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보다 앞서 10월 28일부터 시작하는 경제 분야 최대 무대인 APEC CEO 서밋이 행사의 전초전 역할을 맡는다. 2005년 부산 회의 이후 20년 만에 한국이 APEC 의장국을 맡은 만큼 이번 행사는 한국이 글로벌 외교·경제 무대에서 위상을 높일 기회로 평가된다.
세계 21개국의 경제 지도자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가운데 국내에서는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정의선 현대자동차 회장 등 재계 수장들이 총출동한다.
해외에서는 젠슨 황 엔비디아 CEO, 샘 올트먼 오픈AI CEO, 순다르 피차이 구글 CEO, 팀 쿡 애플 CEO, 마크 저커버그 메타 CEO, 손정의 일본 소프트뱅크 회장 등이 유력한 참석자로 거론되고 있다.
이들은 이미 지난 8월 미국 워싱턴DC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 비즈니스 라운드테이블에서 만난 바 있다. 이번 CEO 서밋은 단순한 기술 전시를 넘어 글로벌 산업 재편 흐름 속에서 한국 산업의 미래를 재정립하는 전략 외교의 장이 될 거라는 평가가 많다.
APEC CEO 서밋의 의장인 최태원 회장은 “APEC 정상회의가 한국 민주주의 회복의 상징이라면 CEO 서밋은 한국 경제의 저력을 보여줄 대형 쇼케이스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국 기업과 산업이 APEC이라는 글로벌 플랫폼을 통해 어떤 협력과 연대를 끌어낼지 전 세계의 시선이 경주로 집중되고 있다.
정상회의 선언문에 반영될 민간의 목소리
한국이 APEC 의장국이 된 의미는 단순히 행사를 주도하는 것을 넘어 글로벌 의제 설정자로 자리매김하는 데 있다.
특히 이번 CEO 서밋은 미래 산업 의제를 민간 차원에서 주도적으로 논의할 무대가 된다. AI·반도체·디지털전환·에너지전환 등 주요 혁신 분야는 이번 서밋에서 핵심 어젠다로 다뤄질 예정이다.
기업인들이 제시한 제안들은 APEC 기업인 자문위원회(ABAC)를 거쳐 정상회의 선언문에 반영될 가능성이 있다. 이는 단순한 의견 개진이 아니라 민간이 정상회의의 경제 의제에 직접 참여하는 구조를 의미한다.
ABAC 의장을 맡은 조현상 HS효성 부회장과 바이오헬스워킹그룹(BHWG) 의장인 이규호 코오롱 부회장도 정책 제안문 작성 작업을 주도하고 있다. 이들이 준비한 제안문은 정상회의의 결과물인 이른바 ‘경주 선언’(가칭)을 도출하는 핵심 자료가 될 전망이다.
정상급 외빈과 글로벌 CEO 등 총 1700여 명 규모의 참가가 예상되면서 한국의 국제 신뢰도와 경제 외교력도 상승할 기회라는 분석이다. 경주와 부산을 비롯한 지역은 숙박·소비·관광 중심지로 부상하며 수천억원대의 경제 효과와 고용 창출이 기대된다. 기업들은 이번 행사를 통해 글로벌 네트워크 확대, 기술 협력, 해외 시장 진출 기회를 동시에 타진하고 있다.
가장 관심이 쏠리는 분야는 AI와 반도체다. 산업 구조가 급격하게 변하는 가운데 한국은 AI 반도체 공급망의 한 축으로 부상하기를 노린다. 젠슨 황 CEO의 단독 세션은 엔비디아가 한국 기업들과의 협력 전략을 발표할 무대가 될 가능성이 높다.
이재용 회장, 최태원 회장과의 별도 회담을 통해 AI 생태계 구축 방안이 논의될 수 있다는 관측이 많다. 업계에선 HBM4, 고성능 GPU, AI 데이터센터 인프라 등을 중심으로 SK하이닉스·삼성전자와의 기술 협업 모델이 제시될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점친다.
SK그룹은 CEO 서밋의 공식 부대행사인 ‘퓨처테크포럼 AI’를 주관하며 반도체-인프라-플랫폼으로 연결된 SK그룹 AI 생태계 전략을 공개할 계획이다.
AI만이 아니다. 방산, 조선, 유통 등 한국의 전통 주력 산업들도 이번 APEC을 기점으로 글로벌 무대로의 도약을 노린다. 한화그룹은 ‘방산 퓨처테크포럼’을 개최하며 한화에어로스페이스·한화시스템·한화오션 등 계열사를 중심으로 K방산 경쟁력을 소개한다. HD현대는 조선 분야 포럼을 통해 AI 기반 스마트 조선소와 탄소중립 전략을 발표한다.
정기선 HD현대 회장은 APEC CEO 서밋의 포럼 기조연설자로 글로벌 무대에 공식 데뷔한다. 조석 HD현대일렉트릭 부회장은 CEO 서밋 세션에서 ‘지속가능한 미래’를 주제로 기조연설에 나선다.
스타트업과 유통 기업도 행사 무대에 선다. 오경석 두나무 대표는 가상자산 관련 퓨처테크포럼에서 연사로 나서며 김상현 롯데쇼핑 부회장도 유통 분야 디지털 전략을 소개할 예정이다. 특히 두나무는 블록체인 기술과 가상자산이 실제 산업에 적용되는 방향에 대해 글로벌 VC·CVC들과의 연계 기회를 노리고 있다.
APEC 정상회의와 CEO 서밋을 앞두고 국내 대기업들의 홍보 마케팅 경쟁도 뜨겁다. LG그룹은 경주 시내버스 70대에 ‘APEC 경주’ 래핑 광고를 전개하며 서울 주요 지역과 해외 대형 전광판에서도 APEC 공식 홍보영상을 송출한다. 또한 글로벌장애청소년IT챌린지 개최, 생수 지원, 통신망 구축 등 계열사 역량을 동원한 다양한 지원 활동도 펼치고 있다.
한화그룹은 다이아몬드 스폰서로서 주요 세션과 부대행사를 후원하고 갈라 만찬에서 불꽃쇼와 드론쇼를 선보이며 행사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방산·우주·에너지 등 주요 계열사는 혁신 기술과 사업 현황을 집중 홍보해 ‘글로벌 방산 강국’ 이미지를 부각할 예정이다.
현대차그룹은 정상 의전 차량으로 G90 113대, G80 74대, 유니버스 수소전기버스 3대 등 총 192대를 제공해 행사 운영을 지원한다. 주요국 정상과 각료, 기업 CEO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외교 무대에서 글로벌 경쟁력을 가진 차량을 선보여 브랜드 이미지를 강화한다는 계획이다.
경주에서 열리는 APEC 정상회의 최대 외교 이벤트로 기대됐던 미·중 정상회담은 아직 공식적으로 확정되진 않았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당초 “경주에 간다”고 밝혔지만 중국과의 무역 갈등이 재점화되면서 회담 성사 여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트럼프 대통령은 10월 27~29일 일본 방문 후 29일 한국을 찾을 예정으로 체류 기간은 당일치기 또는 1박 2일이 유력하다. 한국 정부는 조선소 방문과 한·미 정상회담 등을 고려해 1박 2일 일정을 제안했지만 미·중 회담이 불발될 경우 일정이 축소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도 공식적인 발표는 하지 않았지만, 방한 가능성이 높다. 트럼프 대통령과 시진핑 국가주석은 APEC 정상회의 기간 회동해 ‘관세 담판’을 맺을 것으로 예상된다.
기업 외교의 중요성도 더욱 부각되고 있다. 대한상의는 이번 CEO 서밋이 약 7조4000억원 규모의 경제 효과를 창출할 것으로 내다봤다.
최태원 회장은 “이번 APEC CEO 서밋을 단순한 외교 이벤트가 아닌 실질적인 비즈니스 성과의 장으로 만들겠다”며 “한국 기업들이 글로벌 산업의 중심에서 협력과 혁신을 주도하는 모습을 전 세계에 보여줄 기회”라고 했다.
재계 관계자는 “이번 행사는 한국이 글로벌 경제 질서에서 ‘룰 세터’로 도약하는 신호탄이 될 것”이라며 “민간과 정부가 협력해 산업 의제를 선도하고 혁신 생태계를 구축하는 데 의미가 크다”고 평가했다.
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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