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카이치 일본 총리와  우에다 가즈오 일본은행 총재가 지난 2월 16일 만나 회담을 가졌다. 사진=연합뉴스
다카이치 일본 총리와 우에다 가즈오 일본은행 총재가 지난 2월 16일 만나 회담을 가졌다. 사진=연합뉴스
일본은행의 통화정책을 결정하는 심의위원에 ‘비둘기파’ 두 명이 가세했다. 이에 일본은행의 기준금리 인상론이 후퇴하면서 엔화값이 더 떨어질 가능성이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이미 엔화 실질 가치는 30년 전의 3분의 1로 급락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미국이 원하지 않는 방향이어서 다카이치 사나에 내각의 대응이 주목된다. 금리인상 난색 표한 다카이치
일본 정부는 지난 2월 25일 일본은행 심의위원에 ‘비둘기파’인 아사다 도이치로 주오대 명예교수와 사토 아야노 아오야마가쿠인대 교수를 기용하는 인사안을 의회에 제출했다. 아사다 교수는 3월 31일, 사토 교수는 6월 29일 임기가 끝나는 전임 심의위원 후임으로 선임될 예정이다.

중의원과 참의원에서 각각 찬성 다수로 동의를 얻으면 정식으로 임명된다. 임기는 5년이다. 심의위원은 일본은행 금융정책결정회의에 참석하는 9명의 정책위원 중 총재, 부총재 2명을 제외한 6명으로 구성된다. 금리는 9명 다수결로 결정한다.

일본에서 ‘리플레이션파’(금융 완화로 인플레이션을 유도하는 정책을 지지)로 평가받는 아사다 교수는 그동안 적극적인 금융 완화를 주장했다. 사토 교수도 리플레이션파 내에서 줄곧 심의위원 후보로 거론됐다. 두 사람의 인선에는 금융 완화를 지향하는 다카이치 총리의 뜻이 반영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다카이치 총리는 지난 2월 16일 우에다 가즈오 일본은행 총재와 회담에서 추가 금리인상에 난색을 보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마이니치신문은 “일본은행은 ‘금융 정상화’와 엔저 대응을 위해 추가 금리인상이 필요하다는 인식이지만 중의원 선거 압승으로 정권 기반을 굳힌 다카이치 총리와 관계상 어려운 대응을 강요받을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일본은행은 작년 12월 11개월 만에 금리를 연 0.75%로 올렸다. 현재 금리는 30년 만의 최고 수준이지만 일본은행은 금리인상을 계속할 방침을 시사하고 있다. 이번 인사안이 의회를 통과해도 당장 일본은행의 금리인상 지속 방침 자체가 흔들리지는 않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추가 인상에 신중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3월에는 미·일 정상회담이 예정돼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는 그동안 엔저에 불만을 드러냈다. 1월 엔화값이 급락했을 때는 스콧 베선트 재무장관이 주도해 환율 개입 전 단계인 ‘레이트 체크’에 나서 엔화값을 끌어올리기도 했다. 다시 엔화값이 떨어지고 미국의 불만이 커지면 다카이치 총리도 금리인상을 수용할 가능성이 있다. 엔화 실질 가치 30년 전의 3분의 1
엔저 탓에 일본의 대외 구매력은 계속해서 하락하고 있다. 엔화의 ‘실력’을 나타내는 실질실효환율은 정점을 찍은 31년 전의 3분의 1 수준으로 떨어졌다. ‘잃어버린 30년’으로 불리는 장기 침체와 저금리가 배경이다. 엔화 가치 회복을 위해서는 경제 성장력을 되찾는 것이 중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제결제은행(BIS)에 따르면 올해 1월 기준 엔화의 실질실효환율(2020년=100)은 67.73이다. 1973년 변동환율제 도입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이다. 엔화의 실질실효환율이 가장 높았던 1995년 4월(193.95)과 비교하면 약 3분의 1 수준으로 축소됐다.

실질실효환율은 다양한 통화에 대한 엔화의 실질 가치를 나타내는 지표다. 일본인이 해외에서 물건 등을 구매하는 힘을 반영한다. 달러와 유로 외에도 중국 위안화 등 다양한 통화에 대해 엔저가 진행됐다. 수출에는 도움이 됐지만 해외에서 상품·서비스를 구매할 때 부담이 늘었다.

1990년대 버블 붕괴 뒤 장기화한 일본 경제의 침체가 주요 원인 중 하나다. 일본은행에 따르면 1995년 1% 전후였던 잠재성장률은 2010년대 후반 0%대 초반까지 하락했다. 떨어지는 성장력이 초저물가, 초저금리로 이어져 실질실효환율의 장기 하락을 초래했다. 日 환율관찰국 지정에도…다카이치, 엔저 옹호
그럼에도 다카이치 총리는 엔저의 장점을 강조했다. 그는 지난 1월 31일 가두연설에서 “엔저니까 나쁘다고 말하지만 수출산업에는 큰 기회”라며 “엔고라면 수출해도 경쟁력이 없다”고 했다. 다카이치 총리는 “외국환자금특별회계 운용도 싱글벙글하는 상태”라고 강조했다. 그는 엔저에 따른 수입 물가 상승 등 단점은 언급하지 않았다.

외국환자금특별회계는 일본 재무성이 환율 개입을 위한 자금을 관리하는 회계다. 엔화 강세 국면에서 개입할 때는 정부가 단기증권을 발행해 조달한 엔을 팔아 달러를 산다. 개입으로 얻은 외화는 미 국채 등으로 보유한다. 엔저 국면에서는 미 국채 등을 팔아 조달한 달러로 엔을 산다. 개입으로 얻은 엔은 정부 단기증권 상환에 충당하는 구조다.

외국환자금특별회계에서는 외화자산에서 얻은 이자가 세입이 되고, 정부 단기증권 이자 지급비가 세출이 된다. 일본이 해외보다 금리가 낮은 상태가 지속되면서 금리 차이에 따른 이익이 발생한다. 엔화 가치가 떨어지면 해외에서 받는 이자 수입이 엔화 기준으로 커진다. 다카이치 총리가 ‘싱글벙글’이란 표현을 사용한 이유다.

앞서 미국 정부는 지난 1월 29일 일본을 환율 관찰 대상국으로 재차 지정했다. 미 재무부는 ‘주요 교역 상대국의 거시경제 및 환율 정책’ 반기 보고서에서 통화 관행과 거시정책에 신중한 주의가 필요하다며 한국과 중국, 일본 등 10개국을 관찰 대상국 명단에 올렸다.

이번 보고서에는 일본은행에 금융 긴축을 요구하던 문구가 삭제됐다. 그 대신 일본의 엔저 요인으로 “새 정부의 확장적 재정정책”을 새롭게 들었다. 요미우리신문은 “일본은행이 금리를 단계적으로 인상하는 가운데 다카이치 정부 출범 후 엔저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자 미국 정부가 일본의 금융정책보다 재정정책에 주목하는 모양새”라고 짚었다. 일본은행 긴축 ‘마지막 스텝’…보유 ETF 매각 개시
이런 가운데 일본은행은 보유 중인 장부가 37조 엔 상당의 상장지수펀드(ETF) 매각을 시작했다. 금리인상 기조를 유지한 가운데 국채 매입을 줄이는 ‘양적 긴축’에 나선데 이어 ETF 매각이라는 ‘질적 긴축’까지 시작한 것이다.

일본은행은 ETF 매각을 지난 1월 개시했다. 1월 매각액은 장부가 기준 53억 엔이었다. 1월 말 일본은행이 보유한 ETF는 장부가 기준 37조1808억 엔, 시가 기준으로는 작년 9월 말 현재 83조2000억 엔어치를 보유하고 있다.

일본은행은 작년 9월 장부가 기준 ETF를 연간 3300억 엔씩 처분하기로 결정했다. 주가 급락 같은 시장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시장 전체 매매대금에서 차지하는 ETF 매각대금 비중을 0.05% 정도로 잡았다. 우에다 총재는 “전부 처분하는 데 단순 계산으로 100년 이상 걸린다”며 “조금씩 진행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했다.

2012년 말 재집권한 아베 신조 총리는 2013년 디플레이션 탈출을 위해 일본은행을 통해 이른바 ‘바주카포 머니’를 쐈다. 무제한으로 국채를 매입해 장기 국채 금리 상승을 억제(YCC)하고 마이너스 금리를 도입했으며 ETF 매입까지 동원했다.

꿈쩍 않던 일본의 물가가 들썩이기 시작하자 일본은행은 금융 정상화의 길로 들어섰다. 2024년 3월 17년 만에 금리를 인상하며 2016년부터 이어온 마이너스 금리 정책을 폐기했다. 2024년 8월부터는 국채 매입 시 분기 단위로 월 매입액을 4000억 엔씩 줄이는 양적 긴축을 시작했다. 이제 ETF 매각까지 시작하며 질적 긴축에 나섰다.

그동안 일본은행이 ETF 매각에 쉽게 나설 수 없었던 것은 주가 하락 우려 때문이다. 그러나 닛케이지수가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자 ‘ETF를 팔아도 되겠다’는 판단이 섰다는 관측이 제기된다.

도쿄=김일규 한국경제 특파원 black0419@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