다. 제대로 된 재원을 마련하는 절차도 없이 무작정 극장의 티켓값 인하를 기대한다는 이유로 부과금이 폐지됐었다. 하지만 폐지 이후 티켓값은 인하되지 않았고 영발기금의 고갈 우려만 더욱 높아져갔다. 결국 부과금을 부활하게 되면서 논란이 일단락됐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극장 관객 수가 급감하고 있는 가운데 이대로라면 영발기금은 가까운 시일 내에 고갈될 위기에 처하게 된다.
결국 시장이 되살아나기 위해선 영발기금의 다양한 재원 확보를 위한 법적 근거들을 반드시 마련해야 한다. 이를 위해 영화계는 영발기금을 복권기금의 배분 대상으로 삼는다는 내용을 관련 법에 구체적으로 명시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기존에도 복권기금에서 지원받고는 있었지만 법으로 보다 명확히 규정해 안정적이고 확실한 재원으로 삼겠다는 방침이다. 이뿐만 아니라 영발기금은 다양한 신규 재원을 확보하여 운영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영발기금으로 더욱 많은 한국 영화가 제작될 수 있고 미래에 명장이 될 신인 감독들도 배출될 수 있다.
코로나 이후 맥이 끊겨버린 한국 영화에 대한 투자를 끌어낼 유인책도 마련해야 한다. 특히 중예산 영화에 대한 투자가 활성화되어야 한다. 최근 한국 영화 시장에선 중예산 영화를 찾아보기 힘들어지고 있다. 중예산 영화는 시장의 ‘허리’ 역할을 해왔다. 대작에 비해 가볍지만 상업적 흥행 요인을 충분히 갖추고 있고, 기발하고 의미 있는 시도로 시장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하지만 코로나 이후 중예산 영화에 대한 투자가 급격히 줄어들었으며 각종 지원 정책의 사각 지대에도 놓여 있어 이중고를 겪고 있다. 이를 해소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준다면 한국 영화 산업의 길고 긴 가뭄이 끝날 수 있지 않을까. K컬처 위상에 안 맞는 ‘1.33%’
최근 한국 방송 시장도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넷플릭스가 2016년 한국에 진출한 이후 과도하게 제작비가 상승하면서 부담이 가중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정부의 지원도 넷플릭스를 비롯한 OTT에 납품될 콘텐츠에 집중된 경향이 크다. 이렇게 되면 결국 넷플릭스 등 글로벌 OTT가 그 수혜를 상당 부분 가져가게 된다. 반면 정작 지원이 필요한 소규모 작품이나 여러 세대가 즐겨볼 수 있는 방송용 작품들은 계속 밀려나게 된다. 드라마, 예능, 교양, 다큐 등 여러 장르에 걸쳐 제작비가 필요한 작품에 골고루 돈이 흐를 수 있도록 하는 균형 잡힌 지원 체계가 마련돼야 한다.
경쟁력 있는 토종 OTT를 키워낼 수 있는 방안도 절실하다. 넷플릭스 독주 체제가 굳건해지던 중 들려온 티빙과 웨이브의 합병 승인 소식은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양사가 단순히 물리적인 합병을 하는 데 그치지 않고, 태생적 한계를 벗어나 새로운 동력을 마련할 수 있는 실효성 있는 정책 지원이 함께 이뤄져야 한다. 현재 토종 OTT는 적자 구조가 심화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대대적인 콘텐츠 투자를 하기도 어렵고 제작을 아예 안 할 수도 없는 처지에 놓여 있다. 이럴 때일수록 정부가 영국을 비롯한 유럽과 같이 토종 OTT에 각종 세제 지원을 해준다면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오랜 시간 논란이 되고 있는 기금 징수 문제에 대해서도 보다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현재 문화계에선 영발기금, 방송통신발전기금(이하 방발기금) 징수를 둘러싸고 찬반 논란이 격화되고 있다. 두 기금 모두 수익성이 악화되고 있는 레거시 미디어를 대상으로 기금을 징수하고 있다보니 기금 규모가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 이에 따라 OTT에도 영발기금, 방발기금을 징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토종 OTT가 적자를 이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두 기금까지 징수하게 되면 타격이 커질 수 있다. 게다가 넷플릭스나 유튜브 같은 글로벌 기업에 대해선 국내의 법을 적용하기 어려워 역차별이 일어날 수 있다. 따라서 토종 OTT에 기금을 징수하기보다는 두 기금의 징수 체계 전반에 대한 대대적인 재검토와 개선을 통해 문제를 타개해야 한다.
결국 지원이란 국민의 세금에선 비롯된 정부 예산 사용을 의미한다. 다른 산업군 곳곳에도 예산을 써야 하니 문화산업에만 무한정 예산을 늘려 달라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올해 기준 국내 문화재정은 국가 총지출의 1.33%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K컬처 강국의 위상에 맞지 않는 수준이 아닌가. 그동안 문화계 종사자들이 얼마나 고되고 힘겨운 길을 걸어왔는지 짐작할 수 있다. 결국 현 수준보다는 예산을 증액해야 K컬처가 더욱 힘차게 달릴 수 있다. 또한 아주 많은 예산을 들이진 않더라도 기존의 지원체계를 함께 재정비한다면 효율성을 극대화할 수 있다.
이처럼 튼튼하고 새로운 호흡기, 질 좋은 영양제가 주어진다면 K컬처는 얼마든지 더 멀리 더 높게 날아오를 수 있지 않을까. 앞으로 5년 안에 K컬처 300조원 시장을 열겠다는 새 정부의 희망이자 약속이 반드시 이뤄지길 고대한다.
김희경 인제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영화평론가 kimhk@inje.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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