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법적 무역거래 뒤에 숨은 범죄의 그림자
지난 8월 관세청이 발표한 특별단속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수출입 실적 조작 등 무역경제범죄 적발 건수가 2024년에만 100건, 9062억원 규모에 달했다. 이는 금액기준으로 전년 대비 90% 급증한 수치다. 특히 주목할 점은 단순한 세금포탈을 넘어 자본시장 교란과 투자자 피해로 확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관세청이 지금 주목하는 더 큰 위협이 있다. 바로 ‘무역기반 자금세탁(TBML: Trade-Based Money Laundering)’이다. 이는 범죄자금을 위장하고 불법적인 근원을 정당화하기 위해 무역거래를 이용해 그 가치를 이동하는 수법으로 전 세계 경제안보를 위협하는 새로운 범죄 패러다임이다.
2억6700만 달러 압수, 세계가 움직이고 있다
2024년 세계관세기구(WCO)가 주도한 글로벌 단속작전 ‘TENTACLE 프로젝트’는 TBML의 심각성을 여실히 보여줬다. 39개국이 참여한 이 작전으로 2억6700만 달러(약 3600억원)의 불법 자산이 압수됐고 267명이 체포됐다. 특히 8412만 달러의 미신고 현금과 8540만 달러 규모의 허위 신고 송장물품이 적발됐다.
이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TBML이 마약거래, 테러자금 조달, 조직범죄와 직결된 글로벌 위협임을 증명하는 결과다. 영국은 이미 2022년 ‘TBML 전담팀’을 신설하고 4대 핵심 분야(역량 개발, 기관 협력, 데이터 분석, 실무 단속)에 집중하고 있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관세청은 올해 ‘무역악용 자본시장 교란 대응 전담 조직(TF)’을 구성하고 수출입가격 조작 등 불법행위 대응에 나섰다.
A사는 친환경 전지 부품을 3년간 홍콩으로 6회 반복 수출입하면서 가격을 고가로 조작하여 70억원의 허위 매출을 위장했다. 수출한 물품을 지인 명의 위장업체를 통해 다시 수입하는 ‘뺑뺑이 무역’으로 코스닥 기술특례상장을 시도하고 국가보조금 10억원과 무역금융대출 11억원을 편취했다. 이러한 수법은 기업의 실제 경쟁력과 무관하게 상장 요건을 충족시키는 우회 방법으로 악용되고 있다.
B사는 홍콩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한 후 저가 의류를 고가로 수출하고 다시 고가로 수입하는 회전거래를 63회 반복해 1024억원의 허위 매출을 창조했다. 이를 바탕으로 코스닥 상장을 시도하며 6000여 명의 개인투자자로부터 554억원의 투자를 유인했다.
기업이 직면한 현실적 위험과 처벌
TBML은 더 이상 범죄조직만의 문제가 아니다. 선량한 기업도 의도치 않게 연루될 수 있는 구조적 위험이 존재한다. 복잡한 글로벌 공급망, 제3국 경유 거래, 페이퍼컴퍼니를 통한 우회거래 등이 일상화된 무역 환경에서 기업은 언제든 TBML의 도구로 악용될 수 있다.
적발 시 처벌은 가혹하다. 범죄수익은닉의 규제 및 처벌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5년 이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 벌금이 부과된다. 관세법상 가격 조작죄로는 형사처벌과 함께 범죄수익 전액 추징이 가능하다. 외국환거래법 위반 시에는 위반금액의 2~4% 과태료가 부과되며 20억원 초과 시 수사기관에 통보된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기업 신뢰도 타격이다. TBML 연루 의혹만으로도 금융기관 거래 제한, 무역금융 중단, 해외 파트너와의 관계 악화 등 돌이킬 수 없는 피해가 발생한다. 최근 ESG 경영이 강조되는 상황에서 컴플라이언스 위반은 기업가치에 치명적 타격을 가한다. 실제로 글로벌 기업들은 거래 파트너의 TBML 위험 여부를 사전 심사하는 추세다.
CEO의 전략적 대응 체계
TBML 위험에 대응하기 위해 CEO는 다음과 같은 체계적 접근이 필요하다.
1단계: 전담 조직과 책임자 지정
TBML 대응을 총괄하는 전담 책임자를 임명하고 영업-외환-준법감시부서를 아우르는 ‘3중 방어선’ 체계를 구축한다. 의심거래에 대한 즉각적인 보고와 주기적 예방교육을 실시한다.
2단계: 강화된 거래상대방 실사
단순한 고객 알기(KYC: Know Your Customer)를 넘어 거래상대방의 실질소유자, 사업 분야, 소재지 위험도를 철저히 확인하고 유엔 제재리스트 연계 여부를 반드시 점검한다. 또한 무역 서류의 진위 여부와 가격 정상성 등을 점검한다.
3단계: AI 기반 실시간 모니터링
AI와 빅데이터를 활용한 자금세탁방지(AML: Anti-Money Laundering) 소프트웨어를 활용하여 거래패턴을 실시간 분석한다. 가격 이상, 수량 불일치, 비정상 물류경로, 제3국 우회거래 등 위험 징후를 자동 탐지하는 시스템을 구축한다.
위험 신호(Red flag)를 놓치지 마라
CEO가 반드시 주의해야 할 위험 신호들이 있다. 거래상대방이 신설기업임에도 과도한 고액거래를 제안하거나 회사 프로필이 거래 상품과 맞지 않는 경우를 의심해야 한다. 고위험 관할권에 소재한 회사나 제재리스트 연계 기업과의 거래도 경계 대상이다.
거래 조건에서는 상업송장 가격이 시장가격과 크게 다르거나 물품의 품명·품질·수량이 수출입자의 통상적 영업활동과 불일치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대금결제에서는 거액 현금거래 요구, 의무보고 기준 이하 소액의 반복 이체, 자금 예치 후 신속한 역외 이체 등을 주의해야 한다.
국제 공조 시대, 선제 대응이 생존전략
TBML은 국경을 넘나드는 범죄이기에 국제 공조가 핵심이다. WCO를 통한 국가 간 정보 공유, 에그몽(Egmont Group)그룹의 금융정보분석원(FIU) 네트워크, 국제자금세탁방지기구(FATF : Financial Action Task Force) 등이 상호 연계되고 있다.
기업 입장에서는 이러한 다층적 감시망에서 의도치 않은 연루를 피하기 위해 더욱 철저한 예방이 필요하다. 에그몽그룹이 제공하는 최신 ‘무역기반 및 제3자 자금세탁(Trade-Based & Third-Party Money Laundering)의 사례와 위험지표’를 적극 활용하여 주기적 자율점검을 성실히 수행하면 TBML 위험을 최소화할 수 있다.
AI와 빅데이터 기술의 발전으로 TBML 탐지 능력이 급격히 향상되고 있다. 과거에는 발견하기 어려웠던 복잡한 거래패턴도 이제는 실시간으로 분석이 가능해졌다. 무역기반 자금세탁은 복잡하고 은밀한 위협이지만 CEO의 확고한 의지와 체계적인 예방시스템으로 충분히 대응할 수 있다. 글로벌 무역 환경이 더욱 복잡해지는 지금, 선제적 리스크 관리야말로 기업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담보하는 핵심 경쟁력이다.
이석문 관세무역전략연구원 원장(전 서울세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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