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당신의 글 “나는 크립토에 8년을 낭비했다”를 읽었습니다. 엑스(옛 트위터)에 올라온 뒤 높은 조회수를 기록했고 중국에서는 한 매체가 번역해 소개하면서 “유동성 고갈과 서사 공백 속의 집단적 불안을 반영했다”고 짚었습니다.
주식, 원자재, 금 등이 모두 올랐는데 암호화폐 가격만 오르지 않는 현 상황에 적절한 내러티브를 제공했다는 거죠.
한국에서도 당신의 글은 트레이더들 사이에서 빠르게 퍼지고 있습니다. 말레이시아 출신인 당신은 2021년 싱가포르에서 디파이(탈중앙금융) 플랫폼 아에보(Aevo)를 공동창립해 CTO로 일했고 올해 5월 회사를 떠났습니다.
지금은 개인 위성 프로젝트를 준비한다고 홈페이지에 올려놨더군요. 내년 6월이면 스페이스X의 팰컨9에 실려 발사된다고요.
어떤 이들은 업계에서 성공을 맛본 당신이 6개월 만에 내놓은 이 글이 사다리를 걷어차고 떠나는 격이라 비판합니다. 반대로 내부자의 보기 드문 솔직함이라는 평가도 있습니다.
그리고 “비밀번호 하나만 외우면 10억 달러를 들고 국경을 걸어서 넘을 수 있다는 것은 언제나 강력한 아이디어”라며 블록체인 기술과 비트코인에 매료된 계기를 설명했습니다. 나도 동의합니다. 국가와 은행에 의존하지 않는 개인 주권적 화폐라는 사이퍼펑크의 꿈은 지금도 매력적입니다. 그 꿈과 함께 이 업계에 발을 들인 사람이 당신만은 아닐 것입니다.
당신이 이 업계에 대해 결론지은 부분은 충격적이었습니다. “나는 새로운 금융 시스템을 만든 게 아니다. 나는 카지노를 만들었다. 카지노라고 스스로 부르지 않는 카지노, 하지만 우리 세대가 만들어낸 가장 거대한 24시간 온라인 멀티플레이어 카지노를.”
사실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오늘의 크립토 시장을 냉정하게 들여다보면 가치 창출보다 가치 이전에 최적화된 구조가 눈에 들어옵니다. 누군가의 이익이 누군가의 손해와 직접적으로 이어져 있는 사슬이죠.
당신은 또 수많은 대형 암호화폐 프로젝트에 수천억 달러가 투입되었음에도 “새로운 금융 시스템을 만드는 데 기여하지 못했고 오히려 모두의 돈을 태워버렸다”고 지적했습니다. 이 또한 틀린 지적이 아닙니다. 비트코인과 이더리움, 솔라나에 이은 4등을 찾겠다는 인센티브가 수천억 달러를 증발시켰습니다.
그러면서 당신은 “탈중앙화를 외치지만 실제 인센티브는 완전히 다른 곳을 향한다. 서로의 돈을 제로섬으로 빼앗는 방식이 정상화되었다”고 했습니다. 당신이 “사용자가 0인데 시가총액만 높은 토큰들이 넘쳐난다”고 하고 “크립토에서는 성공적인 비즈니스나 제품 없이도 돈을 번다”고 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실제로 이 산업은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것보다 코인이나 토큰을 발행해서 거래소에 상장하는 것이 쉽고 빠른 수익 경로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래도 무언가 자라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영원히 고정된 상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카지노의 흐릿한 조명 아래에서도 다른 무언가가 자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스테이블코인 거래량은 비자와 마스터카드 합산 거래량을 넘어섰습니다. 나이지리아, 아르헨티나, 베트남처럼 인플레이션이 심하거나 은행 접근성이 낮은 50개국 이상에서는 스테이블코인이 실제로 쓰이고 있습니다. 대형 결제기업이 스테이블코인 인프라 기업을 인수했다는 소식은 다양하게 들려옵니다.
여기서 그쳐선 안 됩니다. 이 업계가 지속가능하려면 선한 수익 모델을 찾아야 합니다. 사용자에게 실제 가치를 제공하고 그 가치로부터 수익이 발생하는 구조 말입니다. 월가의 기관투자가들이 비트코인 시장의 큰손으로 등극한 지금에도 이 업계는 종종 ‘실질 가치가 없다’는 비판을 맞닥뜨리게 됩니다. 그만큼 대중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또는 인식하지 못했더라도 알고보니 편리했다고 말할 수 있는 사용 가치를 창출해내지 못한 한계가 있었습니다.
당신도 잘 알다시피 이곳은 태어난 지 17년 남짓 된, 아직도 태동 단계에 있는 산업입니다. 게다가 금전적 이해로 얽혀 있어 극심한 혼란 속에서 성장했다는 걸 감안해야 합니다. 혁신은 뒷전이고 빨리 수익을 내고 손을 털겠다는 사람들을 막으려 해도 막을 수 있는 제도조차 존재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더욱이 아직 무르익지 않은 논의가 많습니다. 예컨대 스테이블코인과 토큰증권은 수많은 혁신의 화두를 던져줬지만 아직 첫발도 못 뗀 나라가 많습니다. 당신이 지적한 구조 또한 이 업계가 너무 늦기 전에 해결해야 할 숙제라는 데 이견이 없습니다. 어쩌면 당신은 너무 짧게 머물다 가는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당신이 내놓은 “이 업계의 독성적 사고방식이 젊은 세대의 사회적 이동성을 무너뜨릴 것”이라는 경고에 동의하지 못합니다. 바로 젊은 세대와 그들의 시대를 위해서라도 새로운 금융이 필요하고 우리는 그 기술을 발전시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AI와 로봇이 경제 주체가 되어가는 시대에 인간 중심으로 설계된 과거의 결제 모델을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자율주행 차량이 통행료를 내고, AI 에이전트가 이용료를 실시간으로 정산하고, 로봇이 전력 사용량에 따라 마이크로결제를 주고받는 세상이 오고 있습니다. 기존 금융 인프라로는 이런 식으로 발생하는 초당 수천 건의 기계 간 거래를 처리할 수 없습니다. 블록체인 기반 결제가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되는 시나리오입니다. 옳은 선택이 돈을 벌 수 있도록당신은 “돈을 벌 것인가, 옳을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이번엔 옳음을 선택한다”며 고별 인사를 했습니다. 글쎄요. 우리는 돈을 벌더라도 옳은 선택을 해야 합니다. 아니 옳은 선택을 하면서 돈을 버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그것이 이 업계에 남은 사람들의 숙제입니다.
내년 코인 시장은 비관적 전망이 많습니다. 양손에 비트코인 현물ETF와 트럼프의 손을 잡고 달려온 지난 2년의 피로감이 쌓여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지금이 방향을 바로잡을 시간이기도 합니다. 화려한 불빛이 꺼진 자리에는 진짜 건물을 짓는 사람들이 남습니다.
당신의 위성이 우주로 올라가는 내년에 이 업계는 어떤 모습일까요. 언젠가 당신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온다면 카지노가 아닌 다른 이름으로 이 공간을 부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곳에 남은 사람으로부터.
김외현 비인크립토 동아시아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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