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 대통령의 고교 교훈은 생존과 실용? [하영춘 칼럼]
얼마 전 선배 한 분이 고등학교 교훈이 뭐냐고 물었다. 졸업한 지 40년도 넘은 고교의 교훈이라니? 난감했지만 ‘성실 근면 창조’라는 대답이 절로 나왔다. 맞나 싶어 찾아봤더니 정확했다. 어떻게 기억해 냈을까? 고등학교 시절 교실 앞에는 태극기와 교훈·급훈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 급훈은 1년 만에 바뀌었지만 교훈은 3년 내내 그대로였다. 3년 동안 고개만 들면 교훈이 보였으니 머릿속에 각인돼 있었던 것 같다.

내가 나온 고교의 교훈은 다분히 교훈적이다. 그렇지 않은 학교도 많다. 서울의 명문 경기고의 교훈은 ‘자유인 문화인 평화인’이다. 개교 120년이 넘었지만 요즘에도 어울린다. 인천 제물포고의 교훈은 ‘학식은 사회의 등불, 양심은 민족의 소금’이다. 1956년부터 무감독시험을 유지하고 있는 학교답다. 경북고는 ‘아는 사람(知), 생각하는 사람(思), 행하는 사람(行)’이란 교훈을, 광주제일고는 ‘다하라 충효, 이어라 전통, 길러라 실력’이라는 교훈을 갖고 있다. 지역 명문 고교다운 교훈이다.

대통령들이 나온 고교의 교훈은 어떨까? 김영삼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의 모교인 경남고의 교훈은 ‘근검 자립하자, 규율을 지켜 자유롭게 살자, 책임을 다해 얼려 살자’다. 김대중 대통령이 나온 목포상고(현재 목상고)는 ‘밝은 마음, 알찬 실력, 바른 행동’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부산상고(현 개성고)는 ‘우리는 인품을 함양하고 신체를 단련하며 실학을 연마하여 생활의 힘을 배양한다’는 교훈을 갖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의 동지상고(현 동지고)는 ‘동지혼으로 참을 알고 의를 좇고 덕을 닦자’를, 박근혜 대통령의 성심여고는 ‘진실 정의 사랑’을, 윤석열 대통령의 충암고는 ‘성실 근면’을 각각 교훈으로 걸고 있다.

고교 교훈은 단순히 교훈에 불과하다. 하지만 고교 시절 3년은 감수성이 예민하고 인격이 정립되는 시기다. 이 시기에 건학이념이 담긴 교훈을 새기다보면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은 있다.

그렇다면 이재명 대통령의 교훈은? 그는 소년공을 하면서 중고교 과정을 검정고시로 마쳤으니 고교 교훈이 없다. 이 대통령이 고등학생 나이 때 가장 많이 떠올렸을 단어는 ‘생존’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의 생존 철학은 정치를 하면서 실용주의로 이어진 것 같다. 취임사에서 이재명 정부를 ‘실용적 시장주의 정부’라고 규정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취임 후 행보도 다분히 실용적이다. 전통시장과 증권거래소를 찾고 실무자들과 토론하는 것 때문만은 아니다. 인사를 보면 그렇다. 그는 대통령실 정책실장과 국가안보실장에 관료 출신을 임명했다. 이른바 소득주도성장 이론으로 무장한 교수들을 정책실장과 경제수석에 앉혔던 문재인 정부와는 다르다. 방향은 자신이 정하되 유능한 관료로 하여금 성과를 내도록 하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대통령실 참모들은 생사고락을 같이한 이른바 ‘성남라인’을 중용했다.

실용적 인사가 계속될지, 그런 인사가 어떤 결과를 나을지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초기 인사에서 보면 특정 이념으로 무장한 채 과거 진보 정부의 핵심으로 군림했던 이른바 586세대가 퇴조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실용이 만들어낸 진보진영 내의 세력교체다.

이 대통령이 고교생 나이 때 가장 많이 떠올렸을 생존이라는 단어가 이런 변화를 계속 만들어내며 “제2의 IMF위기 상황”(김민석 국무총리 후보자)인 대한민국을 구해낼 수 있을지 지켜봐야 할 듯하다.

하영춘 한경비즈니스 발행인 ha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