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반도체 쏠림’이 드러낸 제조업 위험 신호
올해 3분기 한국 수출은 1850억 달러로 전년 대비 6.5% 증가하며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그러나 호조의 절반 이상은 반도체가 차지했다. 1~9월 누적 반도체 수출액은 1197억 달러로 전년 대비 16.9% 늘었고 수출 비중은 22%에서 26%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수출 집중은 기업 규모별 격차로 이어지고 있다. 10대 수출 대기업이 전체의 40%를 차지하며 편중도가 사상 최고 수준이다. 반도체를 제외한 산업의 회복세는 여전히 미약하다.
한국경영자총협회 자료에 따르면 전체 수출의 67.6%가 중간재로 구성돼 있다. 미국(53.6%), 일본(53.5%)보다 훨씬 높은 수치다. 부품·소재 중심의 구조는 공급망 충격과 통상 분쟁에 취약하다는 뜻이다.
10월 기준 15대 주력 품목 중 반도체·선박·석유제품·컴퓨터를 제외하면 대부분 역성장을 기록했다. 철강(-21.5%)·일반기계(-16.1%)·자동차(-10.5%)·자동차부품(-18.9%) 등 주요 산업 부진이 뚜렷하다. 한국은행은 “반도체 의존도가 높을수록 경기 변동 시 충격이 커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철강업계는 해외 통상 규제와 국내 입법 지연이라는 두 개의 벽에 막혀 있다. 미국은 올해 철강·알루미늄 관세를 25%에서 50%로 인상했으며 유럽연합(EU)도 철강 무관세 수입쿼터를 3050만 톤에서 1830만 톤으로 줄이고 초과분에 50% 관세를 부과했다. 업계는 이로 인한 추가 부담이 연간 8700억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한다.
국내에서는 ‘K-스틸법’(철강산업지원법) 처리가 지연되고 있다. 수소환원제철 기술 개발, 세제 지원, 녹색 전환을 담은 법안이 여야 간 세부 이견과 세제 혜택 범위 논란으로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철강은 국가 공급망의 뼈대 산업인데 입법이 미뤄질수록 생산 축소와 구조조정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석유화학 산업은 장기 불황의 터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정부는 지난 8월 나프타분해시설(NCC) 에틸렌 생산량의 최대 25% 감축을 요구하며 자율 사업재편을 압박했지만 업계는 명확한 대안을 마련하지 못한 채 연말 시한을 넘길 가능성이 커졌다.
중국의 공급과잉과 글로벌 수요 둔화로 수익성이 급격히 악화하며 감산 외에는 뚜렷한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다. 현재 에틸렌 스프레드(납사-에틸렌)는 톤당 150~160달러로 손익분기점(250달러)을 한참 밑돈다.
한국화학산업협회는 “생산 감축만으로는 한계가 뚜렷하다”며 산업 체질 개선을 위한 ‘석유화학산업 경쟁력 강화 특별법’(가칭) 제정을 추진 중이다. 이 특별법에는 ▲전기요금 감면 ▲고부가 제품 전환 ▲설비 통폐합 시 공정거래법 예외 규정 등 구조조정의 실행력을 높이는 내용이 포함될 예정이다.
업계는 “전력 요금이 제조원가의 10~15%를 차지하는 만큼 감면 없이는 생존이 어렵다”고 주장한다. 중국은 러시아산 저가 원유를 활용해 비용을 낮추고 있어 경쟁력 격차는 더 벌어지고 있다.
한 화학업계 관계자는 “전기요금과 원자재 가격이 동시에 오르면서 가동률을 60~70%로 낮춘 업체가 많다”며 “기후환경요금이 4년 새 70% 이상 상승한 것도 부담”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단순 감산보다 스페셜티(고부가 소재)로의 산업 전환을 위한 R&D와 금융·세제 지원이 병행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2차전지 산업은 캐즘과 중국 배터리 업체들과의 양강 구도 속에 점유율이 급격히 하락하고 있다. SNE리서치에 따르면 올해 1~8월 한국 배터리 3사(LG에너지솔루션, SK온, 삼성SDI)의 글로벌 전기차용 배터리 사용량 합산 점유율은 전년 동기 대비 3.8%포인트 하락한 16.8%로 집계됐다.
같은 기간 CATL은 점유율 36.8%로 1위 자리를 견고히 유지했고 BYD는 18.0%로 2위를 차지했다. CALB(4위), 고션(7위), EVE(9위), SVOLT(10위)를 포함해 중국 업체 총 6개 기업이 점유율 10위 안에 들었다.
이 상황에서 국내 업계를 지원할 ‘한국판 IRA’(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 논의가 국회에서 멈춰 있다. 이 제도는 기업이 초과 투자비를 현금으로 환급받거나 제3자에게 양도해 자금 회전을 돕는 방식이다.
미국은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유럽은 ‘넷제로 산업법’을 통해 세제·현금 지원을 이미 시행 중이다. 중국은 막대한 보조금과 전력 인프라 확충으로 공급망 안정성을 확보했다.
반면 한국은 법안 통과 지연으로 세액공제 시점조차 불투명하다. 한 업계 관계자는 “전환 기술과 생산 인프라를 동시에 확충해야 하는 시기에 지원이 늦어지면 글로벌 점유율 격차는 더 벌어진다”고 말했다. 업계는 한국판 IRA 법안의 연내 통과가 무산될 경우 내년 설비 투자 계획의 30% 이상이 해외로 이전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정부는 11월 11일 2035년까지 온실가스 배출을 2018년 대비 53~61% 줄이겠다는 국가온실가스감축목표(NDC)를 확정했다. 산업 부문에는 24~31% 감축이 요구된다. 배출권 가격을 톤당 5만원으로 계산하면 산업계 부담은 연간 약 5조원 규모에 달한다.
문제는 감축 속도다. 한국의 감축 폭은 주요국 평균(10~20%)을 웃돌며 같은 비율이라도 기간이 훨씬 짧다. 미국은 이미 2000년대 초 배출이 정점을 찍었고 중국은 산업 보호를 우선시해 완만한 속도로 감축 중이다. 한국은 2018년을 기준으로 삼아 불과 17년 만에 산업 구조를 근본적으로 전환해야 한다.
경제단체들은 “기후 대응의 필요성에는 공감하지만 산업 현실에 맞는 인센티브가 병행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중소기업중앙회는 “전기요금이 이미 과도한데 NDC 상향으로 부담이 더 커질 것”이라며 요금 체계 개편을 요구했다.
이상원 산업연구원(KIET) 탄소중립산업전환연구실 연구위원은 “NDC 상향의 방향성에는 공감하지만 속도가 지나치게 빠르면 현장의 부담이 커질 수 있다”며 “철강·석유화학 등 주력 제조업의 경쟁력 유지를 위해 수소환원제철, 바이오 납사 등 감축 기술에 대한 R&D 지원과 수소 인프라 같은 국가 차원의 기반 투자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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