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 포커스]
삼성전자 서초사옥. 사진=임형택 한국경제신문 기자
삼성전자 서초사옥. 사진=임형택 한국경제신문 기자
재계의 인사 시계가 예년보다 한 달 이상 빨라졌다. 고금리·고물가·고환율의 ‘3고(高)’ 복합 위기와 미·중 무역 갈등, 미국발 관세 압박, AI 기술 전환까지 겹치면서 대기업들은 ‘선제 대응’을 택했다.

과거 ‘성과평가’, 이제는 ‘미래 전략 예고편’

연말 인사가 한 해 결산이었다면 이제는 내년 사업 구조와 신성장 포트폴리오의 예고편이다. SK·한화 등이 인사 시계를 앞당긴 것도 단순한 속도 경쟁이 아니다. AI 전환과 글로벌 불확실성 속에서 리스크를 선제적으로 관리하고 투자 여력을 확보하기 위한 판단이다.

AI 확산으로 인한 고용 구조 변화, 미·중 갈등과 미국발 관세 압박, 3고 국면이 겹치면서 인사 전략의 무게추가 ‘승진 중심’에서 ‘재배치·선택과 집중’으로 이동했다. 신사업 인력은 늘리되 중복 기능과 비핵심 조직은 과감히 줄이는 식이다.

삼성은 향후 5년간 6만 명을 신규 채용해 AI·반도체·바이오 등 미래 성장 사업에 집중 투입하기로 했다. LG전자는 임원 200명을 대상으로 AI·소프트웨어 역량 강화 교육을 진행했다. SK는 사내 플랫폼 ‘마이써니(MySUNI)’를 통해 1만 명 이상이 AI 과정을 이수했으며 CEO와 임원을 대상으로 ‘AI 리더십 프로그램’을 신설해 AI를 조직 문화와 리더십 중심축으로 자리 잡게 했다.

재계 관계자는 “올해 인사는 단순한 자리 이동이 아니다. 급변하는 시장 환경과 글로벌 리스크 속에서 먼저 체질을 바꾸고 신사업과 기술 중심 인력을 배치하는지가 기업 경쟁력을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2026년 대기업 인사 키워드. 그래픽=송영 기자
2026년 대기업 인사 키워드. 그래픽=송영 기자
삼성 ‘뉴삼성’으로 속도전 돌입

삼성은 이르면 11월 중순 사장단 인사를 단행할 전망이다. 이재용 회장이 사법 리스크를 털고 경영 전면에 복귀한 뒤 처음 맞는 공식 인사라는 점에서 이번 인사는 ‘뉴삼성’ 경영체제 출발점으로 평가된다.

핵심 포인트는 직무대행 체제 마무리, 이 회장의 등기이사 복귀, 그룹 컨트롤타워 복원이다. 노태문 DX부문장 직무대행 사장의 부회장 승진과 최원준 MX사업부 COO의 사장 승진 가능성이 거론된다.

인사 폭은 크지 않지만 삼성 내부 의사결정 구조 재정비의 첫 단계가 될 전망이다. 9월부터 VD사업부 부장급 이상 인력 재편과 TV 칩 엔지니어 일부 전환배치, 경영진단 착수도 진행됐다.
연말은 늦다…대기업, 조기 인사로 미래전략 속도전 돌입
SK, 리밸런싱 인사…실행력으로 무게 이동

SK그룹은 10월 말 예년보다 한 달 앞서 사장단 인사를 단행했다. 핵심은 리밸런싱과 AI 전환이다. 유영상 SK텔레콤 사장이 물러나고 판사 출신 정재헌 최고거버넌스책임자(CGO)가 새 대표로 선임됐다.

이형희 SK수펙스추구협의회 위원장은 부회장으로 승진하며 4년 만에 부회장직이 부활했다. SK이노베이션은 내년 3월 정기 주주총회에서 장용호 SK이노베이션 총괄사장을 대표이사로 선임하고 추형욱 대표이사와 각자 대표 체계를 구축할 방침이다. SK온은 이용욱 신임 사장을 발탁해 투톱 체제를 구축했다.

이번 인사는 유심 해킹 사태, AI 전환, 탄소중립 등 현안 대응을 위한 ‘위기 리셋 인사’로 평가된다. 하반기 SK브로드밴드와 AI 전문 사내회사 SK AI CIC에서 희망퇴직을 단행하며 단순 비용 절감이 아닌 AI·배터리·에너지 솔루션 중심 조직 재편이 병행됐다.
연말은 늦다…대기업, 조기 인사로 미래전략 속도전 돌입
한화, 김동관 시대 본격 가동

한화는 올해 가장 선명한 세대교체를 보여줬다. 김승연 회장이 지주사 격인 (주)한화의 지분 22% 중 절반인 11%를 세 아들에게 증여하면서 경영권 승계가 사실상 마무리됐다. 중심에는 김동관 부회장이 있으며 방산·우주·에너지 등 핵심 사업을 직접 챙기며 실질적 총수로 자리매김했다.

(주)한화 건설부문, 한화임팩트, 한화세미텍 대표를 연이어 교체하며 조직 재편 속도도 높였다. 미국 방산 네트워크 확장과 한화디펜스USA 설립, 미국 조선 협력 프로젝트 ‘마스가(MASGA)’ 참여 등 글로벌 행보를 강화하고 있다.
연말은 늦다…대기업, 조기 인사로 미래전략 속도전 돌입
HD현대, 37년 만의 오너 경영 복귀

HD현대는 37년 만에 전문경영인 체제를 끝내고 정기선 회장이 오너 경영 전면에 섰다. 이는 단순한 세대교체가 아니라 조선·기계·에너지 통합을 향한 전초전으로 해석된다.

이상균 HD현대중공업 사장과 조영철 HD현대사이트솔루션 사장이 부회장으로 승진했으며 조 부회장은 정 회장과 공동대표로 HD현대를 이끈다. 금석호 HD현대중공업 부사장은 사장으로, 김형관 HD현대미포 사장은 HD한국조선해양 공동대표로 이동했다.

40대 초반 정 회장은 기술 중심 책임형 리더십을 앞세워 조선·기계·에너지 통합과 디지털전환을 직접 지휘한다. 이번 인사는 오너 복귀와 세대교체, 기술형 리더십이 결합된 상징적 사례로 평가된다.
연말은 늦다…대기업, 조기 인사로 미래전략 속도전 돌입
현대차·LG·롯데, 신성장 축 강화

현대차그룹도 올해 인사를 예년보다 한 달가량 앞당겨 11월 중순 단행할 가능성이 높다. 지난해 트럼프 2기 대응 전략을 이유로 조기 인사를 진행한 전례가 있으며 올해는 미국 관세 영향으로 수조 원대 손실 가능성이 현실화하는 상황이다. SDV, 로봇, AAM 등 신사업 부진과 글로벌 시장 불확실성이 이번 인사의 핵심 변수로 작용할 전망이다.

LG그룹은 인사 결과를 발표하지 않았지만 내부에서는 조주완 LG전자 사장과 정철동 LG디스플레이 사장의 부회장 승진 가능성이 거론된다. OLED·전장·2차전지 등 미래 기술 중심 조직 개편이 예고되며 문혁수 LG이노텍 대표와 로레알 출신 이선주 LG생활건강 사장 등 40~50대 젊은 임원이 전면에 부상했다.

일부 계열사는 하반기 희망퇴직을 통해 사업 효율화와 조직 슬림화를 진행했다. 구광모 회장은 지난 9월 사장단 회의에서 “구조적 경쟁력 강화가 시급하다”며 기술형 리더십 중심 인사를 예고했다.

롯데그룹은 유통·화학 중심의 비효율 조직을 줄이고 바이오 등 신성장 축 중심의 세대교체를 추진할 것으로 보인다. 경영진 일부 교체와 조직 슬림화를 병행하며 신사업과 글로벌 사업 속도를 높이는 전략이다.

임원 세대교체와 AI 중심 인력 배치

국내 100대 기업 임원 현황에서도 같은 흐름이 확인된다. 글로벌 헤드헌팅 전문기업 유니코써치에 따르면 올해 임원 수는 지난해 7404명에서 7306명으로 줄었고 1960년대생 임원은 감소한 반면 1970~80년대 출생 임원은 증가했다.

특히 AI·신사업 관련 임원 전진 배치가 눈에 띄며 향후 조기 인사와 조직 슬림화를 통해 미래 경쟁력 확보를 위한 세대교체가 본격화될 전망이다. 김혜양 유니코써치 대표는 “내년에는 AI 트렌드에 맞춰 빠르게 변화하고 적응할 수 있는 젊은 인재들을 경영 전면에 배치하고 CEO도 내부 출신에만 국한하지 않고 경영 능력이 검증된 외부 인재를 적극 등용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국내 30대 그룹의 CEO 임기 만료자는 내년 상반기까지 약 600명, 이 중 절반가량이 조기 교체 대상이다. AI·전장·바이오 등 미래 성장 분야에서 성과가 부진하거나 전략적 필요성이 높은 부문을 중심으로 조기 교체가 대규모로 일어날 수 있다는 신호라는 해석이다.

업계 관계자는 “이번 인사는 AI·신사업 중심 인재 배치와 조직 효율화를 실험하는 기회”라며 “향후 1~2년 내 실질적 성과로 이어질지가 관전 포인트”라고 말했다.



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