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무대에서 미국이 또 한번 기지개를 켰다. 2016년 구글의 알파고, 2023년 오픈AI의 챗GPT를 시작으로 미국의 AI 공격은 이어지고 있다. 이후 미국은 국가안보 전략의 핵심으로 AI를 명시하고 기술 패권 강화를 공언하고 있다. 그리고 지난 7월 23일 세계가 관세에 집중한 사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AI 패권 강화를 위한 3건의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사실상 미·중 AI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이 조치엔 미국의 AI 지배력 강화를 위한 내용들이 담겼다. 전문가들은 “장애물은 없애고 연방정부의 보호는 극대화하는 구조”라며 앞으로 미중간 자국산 AI 수출 경쟁이 본격화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동시에 “AI를 정치화하고 있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AI 수출 통한 패권 강화“우리는 어떤 외국 국가도 우리를 이기도록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지난 7월 23일 트럼프 대통령은 워싱턴DC에서 열린 ‘AI 경쟁 승리’ 행사에서 “오늘부터 미국이 세계를 이끌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할 것이라는 게 미국의 정책이 될 것”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AI 시대의 주역으로 꼽히는 엔비디아의 젠슨 황 CEO도 참석한 가운데 트럼프 대통령은 연설을 마친 후 즉각 AI 관련 행정명령 3건에 서명했다.
△AI 모델에 이념적 편향이나 사회적 의도 배제 △AI 데이터센터와 인프라 구축 시 연방 허가 가속화 및 국유토지 활용 △연방정부 기관을 통해 미국 AI 모델의 해외 수출 촉진 등이다.
첫째 행정명령은 사실상 민주당을 겨냥한 행정명령이다. “미국인들은 신뢰할 수 있는 AI 결과물을 필요로 하겠지만 AI 모델에 이념적 편향이나 사회적 의도가 내재될 경우 정확성과 품질을 왜곡할 수 있다”며 이러한 편향 중에서도 특히 광범위하고 파괴적인 이념으로 꼽히는 것이 ‘다양성, 형평성, 포용성(DEI)’이라고 지적했다. DEI는 지난 조 바이든 정부가 내건 가치다. 2021년 바이든 전 대통령은 취임 첫날 DEI를 정책으로 채택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고 트럼프 대통령은 보란 듯 취임 첫날 이를 폐지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다른 두 건의 행동명령은 연방정부의 파격적 지원을 담았다. 우선 AI 시대 핵심 인프라인 데이터센터 지원이다. AI 기술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전력 공급과 열처리, 컴퓨팅 자원의 안정적 관리를 위한 데이터센터 인프라가 필수다.
실제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은 최근 세계 각지에서 데이터센터 투자를 쏟아붓고 있다. 하지만 수요 속도는 공급을 앞지르고 있다. 글로벌 상업용 부동산 기업 CBRE에 따르면 지난해 상반기 북미 데이터센터 공실률은 2.8%로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 ‘세계 데이터센터 수도’로 불리는 미국 버지니아 북부 지역의 공실률은 1%에 불과하다.
문제는 부지 선정부터 발전소 확보, 자금조달, 설비 구축까지 오랜 시간과 막대한 비용이 든다는 점이다. 그만큼 입지만 확보해도 AI 패권 경쟁에서 한발 앞설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행정명령을 통해 “연방 규제 부담을 완화해 데이터센터 인프라의 신속하고 효율적인 구축을 최우선 과제로 삼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나아가 연방정부가 보유한 토지와 자원을 데이터센터 개발에 활용하겠다고 강조했다.
마지막 행정명령은 ‘AI 풀스택 패키지’ 수출. 글로벌 AI 시장에서 주도권을 강화하기 위해 미국산 AI 기술의 국제적 확산을 전폭적으로 지원하는 정책을 추진하겠다고 했다.
미국이 추진하는 ‘AI 풀스택 수출’은 AI 기술을 하나의 ‘완성 패키지’로 묶어 해외에 판매하겠다는 전략이다. 단순히 AI 모델만 수출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구동하기 위한 칩과 서버 같은 하드웨어, 데이터를 수집·분류하는 시스템, 생성형 AI 모델, 사이버 보안 장치, 실제 활용 가능한 응용 서비스까지 포함된다.
이 모든 기술을 하나로 묶어 ‘한 장비, 한 규격, 미국식’으로 수출함으로써, 세계 각국이 미국의 AI 표준을 따르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미국이 만든 AI 시스템을 그대로 가져다 쓰게 만들겠다”는 전략이다.
이를 위해 상무부 장관과 국무부 장관이 서명일로부터 90일 이내에 ‘미국 AI 수출 프로그램’을 설립하고 이 프로그램을 통해 AI 수출을 장려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수출 지원을 위해 대출이나 보증, 지분 투자 등 금융서비스도 총동원한다고 했다. “중국보다 먼저” 터보 부스터 단 수출 전략3건의 행정명령은 강력하다. 미국 펀드스트랫의 대표 전략가 톰 리는 “한마디로 미국이 AI 분야에서 선두자리를 공고히 하며 글로벌 주도권을 강화하려는 의도가 담긴 것”이라고 분석했다.
싱가포르국립대 기계공학과 PS 리 교수는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백악관은 미국 AI 하드웨어를 보호하던 ‘높은 울타리’를 허물고 그 자리에 터보 부스터가 달린 수출 전략을 세웠다”며 “중국이 자국 내에서 기술을 혁신하기 전에 미국산 칩과 소프트웨어를 신뢰할 수 있는 동맹국에 더 빠르게 이전하는 명확한 전략”이라고 설명했다.
AI 수출 전략에 따라 국가별 AI 양극화도 더 심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미국 영향권 밖의 국가들이나 데이터센터 인프라가 부족한 국가들은 오히려 더 큰 격차에 직면하게 될 수 있다”며 “‘이중 구조의 글로벌 AI 질서’가 고착될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미국의 AI 수출 전략은 동맹국에도 고민거리를 안기고 있다. 미국의 대표 로펌인 발라드스파르(Ballard Spahr)는 “미국이 자국산 칩에 집중하고, 해외 기술을 제한하려는 움직임은 글로벌 기업들의 공급망 운영을 더 복잡하게 만들 수 있다”고 진단했다. 외국 부품이나 기술에 의존하는 기업들은 새로운 규제 환경 속에서 조달 비용이 늘어나거나 공급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이번 조치는 단순히 반도체 완제품에만 그치지 않는다. 발라드스파르에 따르면, 미국은 반도체 생산에 필요한 특수 장비, 부품, 소프트웨어 등 이른바 ‘반도체 하위 생태계’까지 통제 범위에 포함시켰다. 이에 따라 데이터센터, 클라우드, 통신, 자동차, 항공우주 등 첨단 칩에 의존하는 주요 산업 전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AI 주권 논쟁 기름 부을 것브루킹스연구소 학자들도 우려를 내놨다. 연구소 소속 학자들은 특히 AI 풀스택 패키지 수출이 글로벌 시장 질서에 적잖은 파장을 미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연구소는 “전 세계적으로 AI 시스템에 대한 통제권과 자율성은 자국이 유지하려는 흐름이 강해지고 있다”며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AI 풀스택 패키지 수출’은 사실상 AI 주권 공간에 미국 깃발을 꽂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미국은 AI 연구개발, 투자에서 세계를 선도하고 있으며 수출 가능한 기술도 충분하다”면서도 “이번 행정명령이 오히려 미국 기술의 수출을 더 어렵게 만들 수 있다”고 우려했다.
특히 미국이 ‘전부 아니면 전무(all-or-nothing)’ 식의 수출 전략을 고수할 경우 AI 주권과 글로벌 협력 간의 균형은 더 어려워지고 미국 기술 의존성에 대한 국제사회의 우려만 증폭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AI의 정치화에 대한 우려도 잇따랐다. IBM 마스터 인벤터 닐 사호타는 NPR과 인터뷰에서 “AI 글로벌 경쟁이 치열한 상황에서 이렇게 모호한 기준을 도입해 기존의 보호장치를 제거하려 한다면 규제완화가 아닌 정치적 간섭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는 특히 소규모 AI 스타트업에 가장 큰 부담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구글·마이크로소프트·오픈AI 같은 대형 기업은 법적 리스크를 감당할 여력이 있지만 정치적 이념이 기술적 우수성보다 우선하는 환경에서 중소 개발사들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정채희 기자 poof34@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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