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일 크리스 라이트 에너지부 장관은 골드만삭스그룹 콘퍼런스에서 연설하면서 원유 판매 수익과 배분을 트럼프 행정부가 통제해서 수익이 베네수엘라 정권이 아닌 국민을 위해 사용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미국이 베네수엘라산 원유를 공급받는 기간은 ‘무제한’이라는 것이 트럼프 정부의 설명이다.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도 이날 의회와 언론에 동일한 내용을 설명했다.베네수엘라 원유 대금으로 미국산 상품 구입
미국이 다른 나라의 석유를 강탈하는 게 아니냐는 비판이 자연히 뒤따른다. 이와 관련해 라이트 장관은 CNBC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누구의 석유를 훔치는 게 아니다”며 “베네수엘라 원유를 시장에 다시 팔고 미국 재무부의 베네수엘라 명의 계좌에 예치하는 것”이라고 방어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베네수엘라 정부가 원유를 판 대금은 전부 미국산 상품을 사는 데 사용될 것”이라고 했다. 궁극적으로 미국은 상품을 더 팔고 베네수엘라는 제재를 받아 수출길이 막혔던 원유를 팔 수 있게 되니까 윈-윈이라는 논리다.
마두로 대통령의 뒤를 이어 권력을 차지한 델시 로드리게스 부통령 등은 이 같은 구상에 동의한다고 밝혔다. 베네수엘라 대통령실은 미국과의 원유 수출 협상 전개를 옹호하면서 “양국 간 교역을 이례적인 일로 봐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공개했다.
베네수엘라 국영석유회사(PDVSA)도 텔레그램과 인스타그램 등 소셜미디어를 통해 배포한 성명에서 “우리는 미국과의 협상이 셰브론을 비롯한 글로벌 기업에 적용된 방식과 유사한 시스템에 따라 진행되고 있음을 알린다”며 “베네수엘라가 국내 석유에 대한 유일한 권리를 가진 국가라는 원칙을 지키며 상호 이익을 보장하는 게 주목표”라고 했다. 또 관련 협상이 ‘엄격히’ 상업적 차원에서 이뤄지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추가 투자 10년간 1000억 달러 소요 추정
베네수엘라 원유를 미국이 관리하겠다는 소식은 유가에 하방 압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7일 서부텍사스유(WTI) 1개월 선물 가격은 1.5%가량 하락해 배럴당 56달러 선에서 거래됐다. 전반적으로 베네수엘라산 원유가 시장에 추가로 공급되는 것에 대한 부담이 커졌기 때문이다.
정유업체들은 단기적인 투자 부담이 큰 만큼 계산기를 두드리는 기색이 역력하다. 관건은 초기 투자비용이다. 베네수엘라 원유 매장량은 3030억 배럴로 전 세계의 17%에 달한다. 하지만 생산시설 국유화와 독재가 이어져 현재 생산량은 하루 100만 배럴(세계 생산량의 1%)까지 떨어진 상태다.
낙후한 베네수엘라 원유 생산을 회복하기 위해선 10년 동안 매해 약 100억 달러씩 투자해야 한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셰브론이나 엑손모빌 같은 경우에는 인근 가이아나 광구에서 대규모 해상유전 투자를 준비하고 있기 때문에 베네수엘라산 원유 투자를 병행하는데 따른 부담도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대규모 중질유를 싼값에 확보할 수 있다는 이점이 뚜렷하다. 미국 정부는 이 원유를 미 셰일오일과 혼합해 판매할 것으로 예상된다. 더그 버검 미국 내무장관은 “중질유를 경질유와 섞어야 하는데 셰일오일 덕분에 여기(미국)에는 경질유가 넘쳐나고 있다”며 “베네수엘라산 원유 활용은 (미국) 일자리에도, 향후 유가에도 좋은 소식”이라고 밝혔다. 지금까지 미국은 셰일오일 상품성을 높이기 위해 캐나다산 셰일오일과 중동 두바이유 등 중질유를 주로 혼합했는데 앞으로는 이를 베네수엘라산으로 대체할 수 있다는 뜻이다.OPEC 영향력 떨어질 듯
트럼프 대통령은 베네수엘라산 원유 생산을 늘려 유가를 떨어뜨릴 계획이다. 이는 미국 내 원유 생산 붐을 일으키겠다고 한 트럼프 대통령 공약과 배치된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이 조치로 미국 내 셰일오일·가스 기업이 생산을 늘리기 어려운 처지가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베네수엘라 석유의 주요 수출 대상국이던 중국을 견제하려는 의도도 읽힌다. 다만 중국의 석유 소비량은 하루 1130만 배럴 수준으로 베네수엘라산 석유 수입량(하루 30만 배럴)은 이 중 2.6%에 불과해 희토류처럼 ‘치명타’가 되기는 힘들다.
베네수엘라산 원유가 나온다 하더라도 투자 비용을 감안하면 초기 생산단가는 배럴당 80달러 이상에 달할 수 있다고 에너지업계는 보고 있다. 이 경우 배럴당 40~50달러인 캐나다산 중질유보다 가격 경쟁력이 떨어진다. 다만 생산시설이 완전히 복구된 후에는 생산단가가 캐나다산 중질유보다 낮아질 가능성이 있다.박스기사: 행동주의 펀드 엘리엇 ‘시트고’ 낙찰받아 ‘대박’ 조짐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 축출과 이후 미국의 베네수엘라산 원유 통제권 확보에 웃고 있는 기업이 있다. 한국에서도 잘 알려진 행동주의 헤지펀드 엘리엇매니지먼트다.
엘리엇매니지먼트는 지난해 11월 법원에서 미국 내 ‘시트고(CITGO)’라는 정유회사와 주유소 체인을 59억 달러에 낙찰받았다. 시트고는 베네수엘라 국영석유회사(PDVSA)의 자회사가 가지고 있는 기업이다.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에 본사를 두고 있는 이 회사는 1990년대 중반 시장점유율 1위를 차지하는 등 미국에서 가장 잘나가는 정유사였다. 미국과 베네수엘라의 관계가 좋을 때 베네수엘라산 원유를 들여와 미국인들의 차량 등에 공급했다. 이후 차베스 정권이 베네수엘라 석유 생산 및 정제 시설을 국유화하면서 관계가 끊어졌다. 2019년부터 시트고는 베네수엘라 원유를 더 이상 사용하지 않고 있지만 여전히 미국 내 7위 회사다. 또 정유소, 송유관, 터미널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이 자산의 가치가 110억~130억 달러에 달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이 회사가 매물로 나온 것은 미국 정유업체들이 베네수엘라 정부를 상대로 채권자로서 소송을 진행했기 때문이다. 받을 돈을 받지 못한 대신 베네수엘라 정부 소유 자산으로서 미국에 있는 이 회사가 매각 대상이 됐고, 엘리엇이 낙찰에 성공한 것이다. 베네수엘라 정부는 이 매각이 사기라고 주장하고 있다.
매각 후 불과 두 달 만에 이 거래는 ‘대박’이 날 참이다. 베네수엘라산 원유가 미국에 지속적으로 공급될 경우 시트고는 걸프 연안 정유소에서 이를 정유해서 미국 내에 팔 수 있는 모든 준비가 되어 있는 회사이기 때문이다. 다만 엘리엇이 이 거래를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미국 재무부의 승인을 받아야 하고 PDVSA와 베네수엘라 정부의 항소에 대응해 승리해야 한다. 하지만 미국 정부가 베네수엘라의 편을 들어줄 가능성은 높지 않다.
워싱턴=이상은 한국경제 특파원 sel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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