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팩토리 테마주들도 상한가를 기록하며 강세를 이어갔다.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법안이 로봇 관련주를 시장의 주인공으로 만들었다. ‘노란봉투법 수혜주’가 엉뚱한 곳에서 탄생한 셈이다.
일부 중견 제조업체들은 정규직 충원을 중단하고 자동화 설비 투자로 전환을 추진 중이다. 인천 소재의 한 중소기업 관계자는 “로봇은 파업하지 않고 초과수당도 요구하지 않으며 노조도 만들지 않는다”며 “앞으로 대기업들뿐 아니라 중소 제조업체들도 자동화를 확대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업계에서는 고용을 지키기 위한 법안이 오히려 국내 일자리를 줄이는 ‘탈노동 시대’의 역설을 만들어냈다는 지적이 나온다.
노란봉투법(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2·3조 개정안)은 하청노동자의 원청 대상 단체교섭을 허용하고 노조 쟁의행위에 대한 기업의 손해배상 청구를 제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노동자 권리를 보호하겠다는 취지지만 시장은 노란봉투법 시행이 기업들의 노동 리스크 회피와 법적 불확실성 대응을 위한 로봇과 자동화 설비 도입을 가속하는 계기로 작용할 것으로 보고 있다.
제조업을 시작으로 물류, 건설, 유통, 헬스케어까지 로봇 도입이 확산할 것이라는 게 업계 전망이다. 특히 피지컬 AI가 로봇 상용화 속도를 더할 것이란 평가다.
법 통과 직후 기업들의 움직임은 분주하다. 노무 리스크 대응을 위한 법무법인 자문 확대와 전담 TF 구성이 늘었다. 한 제조기업 임원은 “경영 판단까지 쟁의 대상이 되다 보니 고용을 지키는 법이 오히려 고용을 줄이는 역설을 낳을까 걱정”이라고 말했다.
실제 대한상공회의소가 국내 기업 600개, 외국인 투자기업 167개 대상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국내외 기업의 45%는 노란봉투법이 통과될 경우 협력 업체와의 계약 조건을 변경하거나 거래처를 다변화하겠다고 밝혔다.
또한 40.6%는 국내 사업의 축소·철수·폐지를, 30.1%는 해외사업 비중 확대를 검토 중인 것으로 나타났다. 외투기업의 50.3%는 본사의 투자 결정이 지연되거나 철회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산업 현장에서는 이미 파업 도미노가 진행 중이다. 현대자동차, HD현대중공업 등 주요 기업들이 잇따라 파업에 직면하면서 생산 차질과 경영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다.
특히 노조의 쟁의 범위가 임금·근로조건을 넘어 경영 판단까지 확대되면서 기업들의 우려는 더욱 깊어지고 있다. 현대차 노조는 9월 3일 7년 만에 파업에 들어갔다. 울산 5개 공장은 이날 오후 1시 30분 일제히 생산라인을 멈췄다. 시간당 평균 375대를 생산하는 울산공장만 놓고 보면 이날 1500대의 생산 차질이 예상된다.
전주·아산공장 역시 2시간씩 생산라인이 멈췄다. 노조는 사측에 월 기본급 14만1300원 인상(호봉승급분 제외), 지난해 순이익의 30% 성과급 지급, 소득 공백 없는 정년연장(최장 64세), 주 4.5일제 도입, 상여금 인상 등을 요구하고 있다.
여기에 현대차 노조는 ‘신사업 통지 의무’를 올해 단체협약에 추가하는 방안과 해외 공장 설립 및 해외 SKD(부분조립생산) 공장을 증설할 때도 노조에 미리 알리는 방안을 사측과 조율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HD현대중공업 노조(금속노조 현대중공업지부)도 이날 오후 1시부터 하루 4시간 파업에 들어갔다. HD현대중공업, HD현대미포, HD현대삼호 등 HD현대 조선 3사 노조가 올해 들어 처음 벌이는 공동 파업이다.
노조는 최근 HD현대중공업과 HD현대미포조선의 합병 결정에 따라 반발 수위를 더욱 높이고 있다. 노조는 합병에 따른 전환 배치와 고용 불안을 우려하며 고용안정협약서 작성을 요구하고 있다.
노조는 공동성명을 통해 “합병 추진은 승계작업의 일환”이라고 규정하고 “회사가 제시한 합병 자료 어디에도 고용 안정, 전환 배치 대책, 성과 보장은 없다”며 “(미국과 협력하는) 국가 전략 프로젝트인 ‘마스가(MASGA·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는 자국민 기술자와 숙련 인력이 없이는 결코 실현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조선업계에서 기업 합병 등 경영 판단을 두고 노조가 파업을 예고한 것은 이례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임금·근로조건을 넘어 구조조정과 사업 통폐합까지 쟁의행위 범위가 확대되면서 노란봉투법에 대한 우려가 현실화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현대제철 비정규직 하청노조는 정의선 회장 등 사측 대표 3인을 ‘파견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고소했다. 포스코 노조도 창사 57년 만의 임금 인상 요구 파업 검토에 나섰다. 민주노총 건설노조는 SK에코플랜트의 반도체 현장 추가 고용을 요구하며 본사 앞 시위를 예고했다.
외국계 기업들의 한국 철수 가능성도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한국GM 노조는 특근 거부 및 부분 파업을 이어갔으며 헥터 비자레알 한국GM 사장은 “노란봉투법 현실화 시 본사가 한국GM을 재평가할 수 있다”고 말해 사실상 철수 가능성을 내비쳤다. 주한미국·유럽상공회의소도 외국인투자기업들의 한국 사업 지속이 어려울 수 있다는 경고를 내놓았다.
기업들의 ‘코리아 엑소더스’도 더 이상 우려 수준에 머무르지 않고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현대차그룹은 최근 미국 내 투자 규모를 기존 210억 달러에서 260억 달러(약 36조원)로 대폭 늘리겠다고 밝혔다.
2029년까지 연간 3만 대 규모의 로봇 생산 공장을 신설하겠다는 계획도 내놨다. 미국을 로봇산업의 글로벌 허브로 삼겠다는 구상이다.
한화와 HD현대 역시 한·미 정상회담과 미국 조선업 부흥을 위한 마스가 프로젝트를 계기로 미국 중심의 해외 투자 확대에 속도를 내고 있다. 노동법 리스크와 불확실성이 커진 한국보다 인센티브와 규제완화가 기대되는 미국 시장이 훨씬 안정적이라는 판단에서다.
AI가 화이트칼라와 블루칼라 모두를 동시에 흔들고 있으며 고용이 아닌 기술이 중심이 되는 ‘탈(脫)노동 시대’로의 이행이 현실화하고 있다. 세계경제포럼(WEF) 조사에 따르면 AI 기술 확산에 따라 전 세계 기업의 41%가 2030년까지 고용을 축소할 계획이다.
브루킹스연구소는 미국 전체 노동자의 30%는 업무의 절반 이상을 AI의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있으며 전체 노동자의 85% 이상은 업무 중 최소 10%가 AI로 인해 변화될 것으로 예측한다.
기업들이 빠르게 해외로 눈을 돌리는 사이 국내에서는 고용노동부의 대응이 뒷북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노동시장 충격이 가시화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노란봉투법 해석과 노사 중재에만 집중할 뿐 산업 변화에 따른 고용 재설계나 일자리 이행 전략은 부재하다는 것이다.
한 경제단체 관계자는 “일자리와 투자 문제가 동시에 흔들리는데 정부 컨트롤타워가 보이지 않는다”며 “고용노동부는 기술 전환과 산업 재편 흐름에 맞춰 선제적인 노동정책을 내놔야 할 때다. 정부가 방향을 잡지 못하면 고용도 투자도 한국을 떠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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