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호황에도 단가 인하 압박
전문가 "이익 분배보다 생태계 투자할 때"
TSMC는 구마모토현에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부었다. 2024년 가동을 시작한 구마모토 제1공장은 범용 D램을 생산하고 있고 170억달러(약 25조원)를 투자해 짓고 있는 제2공장은 3나노 공정의 첨단 반도체를 생산할 계획이다.
회로를 그릴 때 필수적인 화학 물질인 포토레지스트(감광액) 분야에서는 JSR, 도쿄오카공업 등이 글로벌 시장의 90% 이상을 점유하고 있으며 차세대 극자외선(EUV) 공정용 제품도 일본산 없이는 사실상 생산이 불가능하다.
회로를 깎아내는 식각공정에 쓰이는 고순도 불화수소 역시 스텔라케미파와 모리타화학 등이 전 세계 초고순도(12N) 시장의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초호황에도 단가 인하반면 한국은 생태계 구축에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올해 합산 영업이익 전망치가 500조원을 웃도는 대호황기임에도 소재부품업체와 진행된 공급 협상에서 작년에 이어 단가를 인하했다. 하락폭은 한 자릿수 수준인 것으로 알려졌다.
소부장 기업들이 미래 공정 전환을 위한 연구개발(R&D)에 재투자해야 할 재원이 매년 반복되는 납품 단가 인하 탓에 쌓이지 못하는 구조다.
한 소재 업체 임원은 “인건비와 물류비, 원자재 수입비가 오르는데도 하청업체의 단가를 매년 맹목적으로 인하하는 구조를 바꿔야 한국 소부장도 제대로 된 R&D 투자가 가능하다”고 지적했다.
최근 실적과 주가가 견조한 반도체 소부장 기업들은 국내 원청 의존도를 낮추고 해외 고객을 확보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리노공업은 미세 테스트 핀과 IC 테스트 소켓을 앞세워 수출 비중을 80% 안팎까지 끌어올렸다.
높은 수익성을 바탕으로 40%대 수준의 영업이익률을 유지하고 있다. 한미반도체는 고대역폭메모리(HBM) 후공정 장비인 TC 본더 수요를 타고 수출 비중을 80%까지 높였다. AI 반도체 투자 확대와 맞물려 실적이 개선되면서 국내 반도체 장비주 가운데 시가총액 상위권으로 올라섰다.
일부 기업은 특정 공정 장비나 부품에서 높은 기술 장벽을 앞세워 글로벌 고객사를 확보했다. HPSP는 수년간 50% 안팎의 높은 영업이익률을 기록 중이다. 글로벌 공급망에 올라탄 반도체 소부장 기업만이 생존할 수 있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구매를 바라보는 관점부터 바뀌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반도체 기업 영업 담당자는 “대기업의 핵심 성과지표(KPI)가 원가 절감에 맞춰져 있으면 소부장 국산화는 구호에 그칠 수밖에 없다”며 “품질, 연구개발, 국산화 기여도, 공급망 안정성을 함께 봐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의 소부장 국산화율은 소재 30%, 장비 10% 수준에 머물러 있다. 2019년 일본의 수출규제 이후 겉으로는 ‘소부장 국산화’를 외쳤지만 생태계가 이익을 쌓을 수 없는 구조에서 국산화는 제자리 걸음 중이다.
소부장 생태계 키울 '골든타임'이러한 기형적 구조는 한국 제조업의 과거 성공 방식에 기인한다. 전병서 중국경제금융연구소장은 “한국은 가전, 자동차, 조선 등 완제품을 빨리, 싸게, 많이 만드는 ‘조립·가공 산업’을 중심으로 성장했다”며 “이 과정에서 기술혁신보다는 협력업체의 단가 인하를 통한 원가 절감에 초점이 맞춰졌다”고 분석했다.
시장을 주도하는 ‘슈퍼을(乙)’을 직접 육성하고 파트너로 대우하는 미국 빅테크나 대만 TSMC의 생태계 전략과는 거리가 멀다. 한국 반도체 소부장의 질적 성장 역시 중요하다는 의견도 있다. 소재나 부품의 기반이 되는 뿌리는 대부분 미국과 일본이 가진 특허 기술이다.
한 소부장 업계 관계자는 “기존 기술을 베껴서 ‘더 싸게’ 납품하는 게 소부장 업체의 생존 방식이었다”며 “혁신 기술을 개발하려면 R&D 비용이나 기술 투자 비용이 있어야 하는데 해외 판로를 개척해 마진율을 높이지 않으면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고백했다.
전문가들은 반도체산업 호황에 따른 이익 분배를 고민할 시점이 아니라 소부장 생태계를 강화해야 할 때라고 입을 모은다.
전 소장은 “이번 반도체 호황은 실력이 아니라 AI 수요 폭발이라는 외부적 요인이 맞물린 결과”라며 “원청 대기업이 강하고 현금이 넘쳐나는 지금이야말로 소부장 생태계에 투자할 수 있는 골든타임”이라고 말했다.
그는 특히 “2나노 이후 1.4나노 공정 경쟁에서는 기존 미세화만으로는 한계가 뚜렷해진다”며 “차세대 소재와 장비, 공정 기술을 뒷받침할 국내 소부장 생태계가 약하면 한국 반도체의 약한 고리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김영은 기자 kye0218@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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