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존지역 밖 개발규제 조항 삭제 두고 소송전
“조례 개정해도 문화재 보호 가능” 서울시 승소
보존지역 바깥에선 국가유산청(옛 문화재청)과 별도 협의 없이 지방자치단체 재량에 따라 유연한 개발이 가능하다는 취지다.
종묘 맞은편 세운상가 재개발 사업이 ‘왕릉 뷰 아파트’ 논란을 낳고 있는 가운데 서울시의 사업 추진에 힘을 실어주는 판결이어서 파장이 컸다.
문화체육관광부와 국가유산청이 법령의 제·개정을 포함해 가능한 모든 조치를 검토해 대응하겠다고 밝히며 갈등의 골이 깊어지는 양상이다.
문화재 보존지역 밖 개발, 지자체 재량인가
대법원 1부(주심 신숙희 대법관)는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2023년 10월 서울시의회가 의결한 ‘서울시 문화재 보호 조례 일부 개정안’을 무효로 해달라며 낸 소송에서 11월 6일 원고 패소로 판결했다.
지자체가 제정한 조례의 법령 위반 여부를 판단하는 소송은 대법원 단심제여서 이날 판결은 그대로 확정됐다.
문제가 된 개정안(김규남 서울시의원 대표 발의)은 조례 19조 5항을 삭제하는 내용이었다. 이 조항은 보존지역 바깥에서 이뤄지는 건설공사가 이뤄질 경우 해당 문화재의 특성과 입지 여건 등을 따져 ‘공사가 문화재에 영향을 미칠 것이 확실하다고 인정되면’ 그 영향을 재검토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보존지역이란 문화유산의 보존 및 활용에 관한 법률(문화유산법·옛 문화재보호법) 13조에 따라 지정문화재 주변에 설정되는 규제다. 해당 문화재의 역사적·예술적·학문적·경관적 가치 등을 보호하기 위함이다.
보존지역의 범위는 시도지사가 국가유산청장과 협의해 조례로 정하게 돼 있다. 서울시는 국가지정문화재는 외곽 경계로부터 100m 이내, 지정문화재 등은 50m 이내로 정했다.
서울시의회는 보존지역을 넘어선 곳에서의 개발까지 규제하는 건 “문화유산법이 위임하지 않은 포괄적·추상적 규제”라며 19조 5항을 삭제하는 조례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국가유산청이 “국가유산청과 사전에 협의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삭제한 것은 절차적 하자”라며 반발했으나 서울시는 개정 조례를 그대로 공포했다.
이에 국가유산청은 불복 소송을 냈고 2년여 간 법정 싸움이 이어져 왔다. 문화유산 보호와 재개발을 통한 지역경제 활성화라는 두 가치가 법정에서 맞붙게 된 셈이다.
덕수궁 담장 일부 개방, 창경궁~종묘 사이 율곡로 지하화 등 개발 사업 등에서 크고 작은 갈등을 빚어 온 서울시와 국가유산청이 받게 된 첫 법적 판단이다.
“국가유산청과 협의 의무 없어” 서울시 한판승
쟁점은 서울시가 국가유산청과 협의 없이 조례 조항을 삭제한 것이 ‘법령 우위 원칙’에 위반되느냐였다. 법령 우위 원칙이란 조례 개정을 포함한 국가의 모든 행정 작용은 헌법에 부합하는 법률에 위반돼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다.
대법원은 2003년 9월 판결에서 “지자체가 제정한 조례가 법령에 위반되는 경우 효력이 없다”고 판시한 바 있다. 이번 사건에서 재판부는 서울시의 손을 들어줬다. 조례 조항 일부를 삭제한 것이 법령 우위 원칙이라 보기 어렵다는 판단이다.
상위법인 문화유산법은 “지자체가 조례 규정 개정 시 국가유산청과 협의해야 한다”고 명시적으로 규정하지 않고 있다.
재판부는 문화유산법 13조가 “보존지역을 정하는 절차와 범위, 보존지역 내에서 시행되는 건설공사에 관한 관할 행정기관의 문화유산 보존 영향 검토 의무 등을 규정하고 있을 뿐 ‘보존지역을 초과하는 범위에서까지’ 문화유산 보존 영향 검토 절차를 거치도록 규정하거나 이런 내용의 조례를 개정하기 위해선 국가유산청과 협의하도록 규정하고 있지 않다”고 짚었다.
문화유산법에 따라 국가유산청과 협의를 의무적으로 거쳐야 하는 사항은 “개별 지정문화재의 특수성과 입지 여건 등을 고려해 보존지역의 범위를 정하는 것”에 엄격하게 한정해야 한다는 얘기다.
재판부는 “보존지역을 넘어서는 지역에서의 지정문화재 보호를 위한 사항까지 국가유산청과 협의해 조례로 정하도록 위임했다고 해석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
보존지역에 묶여 있지 않은 곳이라도 현행법상 개발 제한을 받을 수 있다. 문화유산법 35조는 보존지역 내 행위뿐 아니라 문화재가 소재한 지역의 수로와 수질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수계에서의 건설공사, 문화재와 연결된 유적지의 훼손 등 보존지역과 무관한 행위에 대해 국가유산청의 허가가 있어야 한다고 규정한다.
재판부는 이 조항이 “국가유산청장의 허가 사항을 규정할 뿐 문화재 보존 영향 검토 의무를 부과하는 건 아니다”라고 구분했다. 마찬가지 논리에서 문제의 조례 조항이 사라지더라도 상위법인 문화유산법에 근거해 문화재 보호는 충분히 가능한 상황이라고 대법원은 강조했다.
문화유산법 12조는 “건설공사로 인해 문화재가 훼손, 멸실, 수몰될 우려가 있거나 역사 문화환경의 보호를 위해 필요한 때 국가유산청이 건설공사의 시행자에 대해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재판부는 이를 근거로 “문제의 조례 조항을 삭제한다고 하더라도 문화재 또는 역사 문화환경의 보호에 차질이 초래된다고 볼 수 없다”고 정리했다.
[돋보기]
국가유산청, 강한 반발…서울시 “사업 취지 왜곡 말라”
이번 판결을 계기로 2004년 정비구역으로 지정된 이후 20년 넘게 삽도 못 뜬 종로 세운4구역 재개발 사업에 추진력이 붙을 수 있다는 기대감이 번졌다.
서울시는 지난 10월 이곳에 고층 빌딩을 세우기 위해 건물 최고 높이를 기존 종로변 55m, 청계천변 71.5m에서 101~145m까지 늘리는 재정비촉진계획 결정을 고시했다.
이를 두고 4년 전 세계유산인 경기도 김포 장릉 인근에 인천 검단신도시 아파트를 조성하는 문제를 두고 국가유산청과 시공사가 소송전을 벌였던 ‘왕릉 뷰 아파트’ 사태가 재연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왔다. 당시 공사 중단을 명령받았던 건설사는 국가유산청을 상대로 소송을 내 최종 승소했다.
국가유산청은 강하게 반발했다. 허민 국가유산청장은 종묘 맞은편에 고층 빌딩이 들어서면 종묘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가 취소될 수 있다며 서울시의 사업 계획에 유감을 표했다.
그는 “2006년부터 서울시에 (세계유산영향평가를 받으라는) 유네스코 권고안을 따르라고 했으나 서울시가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기간에 기습적으로 변경 고시를 냈다”고 했다.
종묘는 199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는데 국가유산청은 당시 유네스코가 ‘세계유산 구역 내 경관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인근 지역에서의 고층 건물 인허가는 없음을 보장해야 한다’는 조건을 명시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최휘영 문체부 장관도 서울시의 개발 계획을 “1960∼70년대식 마구잡이 난개발 행정”이라 지칭하며 강한 어조로 비판했다.
세운상가 일대 주민과 상인들은 하루라도 빨리 개발이 이뤄지길 바라고 있다. 개발업계에 따르면 국가유산청과의 마찰로 세운4구역 재개발이 유독 늦어지면서 주민들이 입은 재산권 피해만 수백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런 사정을 고려해서라도 사업 착공을 더 이상 늦출 순 없다는 게 서울시 주장이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문체부와 국가유산청이 “사업의 취지와 내용을 심각하게 왜곡했다”며 “세운 지역 재개발은 종묘의 가치를 더욱 돋보이게 하고 남산부터 종로까지 이어지는 녹지축 조성을 통해 종묘로 향하는 생태적 접근성을 높임으로써 그 역사적·문화재적 가치를 더욱더 높이게 될 것”이라고 맞섰다.
종묘 중심의 대규모 녹지 공원을 만들어 도심 공간을 재편하겠다는 얘기다. 2026년 착공, 2030년 완공이 서울시의 목표다.
장서우 한국경제 기자 suwu@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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