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지원TF는 미래전략실(미전실) 해체 후 삼성전자에서 ‘미니 컨트롤타워’ 역할을 해왔다. 회사가 수년째 결실을 내지 못하는 대형 인수합병(M&A)을 비롯한 굵직한 의사결정을 담당했다. 그룹의 청사진을 그려온 사업지원TF가 정식 조직으로 격상하면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세대교체와 경영쇄신에 속도를 낼 것이란 해석이 나온다. 무죄 판결 이후 적극적으로 경영 일선에 나서는 이 회장의 ‘뉴삼성’이 본격화할 것이란 전망이다.
삼성전자는 지난 11월 7일 “정현호 부회장의 업무가 삼성전자 사업지원TF장에서 회장 보좌역으로 변경됐다”고 발표했다. 이 회장을 도와 삼성을 이끈 정 부회장이 2선으로 물러난 것이다. 재계에 따르면 이 회장의 발목을 잡았던 사법리스크가 해소되고 반도체 사업이 정상 궤도에 오르자 정 부회장이 용퇴한 것으로 알려졌다. ‘재무라인’ 정통성 이어받는 컨트롤타워사업지원실을 이끌게 된 박 사장은 전략·재무통으로 통한다. 그는 삼성전자 무선사업부 지원팀장(전무), 삼성 미래전략실 경영진단팀장(부사장), 삼성SDS 사업운영총괄, 삼성전자 경영지원실장(사장) 등을 역임했다. 부품과 완제품을 두루 거치면서 기술경영과 사업 대한 폭넓은 이해를 갖추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기술인재를 중시하는 것 또한 특징이다.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박 실장은 소프트웨어를 연구하는 KAIST 경영과학과 대학원에서 석사를 받았다. 그는 대학원에서 소프트웨어와 시스템 설계 등을 두루 공부하며 연구해 공학자 이상의 이공계 전문성을 갖춘 것으로 알려졌다.
사업지원실은 전략팀, M&A팀, 피플(인사)팀, 경영진단팀 등 4개 팀 체제로 구축됐다. 전략, 투자, 인사, 감사를 아우르는 그룹의 컨트롤타워가 다시 출범한 것이다. 전략팀장은 삼성글로벌리서치 경영진단실을 이끌었던 최윤호 사장이 맡는다.
최 사장 역시 삼성 미래전략실 전략1팀장, 삼성전자 경영지원실장, 삼성SDI 사장 등을 두루 역임한 전략통으로 꼽힌다. 그는 1987년 삼성전자 가전사업부에 입사한 뒤 37년간 경영관리, 해외사업, 재무, 전략 등 주요 보직을 잇따라 거쳤다. 이후 미래전략실 전략 1팀, 사업지원 TF 담당임원, 삼성전자 CFO, 삼성SDI CEO, 삼성글로벌리서치 경영진단실장을 역임하며 삼성의 전략 축을 실질적으로 이끌어왔다.
M&A팀은 '빅딜 전문가' 안중현 사장이 이끈다. 삼성 내에 M&A 전담 조직이 만들어진 건 이번이 처음이다. 안 사장은 삼성 내에서 2017년 약 9조 원 규모의 하만 인수 등 대형 M&A를 주도한 인물이다. 이 팀에는 임병일 부사장 등 M&A 전문가들도 합류했다.
인사 전문가인 사업지원TF 소속 주창훈 부사장과 문희동 부사장은 각각 사업지원실 경영진단팀장과 피플팀장으로 임명됐다.
사업지원실은 차세대 반도체, AI, 로봇 등 삼성전자의 미래사업 경쟁력을 강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최근 메모리 반도체 등 삼성전자의 주력 사업이 본궤도에 오르면서 이 회장이 미래사업에 더욱 주력할 수 있는 환경도 구축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지난 30년 동안 반도체 시장의 1인자였던 삼성전자는 AI 시대에 뒤처지며 추격자로 전락했다. 하지만 올해 고대역폭메모리(HBM)로 반도체 경쟁력을 회복한데 이어 파운드리에서도 빅테크 수주를 대거 따내면서 반격을 시작했다. 사법리스크 벗은 이재용의 ‘뉴삼성’ 신호탄산업계에서는 삼성의 전격적인 경영진 교체를 이 회장이 그리는 뉴삼성의 신호탄으로 평가했다. 그동안 삼성전자 안팎에선 삼성의 대대적인 혁신과 위기 극복을 위해선 컨트롤타워를 재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삼성 준법감시위원회는 지난해 연간보고서를 통해 위기 극복 방안 중 하나로 컨트롤타워 재건 등을 뼈대로 한 지배구조 개선을 촉구했다.
다만 삼성전자는 이번 사업지원실 신설을 컨트롤타워의 부활로 확대 해석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사업 경쟁력 강화를 위한 조직 안정화 차원이라는 설명이다.
삼성의 컨트롤타워는 이병철 삼성 창업자 때인 1959년 설립된 회장 비서실로 출발했다. 삼성이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하기 시작한 1990년대 후반 이후에는 1998년 구조조정본부, 2006년 전략기획실, 2010년 미래전략실 등으로 이름을 바꿨다. 2010년 미래전략실에는 전략·경영진단·인사·커뮤니케이션·기획·준법경영 등 6개 팀에 250여 명이 근무하며 전방위 업무를 관장했다.
삼성전자는 2017년 국정농단 사태에 연루되며 미전실을 해체하고 사업지원TF를 설립했다. 재무라인은 오랫동안 수뇌부 핵심에 자리했다. 컨트롤타워가 간판을 네 번 바꾸는 동안 그룹의 2인자로 불리는 최고책임자였던 이학수 부회장-김순택 부회장-최지성 부회장-정현호 부회장 모두 재무통이었다.
사업지원TF는 정현호 부회장 체제로 약 8년간 운영돼왔다. 이 회장의 사법리스크가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상황에서 삼성은 임시 조직 형태로 몸집을 최소화하는 방법을 택했다. 이 회장이 올해 185차례 법정 출석 끝에 대법원에서 최종 무죄 판결을 받으면서 조직 정상화에 나설 명분과 동력을 확보했다.
이 회장은 무죄 확정 이후 경영 현장에 적극적으로 나서며 광폭 행보를 보였다. 최근 젠슨 황 엔비디아 CEO와 AI 동맹을 맺고 HBM4 납품을 확정했다. 테슬라와는 23조원 규모의 AI 반도체 칩 공급 계약을, 오픈AI로부터는 월 90만 장 규모의 HBM 공급의향서를 확보했다. 또 올레 칼레니우스 메르세데스-벤츠 회장과 만나 전장(차량용 전자전기장비) 사업을 논의하며 삼성의 미래 먹거리를 직접 챙겼다.
사기가 떨어진 조직 문화 변화에도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삼성전자는 실리콘밸리식 주식 보상 제도를 임원에 이어 전 직원에게 도입하며 새로운 인재 경영 철학을 확립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이번 인사를 감안할 때 11월 중순께 나올 삼성 사장단 인사와 조직개편 폭도 클 것으로 예상했다.
전문가들은 사업지원실이 그룹 컨트롤타워 역할을 맡게 될 경우 과거 미래전략실이 과감한 결단을 내리던 시절처럼 조직 간 조율력과 전략 실행력이 강화될 것으로 전망했다.
삼성전자를 자문했던 송재용 서울대 석좌교수는 “국정농단 사태 이전 미래전략실은 지금보다 두 배 이상 컸지만 그 안에서 사업·기술 전문가들이 신속히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며 “지금은 조직은 쪼그라든 반면 해당 조직의 장악력은 오히려 강해졌다는 말이 나온다”고 말했다. 이어 지금은 삼성전자 의사결정 체계에 변화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송 석좌교수는 “삼성이 가야 할 길은 새로운 방향이 아니라 이건희·권오현 회장 시절 이미 시도했던 방향”이라며 “기술 전문가들에게 과감히 권한을 부여하고 자율적이고 열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문화로 회귀해야 한다. 여전히 삼성에는 훌륭한 엔지니어들이 남아 있으므로 이들에게 동기를 부여해 기술 중심의 회사로 재건(Rebuilding)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영은 기자 kye0218@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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