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수출 통계 체계인 MTI(수출입 품목 분류 체계) 코드를 손질한 것은 2019년 2차전지와 바이오헬스를 편입한 이후 6년 만이다. 이번 개편의 핵심은 ‘현실과의 괴리 해소’다. 그간 15개 품목 체제는 급변하는 산업 재편 속도를 통계가 따라가지 못한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새로 편입된 5대 품목(전기기기, 비철금속, 농수산식품, 화장품, 생활용품)은 현재 한국 경제의 가장 뜨거운 산업들이다. AI발 전력 수요 급증으로 변압기와 전선 등 전기기기 수출은 이미 지난해 전년 대비 8.2% 성장하며 전체 수출의 2%를 넘어섰다.
K푸드와 K뷰티 역시 단순한 유행을 넘어 국가 주력 먹거리로서의 체급을 갖췄다. 특히 반도체를 메모리와 시스템으로, 2차전지를 배터리와 소재로 분리 관리하기로 한 점은 공급망 통제력과 기술 격차를 정밀하게 관리하겠다는 정부의 의지로 풀이된다.
반도체 비중이 전체 수출의 46%를 넘어서며 역대 최고치를 경신 중이지만 특정 품목의 등락에 국가 운명을 맡긴 ‘천수답 경제’의 경직성을 해소해야 한다는 위기감이 반영된 결과다.
2024년 기준 한국의 세계 수출 1위 품목은 81개다. 5년 연속 세계 10위권을 유지했고 메모리 반도체는 5년 만에 정상을 탈환했다. 외형만 보면 제조 강국의 지위는 공고해 보이나 성적표를 뜯어보면 상황은 다르다.
1위 품목 중 37개는 10년 전에도 이름을 올렸던 제품들이다. 차량용 납축전지, 범용 철강재 등 전통 제조업 품목이 리스트의 상당수를 차지한다. 수출 지도가 신시장 개척보다 기존 영토 수성에 치중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81개라는 숫자가 혁신의 지표라기보다 과거의 성공에 갇힌 ‘박제된 성적표’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한국의 내년 잠재성장률을 사상 최저치인 1.57%로 전망했다. 반도체 호황에 따른 성장률 착시를 걷어내면 경제 기초체력은 급격히 저하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이번 MTI 개편은 반도체를 메모리와 시스템으로, 자동차를 파워트레인별로 세분화해 개별 관리하는 것이 핵심이다. 특정 품목의 호황에 가려진 부진 부문을 수치로 명확히 드러내고 산업별 전환 속도를 정밀하게 추적하는 데 목적이 있다. 신성장 엔진을 발굴하고 포트폴리오를 분산해 대외 변동성에 따른 경제 충격을 최소화하겠다는 포석이다.
이번에 새롭게 이름을 올린 5대 품목은 농수산식품, 전기기기, 비철금속, 화장품, 생활용품이다. 정부가 오는 6월 하반기 경제성장전략을 통해 방산, 바이오, K컬처를 반도체를 잇는 신성장 축으로 육성하겠다고 밝힌 가운데 이들 품목이 선제적으로 수출 지형을 넓히는 모양새다.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연간 수출 15억달러 고지를 처음 넘어선 라면의 약진이다. 한국 라면 수출액은 지난해 15억2100만달러를 기록하며 역대 최대치를 경신했다. 최근에는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K팝 데몬 헌터스’(케데헌) 속 노출 효과로 해외 시장의 품절 대란이 이어지고 있다.
농심은 미국 현지 협업 제품 출시와 함께 부산 녹산 수출전용 공장을 하반기 완공하며 연간 12억 개 생산 체제를 갖춘다는 방침이다. 삼양식품 역시 중국 자싱 공장의 생산 라인을 증설하며 ‘불닭’ 신화의 영토를 넓히고 있다.
전기기기는 북미 AI 데이터센터 인프라 특수의 수혜를 입었다. HD현대일렉트릭과 효성중공업은 초고압 변압기 분야에서 독보적 기술력을 앞세워 이미 5년치 이상의 수주 잔고를 확보했다. 특히 효성중공업은 미국 테네시 공장을 거점으로 북미 내 초고압 변압기 교체 수요를 선점하며 실적을 견인 중이다.
LS일렉트릭은 초고압을 넘어 배전반 및 중저압 전력기기 시장으로 보폭을 넓혔다. 북미 현지 배전 시스템 시장점유율을 공격적으로 확대하며, 변압기에서 배전으로 이어지는 전력망 수출의 수직계열화를 완성했다는 평가다.
AI 인프라와 전기차망에 필수적인 고효율 구리 제품 수출이 급증하며 산업 체질 개선의 핵심 주체로 부상했다. 과거 굴뚝산업으로 치부되던 비철금속이 이제는 첨단산업의 혈관 역할을 하며 반도체 외 전력을 보강하는 핵심 자산으로 떠올랐다.
양사는 올해 1분기 각각 매출 7800억원과 6800억원대를 기록하며 분기 기준 역대 최대 실적을 갈아치웠다. 미국과 중국 현지 고객사의 발주가 폭증하며 연매출 3조원 돌파 가능성까지 점쳐지는 상황이다.
특히 ‘바르는 화장품’의 영역을 넘어 뷰티 테크로 영토를 확장한 에이피알의 성장세가 가파르다. 에이피알은 올 1분기 매출 5934억원, 영업이익 1523억원을 기록하며 역대 최대 분기 실적을 경신했다.
미국과 유럽 시장을 겨냥한 뷰티 디바이스의 누적 판매량이 600만 대를 돌파하고, 해외 매출 비중이 90%에 육박하는 등 화장품이 단순 소비재를 넘어 기술 집약적 수출 품목으로 진화했음을 입증했다.
조선미녀, 아누아 등 인디 브랜드들이 북미 아마존 상위권을 점유하고 이를 ODM사와 테크 기업들이 기술력으로 뒷받침하는 구조가 안착하면서 화장품은 반도체 경기를 방어할 확실한 수익원으로 부상했다.
생활용품 분야는 문구·완구의 약진이 두드러졌다. 올 1분기 문구·완구 수출은 K팝 굿즈와 캐릭터 인기에 힘입어 전년 동기 대비 16.6% 증가한 7억8000만달러를 기록했다. 저출생으로 인한 내수 축소 한계를 K콘텐츠 기반의 해외 진출로 돌파하며 유망 소비재로서의 입지를 굳혔다는 평가다.
수출 품목을 20개로 늘린 것은 산업 포트폴리오 재편 작업일 뿐 엔진 자체를 바꾸는 혁신은 아니다. 20대 품목 체제가 단순한 장부 수정에 그치지 않으려면 ‘제조업의 서비스화’가 시급하다.
삼양식품의 라면이나 인디 브랜드의 화장품 수출을 단품 판매에 가두지 않고 디지털 콘텐츠와 결합한 ‘구독형 모델’로 진화시켜 브랜드 로열티를 현금화하는 전략 등이 대표적이다.
파괴적 혁신 기업의 배출은 더는 미룰 수 없는 과제다. 2024년 기준 한국은 81개 품목에서 세계 1위를 기록했으나 이 중 70%는 중간재와 부품에 쏠려 있다. 완제품 시장에서 글로벌 ‘톱5’에 이름을 올린 사례는 스마트폰과 자동차를 제외하면 극히 드물다.
기업 생태계의 역동성도 떨어진다. 미국 나스닥에서는 2000년대생 기업인 메타와 테슬라가 경제 주도권을 쥐고 엔진을 교체했다.
반면 한국은 1938년생 삼성과 1967년생 현대차가 여전히 양대 산맥을 형성하고 있다. 20세기 엔진으로 21세기 경주를 뛰는 형국이다.
6월부터 분리 신설되는 시스템 반도체와 바이오헬스 코드에서 미국의 테슬라나 메타 같은 게임체인저가 나오지 않는 한 산업 고령화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 산업계에서는 규제 장벽을 허물어 신규 5대 품목이 반도체에 버금가는 지속가능한 캐시카우로 안착하도록 정책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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