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재 강요 없지만 경쟁 차단 인정
“경쟁제한 효과가 핵심”
대법원 특별2부(주심 오경미 대법관)는 코리안리가 공정위를 상대로 낸 시정명령 등 취소청구 소송(2020두54074)에서 지난 6월 5일 원심 판결의 원고 일부 승소 부분을 파기하고 서울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공정위를 대리한 법무법인 지평(담당변호사 김지홍·윤동영·장품)은 코리안리를 대리한 김앤장법률사무소의 안재홍·강상욱 변호사를 상대로 승소했다.
62년 독점기업, 특약 체제로 시장 지배
코리안리는 1962년 국영기업으로 출범해 1978년 민영화됐지만 국내 유일 전업 재보험사 지위를 유지했다. 항공보험 재보험시장에서 90%, 전체 재보험시장에서 50% 이상의 압도적 점유율을 기록하고 있다.
1993년까지 ‘국내우선출재제도’로 독점적 지위가 보장됐지만 제도 폐지 후에도 1999년부터 2017년까지 국내 손해보험사 11곳과 특약을 체결해 사실상 독점을 유지했다.
특약의 핵심은 △전량출재의무(일정 금액 초과 위험은 100% 코리안리 출재) △요율구득의무(보험요율 사전 협의) △재재보험특약(해외사보다 국내사 우선 계약)이었다. 여기에 해외사 ‘패널’ 구성과 국내사 제재 위협까지 더해 정교한 경쟁 차단 시스템을 구축했다.
문제는 1993년 이 제도가 폐지된 후에도 코리안리의 독점적 지위가 계속됐다는 점이다. 정부의 공식적인 뒷받침이 사라졌는데도 시장구조는 변하지 않았다. 바로 여기서 공정거래 이슈가 불거졌다.
공정위 “명백한 시장지배적 지위 남용”
공정위는 2018년 12월 코리안리에 대해 강력한 제재를 가했다. 시정명령과 함께 과징금 78억6500만원을 부과한 것이다.
공정위는 “코리안리가 구축한 특약 체제는 과거 정부의 국내우선출재제도와 보험요율구득제도를 민간 차원에서 재현한 것”이라며 “시장지배적 사업자로서 부당하게 경쟁사업자를 배제했다”고 판단했다.
법적 근거로는 구 공정거래법 제3조의 2 제1항 제5호(시장지배적 지위 남용)와 제23조 제1항 제5호(배타조건부 거래)를 제시했다. 코리안리의 행위가 두 조항을 모두 위반했다는 것이다.
과징금 산정에서는 코리안리의 2016년 관련 매출액 393억원을 기준으로 2%인 7억8600만원을 기본 과징금으로 잡고 위반 기간(18년)과 시장지배력 등을 고려해 10배 가중해 78억6500만원으로 최종 결정했다.
서울고법 “자발적 합의는 위법 아니다”
하지만 서울고법은 2020년 10월 코리안리의 손을 들어줬다. 시정명령 일부와 과징금 처분을 모두 취소한 것이다. 고법의 논리는 ‘강제성’ 부재에 집중됐다. 재판부는 “코리안리가 국내 보험사들에게 특약 조항 체결을 강제했다고 보기 어렵다”며 “국내 보험사들이 사무처리 편의, 위험 분산 등을 위해 자발적으로 선택한 것”이라고 봤다.
특히 배타조건부 거래의 성립요건에 대해 엄격한 해석을 내렸다. “거래상대방이 자기 또는 계열회사의 경쟁사업자와 거래하지 않는 조건으로 거래하는 행위”에 해당하려면 사업자가 일방적·강제적으로 조건을 부과해야 한다는 것이다.
고법은 개별 조항별로 세밀하게 검토했다. △전량출재의무 조항 △재재보험특약 조항 △해외 패널 구성 행위 △2006년 이전 요율구득의무는 모두 배타조건부 거래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다만 2006년 이후 요율구득의무와 방어행위에 대해서는 “코리안리가 경쟁사업자 배제 의도를 갖고 적극적으로 개입했다”며 위법성을 인정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전체 과징금을 유지할 수 없다고 보고 과징금 처분도 취소했다.
대법원 “자발적 합의도 심사 대상”
대법원은 지난 6월 5일 원심을 파기환송하며 새로운 법리를 제시했다. 대법원은 “거래상대방이 시장지배적 사업자의 경쟁사업자와 거래하지 않는 조건에 대해 자발적으로 합의했다고 하더라도 경쟁사업자의 시장 진출이 방해돼 경쟁제한적 효과에 대한 심사가 필요하다”고 판시했다.
배타조건부 거래 성립에 ‘강제성’은 필수요건이 아니라는 새로운 법리를 확립한 것이다. 형식적으로는 자발적 합의처럼 보여도 실질적으로 경쟁을 제한하는 효과가 있으면 위법할 수 있다는 의미다.
대법원은 또 다른 중요한 판단 기준도 제시했다. 개별 행위를 따로따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일련의 행위를 종합해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전량출재의무 조항, 요율구득의무 조항, 재재보험특약 조항, 패널구성행위, 방어행위는 모두 코리안리가 경쟁사업자를 배제하기 위한 단일한 의사 아래 이뤄진 행위”라며 “일련의 행위들을 종합해 판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각 조항의 역할도 분석했다. 전량출재와 요율구득 조항이 ‘핵심 배타장치’ 역할을 하고 재재보험특약은 국내사들이 특약 체제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하는 ‘당근’, 패널구성 행위는 해외사들의 독립적 진입을 막는 ‘장벽’ 기능을 한다고 봤다.
대법원은 원심의 오류를 조목조목 지적했다. 첫째, 배타조건부 거래 성립에 강제성이 필요하다는 전제 자체가 잘못됐다고 봤다. 둘째, 개별 행위 중심의 분절적 심사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원심은 이러한 행위를 종합해 일체로 검토하지 않고 개개로 나눠 독립적으로 검토했다”며 “시장지배적 사업자가 경쟁사업자를 배제하기 위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된 행위를 했을 때 판단하는 방식에 관한 법리를 오해했다”고 판단했다.
사건은 이제 서울고법으로 돌아가 구체적인 경쟁제한성과 과징금 수준이 다시 결정된다. 공정위가 처음 부과한 78억6500만원이 그대로 유지될지, 아니면 더 늘어나거나 줄어들지가 관건이다. 대법원이 위법 행위의 범위를 확대한 만큼 과징금이 오히려 늘어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돋보기]
재보험업계 대지진 예고…“영업모델 전면 재설계 불가피”
이번 대법원 판결은 코리안리는 물론 재보험업계 전체에 상당한 파장을 몰고 올 전망이다. 코리안리로서는 기존 영업방식의 전면적 재검토가 불가피하다. 18년간 유지해온 특약 체제를 근본적으로 바꿔야 하기 때문이다.
전량출재의무나 요율구득의무 같은 핵심 조항들을 더 이상 유지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해외 재보험사들의 국내 진출도 활발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그동안 코리안리의 특약 체제와 패널 시스템에 막혀 있던 진입 장벽이 낮아지기 때문이다.
특히 대형 글로벌 재보험사들이 한국 시장에 본격적인 관심을 보일 가능성이 높다. 국내 손해보험사들도 선택의 폭이 넓어진다. 과거에는 사실상 코리안리 외에는 대안이 없었지만 이제는 여러 재보험사를 비교 검토하며 더 유리한 조건을 찾을 수 있게 됐다.
이번 판결의 더 큰 의미는 한국 공정거래법 해석과 적용에서의 패러다임 전환이다. 기존에는 시장지배적 사업자가 거래상대방에게 명시적이고 강제적으로 조건을 부과해야 위법하다고 봤다.
하지만 이제는 겉으로는 자발적 합의처럼 보여도 실질적으로 경쟁을 제한하는 효과가 있으면 심사 대상이 된다. 개별 행위가 아닌 전체적·체계적 관점에서의 심사도 중요한 변화다. 정교하고 복합적인 경쟁제한 전략에 대한 보다 효과적인 규제가 가능해졌다는 의미다.
허란 한국경제 기자 wh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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