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인플레이션과 이로 인한 환율 변동성 확대는 해외 자금 이탈을 유발한다. 이는 금융 억압 정책의 근간을 무너뜨릴 수 있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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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경제는 전례 없는 ‘초양극화’ 국면으로 진입하고 있다. 단순한 소득격차를 넘어 경제 모든 부문에서 광범위하게 전개되고 있다. 최상위 계층에 소비가 집중되는 ‘가계 양극화’, 인공지능(AI) 혁신을 주도하는 빅테크와 전통 기업 간 성과가 극명히 갈리는 ‘기업의 양극화’, 견조한 자산 시장과 부진한 실물 지표가 공존하는 ‘실물 경제와 금융시장 간 괴리’가 동시에 심화되고 있다.
◆AI 혁신과 유동성 쏠림
초양극화 이면에는 주요국의 금융 억압 정책과 AI 혁신이 자리한다. 주요국은 2010년대 ‘재정 긴축’ 기조에서 벗어나 ‘확장 재정’으로 전환했다. 팬데믹을 기점으로 부채 관리를 위해 금융 억압을 선택했다. 금리를 명목 성장률보다 낮게 유지하고 완만한 인플레이션을 용인해 실질 부채 부담을 경감시키는 정책이다.

확장 재정 성격 역시 과거 단순한 수요 진작이 아닌 중장기 잠재 성장률 확충을 위한 투자 중심으로 재편됐다. 2022년부터 미국(IRA, CHIPS Act, OBBB Act), 독일(5000억 유로 인프라 기금), 중국(특별채 발행) 등 주요국 정부는 막대한 재원을 반도체, 친환경 에너지, AI 등 자국 미래 경쟁력과 직결된 신산업 인프라에 선별적이고 집중적으로 투자하고 있다.

2024년부터 시작돼 2025년까지 이어진 주요국 금리인하는 확장 재정을 뒷받침하는 완화적 금융 환경을 조성했다. 재정 확장과 통화 완화 결합은 막대한 유동성을 공급했다. 해당 유동성은 가계보다 기업으로, 그중에서도 특히 정부 정책과 AI 혁신 수혜를 받는 특정 산업으로 차별적으로 흘러 들어갔다.

동시에 AI 기술 혁신이 주도하는 신산업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2년간 긴축 충격에 벗어나 AI 비상장기업 투자는 2024년부터 회복세로 돌아섰다. 세계 AI 관련 IT 지출 규모는 2025년 1.5조달러에 육박할 것으로 추정된다. 서버, 반도체 등 인프라 하드웨어 투자를 넘어 AI PC, 스마트폰 등 소비재 관련 하드웨어 및 소프트웨어로 확산됐다.

금융 억압 정책과 AI 혁신 수요는 경제 전반에 걸쳐 파레토 법칙(상위 20%가 전체 80%를 설명하는 현상)을 강화하며 ‘초양극화’ 시대를 열고 있다. 1980년대 이후 구조적으로 지속된 소득 양극화는 완화적 금융 환경 속에 자산 시장의 폭발적 성장과 결합하며 부의 양극화를 심화시켰다. 미국에서는 상위 20% 가구가 전체 자산의 70%를 보유하고 있다.
◆팬데믹 이후 소비의 양극화
부의 쏠림은 팬데믹 이후 인플레이션 국면에서 소비 행태의 극단적 양극화로 직결됐다. 소비자물가상승률을 상회하는 명목 소비 증가, 즉 ‘실질 소비 증가’는 오직 소득 상위 20% 계층에서만 관찰된다. 반면 하위 80% 가계 소비는 실질 임금 정체와 고용 시장 둔화에 연동돼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이는 상위 20%의 부의 효과로 경제 전반의 고용과 소비 간 전통적 연계성이 훼손됐음을 시사한다.

그로 인해 소비 행태에서 과거와 다른 상황이 목격된다. 통상 경기 부진이 우려될 때는 내구재를 포함한 비필수재 소비가 먼저 위축돼야 한다. 하지만 최근 식료품 등 필수재 소비가 물가상승 부담으로 인해 위축되는 반면 상위 20% 소비에 힘입어 비필수재(내구재) 소비는 상대적으로 양호하다.

초양극화 현상은 가계 부문을 넘어 투자와 기업 실적, 나아가 실물경제와 금융시장 간의 관계에서도 명확히 나타나고 있다. 투자는 정부 정책과 AI 혁신 수요라는 두 가지 동력에 직결된 부문에만 극단적으로 집중되고 있다. IT, 헬스케어, 유틸리티, 일부 경기소비재 산업만 명목 성장률을 상회한 투자를 집행하고 있다.

부동산, 산업재, 금융 등 전통 경제와 밀접한 산업 투자는 2019년 팬데믹 이전 수준을 하회하며 침체를 겪는 중이다. 경제 전반의 투자가 더 이상 경기 순환 사이클이 아닌 ‘빅테크 사이클’ 및 ‘정책 사이클’에 연동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경기동행지수가 하락하는 중에서도 비주거용 투자가 견조하게 유지되는 배경이다. 가계 상황에 민감한 주거용 투자는 부진이 지속되는 차별화의 핵심 원인이다.

기업 부문에서도 양극화는 극심하다. 빅테크 기업들의 영업이익률은 1990년대 닷컴버블 직전과 같이 가파르게 상승한다. 원가 부담과 수요 부진으로 하락세를 보이는 여타 비금융기업과 차별화된다. 이는 실물과 금융시장 간의 괴리를 발생시키는 근원이다. GDP 대비 시가총액 비중을 의미하는 ‘버핏 지수’가 AI 관련 산업이 발달한 미국에서 압도적으로 높게 관찰된다. AI 사이클이 종료되거나 금융 억압 정책 기조가 변경되기 전까지 실물과 금융 간 괴리는 지속될 전망이다.
◆인플레이션 통제가 무너질 때
현재 초양극화 경제, 즉 ‘파레토 경제’는 정부의 금융 억압 정책이 전제돼야 한다. 금융 억압 정책이 성공하기 위한 전제 조건은 인플레이션이 관리 가능한 수준에서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것이다. 물가 통제에 실패해 인플레이션 불안 심리가 형성될 경우 실질 임금과 자산 가치의 동반 하락 속에 가계 구매력을 잠식시켜 내수 기반 자체를 약화시킨다.

높은 인플레이션과 이로 인한 환율 변동성 확대는 해외 자금 이탈을 유발한다. 이는 ‘통화 약세 → 수입 물가 상승 → 인플레이션 가속화’라는 악순환을 촉발해 금융 억압 정책의 근간을 무너뜨릴 수 있다.

결국 파레토 경제의 지속가능성은 인플레이션 통제에 달려 있다. 그 핵심은 ‘공급 확대’와 ‘의도적 불균형(수요 조절)’에 있다. 정부 지원이 R&D, 인프라 및 산업투자, 구조조정 등 공급 측면이 아닌 단기 수요를 자극하는 부문에 집중되거나 공급 환경이 악화될 경우 인플레이션 리스크 부각 속에 불확실성이 증대된다.

우호적 정책 환경을 훼손시킬 수 있는 첫 번째 리스크는 미국 고율 관세정책에서 비롯되는 이연된 충격이다. 현재 관세로 인한 비용 부담은 표면화되지 않았다. 미국 수입업자들의 선제적 재고 확충으로 일시적으로 이연됐다. 미국 실효 관세율은 18%로 추정되지만 실제 전체 수입품 대비 관세 수입 비중을 의미하는 실질 관세율은 11%에 머문다. 관세의 60%만이 현재 부담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수입처 다변화를 위한 노력에도 전방위적 관세 부과가 이어진 만큼 재고가 소진되고 재확충이 불가피해진 2025년 4분기부터 관세 비용이 확대될 것이다.

두 번째 리스크는 공급 제약 속에 수요에 민감해진 인플레이션 구조다. 미국 경제는 타 선진국과 달리 만성적 공급 제약으로 작은 수요 충격에도 인플레이션이 과거보다 훨씬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는 구조로 바뀌었다. 원자재 부문을 제외한 핵심 부문에서 공급 제약이 관찰되고 있다.

통화정책의 시차를 감안 시 2026년 2분기부터 억눌렸던 인플레이션이 재발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는 물가안정이라는 금융 억압 정책의 대전제를 훼손시켜 시장 전반에 심각한 충격을 줄 수 있는 리스크다.

세 번째 리스크는 무역 갈등 전선이 관세 영역을 넘어 환율로 비화될 가능성이다. 미국은 기축통화국으로서 달러 유동성을 공급해야 하는 의무와 자국 국제 경쟁력을 확보해야 하는 트리핀 딜레마 사이에서 고질적인 문제를 겪어왔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관세정책에 이어 의도적 약달러 유도를 시도할 수 있다. 약달러를 유도하기 위한 정책적 수단으로는 ①타국의 외환보유고에 대한 사용료 부과 ②동맹국을 대상으로 한 영구채 강제 교환 ③외화안정기금(ESF)을 통한 시장 개입(달러 매도) ④연준의 발권력을 활용한 직접 개입 등이 거론된다.

각 방안은 기축통화 지위의 훼손뿐만 아니라 막대한 재정 부담 또는 통제 불가능한 인플레이션 유발과 같은 심각한 부작용을 동반한다. 해당 정책이 전면적으로 시행될 가능성은 낮다. 그럼에도 금번 관세 부과 사례에서 보듯이 정책 당국이 기존 달러화 강세 기대 심리를 훼손시키기 위한 국지적이고 상징적 조치를 시행할 가능성은 유효하다.

하건형 신한투자증권 애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