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강도 대출 규제로 은행 문턱까지 높아지자 주식시장에서 거둔 차익은 상급지 갈아타기와 첫 주택 매수 자금을 메우는 실탄(자금)이 되고 있다. 집값을 잡기 위해 키운 증시가 오히려 아파트 시장을 다시 달구는 모습이다.
◆종착지는 킹동산?
코스피가 8000선 고지를 바라보자 개인투자자들의 고민도 깊어졌다. “더 오를 때까지 들고 갈까, 지금 팔아서 집을 살까.”
부동산 투자자들이 모인 온라인 대화방에서는 “주식판에서 돈 복사가 일어난 뒤에는 결국 집값이 오른다. 다들 정신 차려야 한다”는 경고 섞인 목소리가 나온다. 증시로 몰린 돈이 결국 부동산으로 향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 블라인드에서 진행된 ‘주식으로 돈 벌면 집을 산다 vs 안 산다’ 설문조사 결과는 이러한 심리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참여자 103명 중 84%(87명)가 “상황을 봐서 사겠다”고 답하며 주식 수익을 부동산으로 옮길 가능성을 열어뒀다.
실제 경험담도 적지 않다. 부동산 커뮤니티 한 이용자는 “주식으로 번 돈을 전부 정리하고 은행과 회사 대출을 더해 서울 노원구 일대 아파트를 13억원에 계약했다”며 “언제까지 주식이 오를지도 모르고 결국 한국에서는 부동산이 가장 믿을 만한 자산, ‘킹동산’”이라고 적었다.
서울 마포구에 거주하는 또 다른 이용자는 “살고 있던 전셋집을 매매로 전환했다. 집값이 너무 올라 부담이 컸고 대출까지 막혀 막막했는데 그나마 ‘삼전닉스(삼성전자·SK하이닉스)’ 덕분에 숨통이 트였다”고 전했다.
주식을 팔아 아파트 매매 계약서에 도장을 찍는 배경에는 단순한 수익률 계산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한국에서는 부동산이 시간이 지나면 결국 오른다는 믿음이 여전히 강하다. 사는 곳의 위치와 아파트 브랜드는 개인의 사회적 위치를 보여주는 상징처럼 받아들여진다. 여기에 자녀 교육(학군)과 전월세 이동에 따른 잦은 전학을 피하려는 현실적인 고민까지 더해지면서 주식 투자로 얻은 수익은 다시 ‘내 집 마련’으로 향한다.
물론 시장 일각에서는 “대출을 많이 활용할 수 있던 부분이 부동산 투자의 메리트였는데 이젠 사라졌다”, “거주는 전·반전세로 해결하고 자금은 금융자산으로 굴리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다”라는 반론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자금 여력이 부족한 서민·중산층 투자자들에게 주식 차익은 서울 아파트 진입 장벽을 넘기 위한 ‘치트키’처럼 활용되고 있다. 상급지로 옮기려는데 2억~3억원이 부족한 1주택자나 청약 대신 매수를 택한 무주택자들에게 주식시장의 호황은 부족한 자금을 메워주는 ‘마지막 한 끗’ 역할을 하고 있다.
주식·채권 매각 대금이 가장 많았던 지난해 10월(5760억원)은 규제지역과 수도권에서 각각 15억원, 25억원을 초과하는 주택의 주택담보대출 한도를 4억원, 2억원으로 제한한 ‘10·15 대책’이 시행된 시기와 맞물린다.
실거주 목적이 강한 30대에서는 이런 흐름이 더 두드러졌다. 올해 1~2월 30대가 주식 등을 처분해 마련한 주택 매입 자금은 약 4992억원으로 전체 조달 금액의 4.6%에 달했다. 2020년 규제지역 내 자금조달계획서 제출이 의무화된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다.
자금은 주로 서울 핵심 입지로 향했다. 조사 기간 주식·채권 매각 자금이 가장 많이 흘러 들어간 곳은 서울 강남구였으며 강남·서초·송파 등 이른바 ‘강남 3구’에만 전체 자금의 약 38%가 집중됐다.
한국은행의 분석도 비슷하다. 최근 한국은행이 발표한 ‘우리나라 주식 자산효과에 대한 평가’ 보고서에 따르면 서울 아파트 매입 자금조달계획서 내 주식·채권 매각 대금 비중은 지난해 5월 4.9%에서 올해 1월 8.9%로 두 배 가까이 뛰었다. 보고서는 무주택 가계가 주식 투자로 얻은 자본이득의 상당 부분을 다시 부동산 매입에 활용하고 있다는 점을 짚었다. 무주택 가계는 주식으로 번 돈의 약 70%를 부동산 자산으로 옮긴 것으로 추정됐고 주식 수익률이 높은 가계일수록 유주택자로 전환될 가능성이 더 높았다. 주식을 통한 자산 증식이 결국 ‘내 집 마련’으로 향하고 있단 얘기다.
반면 이미 주택을 충분히 보유한 고액 자산가들은 추가 부동산 매입에 신중한 모습이다. 다주택 규제로 세금 부담이 커지면서 이들에게 부동산은 더 이상 ‘늘려야 할 자산’이 아니라 이미 충분히 보유한 자산, 혹은 관리해야 할 자산에 가깝다.
강남권의 한 부동산 관계자는 “다주택 매물을 정리한 자산가들이나 최근 주식으로 큰 수익을 낸 자산가들 모두 부동산 투자에 대해서는 관망하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강남 일대 프라이빗뱅커(PB)들도 비슷한 분위기를 전한다. 한 시중은행 PB는 “이미 주택을 충분히 보유한 데다 중과세 같은 정책 부담 때문에 추가 부동산 투자에는 관심이 크지 않다”며 “요즘 자산가들의 상담은 대부분 금융자산 운용에 집중된다”고 말했다.
상가 투자 역시 예외는 아니다. 또 다른 PB는 “서울 압구정·한남·성수 등 이른바 노른자위 입지를 제외하면 공실 리스크가 커 매력이 크게 떨어졌다”며 “기존 상가를 보유한 자산가들 사이에서는 오히려 ‘골칫거리’라는 푸념도 많다”고 했다.
실제 상가 시장의 분위기는 빠르게 식고 있다. 강남역 일대 한 부동산 관계자는 “사무실 공실률이 높아 임대인이 임차인에게 나가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한때 강남 대표 상권으로 꼽히던 가로수길도 분위기는 달라졌다. 2010년대 중후반만 해도 핵심 입지의 임대료는 3.3㎡당 100만원에 육박했지만 지금은 임대료를 크게 낮춰도 새 임차인을 찾기 쉽지 않다. 도심 주요 상권은 물론 아파트 단지 내 상가까지 빈 점포가 늘면서 ‘유령 상가’라는 말까지 나온다.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지난해 중대형 상가 공실은 전년보다 13.8% 증가했다. 소규모 상가는 8.1%, 집합상가는 10.4% 늘었다.
KB금융지주 산하 KB경영연구소의 ‘2025 한국 부자 보고서’ 역시 자산가들의 투자 시선이 부동산에서 금융자산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보고서에 따르면 ‘부자’의 기준으로 부동산 자산은 최소 50억원으로 설정됐지만 이는 2021년 이후 5년째 변함이 없었다. 반면 금융자산 기준은 2021~2022년 30억원에서 2025년 40억원으로 상향됐다.
KB경영연구소는 “코로나19 이후 글로벌 불확실성, 경기 변화, 지정학적 리스크, 산업 구조 변화, 물가상승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고 분석했다.
김태림 기자 ta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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