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엔비디아 심장?" 젠슨 황, GPU 26만 장 풀고 간 진짜 이유
“한국은 엔비디아의 심장이었다.”
한국 PC방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엔비디아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 젠슨 황 CEO가 지난 10월 말 15년 만에 방한해 GPU 26만 장을 풀고 갔다.

엔비디아는 15조원(개당 3만~4만 달러)어치 반도체를 판매하는 것인데 한국은 돈을 내면서도 ‘고맙다’는 입장이다. 웃돈을 줘도 구하기 어려울 만큼 국가나 기업의 전략자산이 된 엔비디아 GPU를 확보했고 AI 사용국에서 AI 제조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엔비디아가 공급하는 삼성전자, SK그룹, 현대차그룹 등과의 협업을 위해 쓰일 예정이다. 이들은 이번에 확보한 GPU로 반도체와 자동차·로봇·자율주행 설계와 제조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AI에 접목하는 ‘AI 팩토리’를 구축한다는 계획이다. AI 팩토리에는 각 사가 5만 장씩 구매한 엔비디아 GPU와 엔비디아의 디지털트윈 플랫폼을 적용한다.

한국 반도체 기업과 고대역폭메모리(HBM) 파트너십을 오랫동안 이어가겠다는 말도 했다. 젠슨 황은 경주에서 열린 APEC에 참석해 기자들에게 “삼성, SK와 함께 HBM4를 넘어 HBM97까지 함께 개발할 것”이라고 했다.

이번 AI 동맹을 계기로 한국이 AI 시대에도 제조업 주도권을 이어갈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대만에는 AI 슈퍼컴퓨터를 구축한 신사옥을, 독일에는 AI 산업 단지를 조성하며 세계 곳곳에 ‘AI 제국’을 세우는 젠슨 황이 한국과는 ‘AI 동맹’을 맺은 이유가 무엇일까.
"한국이 엔비디아 심장?" 젠슨 황, GPU 26만 장 풀고 간 진짜 이유
1. 파산 직전 청년에게 편지 보낸 이건희
“게임으로 세상 바꾸자”
1993년 이건희 삼성 선대회장이 일본 오사카에서 ‘신경영 간담회’를 주재하고 있다. 한국경제
1993년 이건희 삼성 선대회장이 일본 오사카에서 ‘신경영 간담회’를 주재하고 있다. 한국경제
젠슨 황은 방한 내내 엔비디아와 한국의 인연을 강조했다. 그는 지난 10월 30일 엔비디아의 첫 번째 GPU인 ‘지포스’ 한국 출시 25주년 행사를 찾았다. 이날 무대에 올라 젠슨 황이 강조한 단어는 AI가 아니라 ‘게임’이었고 한국의 IT 역사와 함께 성장한 엔비디아의 스토리를 진정성 있게 풀었다.

“1996년 내 인생 처음으로 한국에서 편지를 받았다. 아름답게 쓰인, 모르는 사람의 편지였다.” 젠슨 황은 약 500명의 청중 앞에서 한국에서 온 편지로 운을 뗐다. 젠슨 황 옆엔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이 나란히 섰다.

젠슨 황은 그 편지가 자신을 한국으로 이끌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편지에는 세 가지 비전이 있었다. 한국을 초고속인터넷으로 연결하고, 비디오 게임으로 세상을 바꾸고, 게임 올림픽을 열고 싶다는 내용이 담겼다”고 말했다. 이에 이 회장은 “제 아버지가 보낸 편지다”라고 거들었다.

이건희 삼성 선대회장이 보낸 편지였다. 1996년 엔비디아는 파산 직전이었다. 젠슨 황은 매일 아침 회의를 시작하며 “우리 회사는 폐업까지 30일 남았다”고 말했다. 1995년 출시한 첫 번째 그래픽카드(NV1) 판매 부진이 원인이었다. 그는 기존 아키텍처를 과감히 버리고 오직 ‘압도적인 3D 그래픽 성능’ 하나에 명운을 걸었다.
젠슨 황 엔비디아 CEO와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30일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엔비디아의 그래픽카드(GPU) '지포스' 출시 25주년 행사에 참석했다. 연합뉴스
젠슨 황 엔비디아 CEO와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30일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엔비디아의 그래픽카드(GPU) '지포스' 출시 25주년 행사에 참석했다. 연합뉴스
당시 엔비디아는 100명이 넘던 일반직 직원을 35명의 핵심 엔지니어로 줄이고 마지막 남은 자금으로 하드웨어 애뮬레이터라는 장치를 샀다. 프로토타입(시제품) 제작을 건너뛰고 가상 시뮬레이션 테스트만 거친 후 바로 생산에 들어가는 위험한 시도를 감행한 것이다. 단 하나라도 오류가 나면 생산은 고사하고 회사가 망하는 위험천만한 결정이었다.

시장에서 외면받았던 30대 무명 CEO에게 이건희 회장이 한국에 초고속인터넷을 연결하고 싶다며 편지를 보낸 것이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통찰력과 혜안이다. 엔비디아가 1999년 지포스를 출시하기 전 GPU라는 단어조차 없던 시절이었다. 그때 젠슨 황과 이 회장은 그래픽카드의 범용 처리 가능성을 읽어내고 가속 컴퓨팅 시대를 예견했다.

1998년 미국 블리자드엔터테인먼트가 전 세계에 스타크래프트를 출시하면서 게임용 그래픽카드 수요는 폭증했고 한국은 PC방을 기반으로 고사양 컴퓨터가 대량 보급되면서 엔비디아 그래픽카드의 주요 고객이 됐다.

젠슨 황은 이번 방문을 통해 “젊었을 때 지포스를 소개하려 한국에 왔고 한국과 함께 발전했다”며 “한국이 e스포츠를 만들었고 엔비디아 지포스를 발전하게 했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 국민들이 e스포츠를 성장시켰고 그와 함께 지포스도 성장했다”며 “오늘 엔비디아가 세계에서 가장 큰 회사로 성장해서 한국에 돌아왔다”며 엔비디아의 성장에 한국이 어떤 기여를 했는지 설명했다.
2. 가격 협상력 세지는 SK하이닉스·삼성전자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3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SK AI 서밋'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그는 AI 병목 현상이 연산 기능을 따라잡지 못하는 메모리 공급 부족에 있다고 봤다. 한국경제 이솔 기자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3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SK AI 서밋'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그는 AI 병목 현상이 연산 기능을 따라잡지 못하는 메모리 공급 부족에 있다고 봤다. 한국경제 이솔 기자
마케터로서의 젠슨 황이 한국과의 서사를 풀어내며 국민의 감성을 자극했다면 사업가로서의 젠슨 황은 한국 기업들과의 전략적 ‘공생’을 택했다. AI 반도체의 핵심은 GPU지만 그 성능을 극대화하려면 초고속·대용량 메모리가 필수다.

올해 초까지만 해도 한국 반도체 기업 주가는 엔비디아 젠슨 황 CEO의 한마디에 일희일비했다. 젠슨 황의 입에 오르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주가가 급락하기도 했고 젠슨 황이 한국 반도체 기업 웨이퍼에 사인만 해도 주가에 영향을 줬다. 시장에서는 오픈AI 등 소프트웨어 기업과 엔비디아 등 시스템반도체 기업이 AI 시대 단독 주연으로 떠오르고 메모리 기업이 하청 업체로 전락한 것 아니냐는 우려가 커졌다.

하지만 HBM 수요가 폭증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올해 빅테크가 데이터센터에 투자하겠다고 한 규모만 6000억 달러(약 840조원)에 달한다. 통상 엔비디아 GPU 한 장에 HBM 8개가 탑재되는데 데이터센터 투자 등으로 인한 HBM 수요가 폭증하면서 메모리 반도체 공급 기업의 경쟁 우위도 올라선 것이다.

최태원 SK그룹 회장도 최근 ‘SK AI 서밋’에서 “GPU보다 메모리 칩 공급이 부족해 메모리 반도체 병목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고 말했다. AI 발전 속도를 끌어올릴 GPU 성능은 나날이 진화하지만 이를 뒷받침할 메모리 공급은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

AMD 등 엔비디아 경쟁사들도 오픈AI와 수십억 달러의 계약을 완료했고 반도체 기업이 아닌 오픈AI마저 삼성전자, SK하이닉스와 직접 HBM 공급 계약을 맺으면서 한국 반도체 기업에 러브콜을 보내는 곳은 더 많아졌다.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는 설비투자와 증산을 하더라도 내년 메모리 반도체 공급 부족이 이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HBM뿐만 아니라 범용 D램, 낸드플래시까지 모든 반도체 라인에서 공급 부족이 발생하고 가격이 급등하고 있다.

고성능 D램인 DDR5 가격은 내년 초 30달러까지 뛸 것이란 전망이 나왔다. 10월 둘째 주까지 10달러 선이었던 현물 거래 가격이 3배로 뛰는 것이다.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는 설비투자만 단행하는 것이 아니라 파트너십을 통해 효율적으로 생산을 늘려간다는 계획이다. 그 일환이 엔비디아와 손잡고 구축하는 ‘AI 팩토리’다.

최 회장은 “인공지능(AI)은 스케일이 아닌 효율 경쟁으로 패러다임이 전환이 필요한 상태”라며 “스케일만 갖고 서로 간에 싸우게 되면 너무 많은 돈이 투여되고 상당히 비효율이 일어난다”고 말했다. 3. ‘피지컬 AI’ 실현할 수 있는 제조강국
"한국이 엔비디아 심장?" 젠슨 황, GPU 26만 장 풀고 간 진짜 이유
‘AI 제국’을 세운 젠슨 황의 다음 목표는 ‘피지컬 AI’다. 챗GPT처럼 인간의 언어를 이해하고 학습하는 차원을 넘어 사람처럼 물리적인 세계를 이해하고 움직일 수 있는 AI를 만들겠다는 계획이다.

이는 AI가 현실 세계에서 로봇·자동차·제조 라인 등과 상호작용할 수 있는 단계로 진입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젠슨 황은 “인과관계, 관성, 운동량 같은 물리 세계의 법칙을 이해하지 못하는 AI 진정한 지능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엔비디아가 최근 ‘로보틱스용 AI 플랫폼’에 집중하는 이유다. 그리고 이를 구현할 수 있는 산업 생태계는 한국이 유일하다. 반도체, 디스플레이, 자동차, 로봇 등 하드웨어 기반 기술 산업이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이기 때문이다.

젠슨 황은 “AI가 공장에서 로봇을 설계하고 그 로봇이 다시 새로운 로봇을 생산할 수 있는 시스템이 한국의 경쟁력”이라고 말했다. 젠슨 황은 한국이 이 전환의 중심에 설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물리적 세계를 다루는 산업이야말로 AI 가 가장 큰 부가가치를 창출할 영역”이라며 “그 산업들이 한국의 주력 산업”이라고 말했다.

한국은 피지컬 AI를 실현할 수 있는 중요한 파트너임과 동시에 다양한 산업군에서 피지컬 AI를 적용할 수 있는 테스트 베드(시험대)인 셈이다.

테크 업계에 따르면 한국에는 GB200과 전문가용 PC에 들어가는 ‘RTX 6000’ 시리즈 형태로 엔비디아 GPU가 들어올 전망이다. 다만 향후 엔비디아의 차세대 GPU 설계인 루빈(Rubin), 파인만(Feynman) 등 새 제품군이 나오면 공급되는 GPU가 달라질 수 있다.

다만 예상치 못한 트럼프 행정부의 '칩 장벽'으로 엔비디아 GPU가 원활하게 공급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엔비디아가 한국에 GPU 26만장을 공급한다는 사실이 공개되자 현지 CBS 인터뷰를 통해 "최첨단 칩은 미국 외에는 누구도 갖지 못하게 하겠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 발언이 중국을 염두에 둔 것으로 풀이되는 만큼 혼란을 키울 필요가 없다는 의견도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의 CBS 인터뷰 발언은 "엔비디아 최첨단 칩의 중국 판매를 허용할 것이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 과정에서 나왔다.

AI 구동을 위한 전력은 문제로 남아 있다. 전문가들은 GPU 26만 장을 구동하기 위해서는 대형 원전 1기를 추가 가동해야 할 정도의 전력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김영은 기자 kye0218@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