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한국 광고 시장은 사정이 다릅니다. 제일기획, 이노션 같은 국내 대형 광고 대행사들은 여전히 매년 사상 최대 실적을 다시 쓰면서 안정적인 성장을 이어가고 있거든요. 굳이 위험을 감수하며 AI 전환을 서두를 이유가 크지 않다는 얘기죠. 일부 기업이 AI로 광고를 만들긴 했지만 업계 전체로 보면 대대적인 변화는 더딘 편입니다.
그런데 이 평온한 국내 시장에서 정반대로 움직인 곳이 있습니다. LG그룹의 광고대행사 HSAD입니다. HSAD는 얼마 전에 ‘브랜드 맞춤형 에이전트’란 AI 플랫폼을 공개했어요. 소비자와 AI가 채팅으로 대화하며 구매 의도를 파악하는 ‘인텐트릭스’, 데이터와 알고리즘으로 마케팅 전략을 설계하는 ‘마켓 인텔리전스26’, 검색과 추천에서 더 노출이 되도록 광고 이미지와 카피를 자동 제작하는 ‘AIEO 스튜디오’가 핵심입니다. 한마디로 광고 대행사가 기존에 하는 일을 소프트웨어 하나에 다 담아낸 겁니다. 이 서비스가 잘 되면 전통적인 광고 일감은 더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광고주가 굳이 대행사를 통하지 않고 스스로 광고를 기획하고 집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얼핏 보면 스스로 밥그릇을 깨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HSAD는 왜 이런 모험을 택했을까요.
HSAD는 LG 계열 광고 대행사입니다. 매출의 70~80%가 LG그룹 계열사 물량에서 나옵니다. 제일기획이 삼성, 이노션이 현대차 광고를 주로 맡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죠. 문제는 해외 물량입니다. 이 부분에서 HSAD는 구조적 약점을 안고 있어요.
제일기획과 이노션은 해외에서 벌어들이는 돈이 압도적이에요. 2024년 기준 제일기획의 해외 매출 비중은 78% 수준이고, 이노션도 70%를 웃돕니다. 스마트폰, 자동차처럼 세계 곳곳에서 마케팅을 해야 하는 제품이 있으니 자연스러운 결과죠. 해외에서 성장 여력을 키울 수 있는 발판이 이미 갖춰져 있는 겁니다. HSAD는 달라요. LG 계열에는 꾸준히 글로벌 대형 캠페인을 공급할 소비재 브랜드가 많지 않습니다. LG전자를 볼까요. 한때 휴대폰 광고로 세계 곳곳에서 HSAD의 일감을 만들어줬지만 이 사업은 2021년에 공식 종료됐습니다. 지금 남은 주력은 가전인데 이 분야도 예전 같지 않죠. 최근 발표된 실적을 보면 올 2분기에 TV가 포함된 HE 사업부의 영업적자가 1900억원을 넘겼어요. 이 탓에 당초 8000억원을 넘길 것으로 기대됐던 LG전자의 2분기 전체 영업이익은 6000억원대 수준이었어요. ‘어닝 쇼크’를 기록한 겁니다. TV 사업부에선 희망퇴직을 받을 만큼 조직의 긴장감이 높아졌습니다. 가장 돈을 많이 벌어주는 백색가전, HS 사업부의 성장세도 둔화됐어요. 미국의 관세 부과 폭탄을 고스란히 맞고 있어서 그럽니다. 여기에 중국 가전 업체가 가격 경쟁력을 내세워 시장 장악력을 높여 가면서 더 압박을 받고 있어요. 사정이 이러니 과거처럼 대규모 해외 광고를 발주할 이유가 줄어드는 것이죠.
LG생활건강도 과거의 성장세를 잃었습니다. ‘후’ 같은 화장품 브랜드로 한때 K뷰티의 상징처럼 세계 시장을 흔들었지만 최근엔 중국 소비 둔화와 트렌드 변화로 직격탄을 맞았습니다. 올 2분기 LG생활건강의 영업이익이 전년 동기 대비 65%나 감소했는데요. 뷰티, 즉 화장품 사업부가 적자를 기록한 영향이 컸습니다. 한때 HSAD의 든든한 광고 원천이던 LG그룹의 소비재 부문이 크게 흔들리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은 계열사 광고 물량만으론 더 이상 성장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죠.
이런 현실은 HSAD에 단순히 내부 거래를 관리하는 광고사가 아니라 새로운 매출원을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는 절박함으로 다가왔습니다. 해외 캠페인에서 성장 기회를 얻기 힘든 만큼 계열사에 의존하지 않고 바깥 고객을 뚫어야만 미래가 있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죠. 그래서 나온 게 브랜드 맞춤형 에이전트입니다. 광고 계약을 맺기 어려웠던 중소·신생 브랜드, LG 계열사와 사업이 겹쳐서 HSAD에 일감을 잘 주지 않았던 다른 대기업 계열사까지 직접 공략하려는 겁니다. 기존 대행 업무와 일부 충돌할 수 있다는 점을 알면서도 과감히 스스로의 시장을 깎아먹는 전략을 택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3년 뒤 광고 대행사 사라질 수도”
HSAD가 AI에 진심이 또 다른 이유는 WPP와 얽혀 있는 운명 때문입니다.
HSAD는 LG그룹 광고사지만 태생적으로 WPP와 인연이 깊어요. WPP는 영국에 본사를 둔 세계 최대 광고대행사입니다. 과거 LG애드 시절부터 WPP가 전략적 제휴 파트너이자 주요 주주로 참여해왔어요.
그런데 이 세계 1위 광고 왕국이 최근 크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지난 7월 WPP의 마크 리드 최고경영자(CEO)가 돌연 연말 은퇴를 발표했는데요. AI가 광고 산업의 질서를 완전히 바꿔놓으면서 WPP가 패러다임 전환에 뒤처졌다는 평가를 들은 게 결정적이었습니다. 이 회사는 AI 전환을 위한 대규모 투자를 했지만 속도와 실효성 면에서 경쟁사인 프랑스 퍼블리시스에 밀렸고 코카콜라, 스타벅스, 화이자 같은 굵직한 글로벌 고객을 잇따라 빼앗겼습니다. 올 들어 주가는 9월 말 기준 56%나 떨어졌어요. 결국 CEO 교체라는 충격 처방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죠.
문제는 이게 단순히 WPP 한 회사의 위기만은 아니라는 겁니다. 광고의 주도권이 완전히 바뀌고 있다는 신호이기도 해요. 구글, 메타 같은 빅테크가 자체 AI 광고 플랫폼을 앞세워 기획·제작·집행·성과 측정까지 한 번에 끝내는 시대가 왔습니다. 광고주는 몇 가지 아이디어와 예산만 입력하면 수십 가지 버전의 광고가 자동으로 만들어지고 AI가 실시간으로 반응을 분석해 최적의 광고를 내보내죠.
이런 흐름은 HSAD 같은 광고 대행사에 곧바로 압박으로 다가옵니다. 버팀목이던 WPP가 무너지고 빅테크는 대행사의 일감을 잠식하는 상황이기 때문이죠. WPP는 HSAD의 전략적 파트너로 글로벌 노하우를 공급하는 창구 역할을 해왔습니다. 그런데 그 파트너가 흔들리니 HSAD 입장에선 위기감이 클 수밖에 없어요.
WPP의 사례는 또 다른 교훈을 줍니다.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시장이 먼저 당신을 바꾼다는 겁니다. WPP는 AI의 필요성을 일찍부터 알았지만 전통적인 ‘크리에이티브 헤리티지’에 대한 자부심 때문에 기술 수용 속도를 늦췄고 결국 퍼블리시스 같은 기민한 경쟁사에 1위 자리를 내줬습니다. HSAD는 이 변화를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목격했죠. 제휴사의 느린 대응과 그로 인한 추락은 경고장이 됐습니다.
2016년 AI 알파고가 이세돌 9단을 꺾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지만 바둑을 잘 몰랐던 저 같은 사람은 아무런 타격감이 없기도 했습니다. 별것 아닌 일에 너무 호들갑 떠는 것 아닌가 하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10년이 흐른 지금 이 사건은 광고를 비롯한 거의 모든 산업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왔죠. 특히 광고처럼 창조적인 업무를 해야 하는 직종에서 가장 먼저, 가장 크게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HSAD가 AI로 회사를 통째로 재설계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박애리 HSAD 대표는 “AI가 가져온 1년의 변화가 과거 10년치에 해당한다”며 “빠르면 3년, 늦어도 10년 뒤엔 광고 대행사가 사라질 수 있다”고 단언했습니다. 그는 단순히 두려움을 말한 게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선택의 속도를 강조했어요. 모든 산업에서 AI로 즉각적인 성과를 측정하고 그에 맞춰 전략을 자동으로 바꾸는 게 가능해진다면 광고뿐 아니라 모든 산업, 직종, 일의 정의도 바뀔수 있습니다. 다음은 어떤 산업이 AI의 타깃이 될까요.
안재광 한국경제 기자 jkahn@hanky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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