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비즈니스, 제주서 ‘2026 제주 애널리스트 포럼’ 개최
그러나 최근 이들의 고민은 그 어느 때보다 깊다. 제도권이라는 엄격한 규제의 테두리 밖에서 정교한 데이터와 복잡한 밸류에이션 논리보다 투자자들이 듣고 싶어 하는 자극적인 ‘사이다 발언’을 무기 삼은 비제도권 콘텐츠들이 시장을 지배하기 시작하면서다.
전문가들은 시장이 혼탁해질수록 중심을 잡을 진짜 전문가와 신뢰의 마지막 보루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한경비즈니스는 지난 5월 29일 제주 히든클리프호텔에서 ‘리서치의 품격: 제도권의 위기와 새로운 이정표’를 주제로 한 ‘2026 제주 애널리스트 포럼’을 개최했다. 자극적인 콘텐츠가 논리를 압도하는 비제도권 시장의 공세 속에서 제도권 리서치가 나아가야 할 올바른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증권사 리서치센터장과 애널리스트들을 초청해 특별 세션을 마련했다. “장기적 관점의 애널리스트 기다려달라”
이날 연사로 나선 기금운용본부 운용전략실의 정경희 전략리서치 팀장은 “금융시장에서 가장 중요한 단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 금융에 종사하는 전문가, 즉 ‘사람’”이라며 “애널리스트는 투자를 움직이는 동력인 정보와 논리를 제공하며 투자의 시작점에서 빼놓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정 팀장은 기금운용본부에서 근무하며 국내 증권사 리서치센터와 애널리스트들로부터 얻은 세 가지 핵심 자산으로 ‘보고서’, ‘세미나’, ‘요청자료’를 꼽았다.
정 팀장은 먼저 애널리스트의 리서치 보고서가 가진 세 가지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데이터 분석과 금융시장 해석, 근거와 전망이다. 그는 “하루하루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숫자로 기준을 삼고 오랜 기간을 기다릴 수 있는 능력은 견고한 데이터 분석에서 나온다”며 “데이터가 정확하고 근거가 충분할 때 주는 신뢰감과 안정감은 무엇보다 크다”고 설명했다.
또한 기회와 리스크, 펀더멘털, 밸류에이션, 센티먼트 등 주요 요인을 다각도로 해석하는 애널리스트의 분석적 시각을 ‘배울 수 있는 무형의 자산’이라고 표현하며 “독립적인 시각으로 내놓은 근거와 전망을 통해 시장의 가장 중요한 동인과 변수를 확인할 수 있다. 국민연금은 보고서 그 자체만으로도 큰 도움을 얻고 있으며 이를 통해 애널리스트와 대화하고 신뢰를 쌓아가고 있다”고 전했다.
직접 만나 소통하는 ‘세미나’는 대규모 포트폴리오를 운용하는 기관의 운용역들과 애널리스트가 서로의 관심사를 공유하고 함께 호흡하는 소중한 기회가 된다고 짚었다.
이 대목에서 정 팀장은 리서치센터장들을 향해 진심 어린 당부의 말을 전하기도 했다. 그는 “국민연금처럼 큰 규모의 자산을 고민하는 운용역의 관심사는 일반 투자자들에게 주목받지 못할 수 있고 들인 시간과 노력에 비해 대중의 관심이 적을 가능성도 크다”고 언급했다. 그러면서 “많은 사람이 알아주지 않아도 장기적인 관점에서 깊은 고민을 하며 묵묵히 시장을 들여다보는 애널리스트가 있다면 센터장님들께서 조금 더 관심을 가져주시고 조금 더 기다려 주셨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정 팀장은 애널리스트들과 소통하며 ‘일상에 리서치 습관’을 지니게 된 점을 리서치와 함께하며 얻은 최고의 환경적 자산으로 꼽았다. 그는 “시장을 보고, 기사를 읽고, 데이터를 분석하고 판단하는 리서치로 일과를 시작하는 업무 습관은 금융시장에 들어온 이래 변치 않는 기본이자 일상생활에도 큰 도움이 된 자산”이라며 “리서치를 통한 투자 습관이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환경이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이어 “빠르게 변화하는 금융 환경 속에서 증권 리서치의 중요성은 한결같다. 그 누구보다 변화에 민감하고 빠르게 적응하는 리서치 조직의 곁에 함께 성장하고 함께 변화하는 국민연금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달라”고 덧붙였다. “리포트 무단 활용·인력 이탈”…현실적 고뇌2부에서는 이홍표 한경비즈니스 편집장이 좌장을 맡아 ‘제도권의 위기와 새로운 이정표’를 주제로 본격적인 패널 토론을 이끌었다. 토론에는 국민연금의 정경희 팀장을 비롯해 황승택 하나증권 리서치센터장, 조수홍 NH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 신중호 LS증권 리서치센터장이 패널로 참여해 리서치센터가 마주한 거대한 패러다임 변화와 생존 전략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황승택 하나증권 센터장은 최근 몇 년간 급격히 진행된 세 가지 변화로 리테일 서비스 수요 급증, 무단 저작권 침해, AI 도입을 꼽았다. 황 센터장은 특히 “유튜버들이 제도권의 리포트를 무단으로 활용하며 사익을 추구하는 행위에 대해 실질적인 제재가 없다”고 꼬집었다. 애널리스트들의 지식재산권인 저작물이 무분별하게 왜곡·인용되면서 리서치 하우스가 하지 않은 분석이나 발언으로 오인을 받아 역으로 허위 민원 폭탄에 시달리는 등 현장의 피해가 막심하다는 지적이다. 그는 또 AI 도입을 ‘인력 대체 및 비용 효율화’ 관점으로만 접근하는 일각의 흐름에 대해서도 아쉬움을 표했다.
조수홍 NH투자증권 센터장 역시 미디어 환경 변화와 투자자들의 단기 성향 심화를 위기 요인으로 진단했다. 조 센터장은 “최근 2년 새 ETF 시장이 300조 이상 급성장하고 패시브 수급이 강해지다 보니 긴 호흡으로 산업을 분석하는 가치가 예전보다 낮아지고 있다”며 “과거 특정 2차전지 사태처럼 상식을 넘어선 공격이 이어지면 애널리스트들은 결국 안전한 선택을 하게 되고 리서치의 질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우려했다. 그는 “좋은 리서치는 하루아침에 나오지 않으며 오랜 관찰과 시행착오가 축적되어야 한다”며 이를 조직과 시장 전체가 보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신중호 LS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사람과 시간’에 대한 투자가 지켜지지 못하는 구조적 한계를 짚었다. 신 센터장은 “영업 부서와 달리 리서치는 지표가 객관화되지 않아 매니지먼트의 판단에 따라 존재 자체가 흔들리기 쉽다”며 “최근 들어 보상에 비해 리스크가 커지는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특히 중소형 증권사는 비용 제약 속에서 신입을 영입해 1~2년 넘게 키워놓으면 조금 뜨자마자 대형사로 이탈해 버리는 악순환이 반복된다”고 털어놓았다. 이에 신 센터장은 언론사나 국민연금 같은 평가 기관을 향해 “호흡을 길게 가져가며 장기적인 인사이트를 가진 애널리스트가 우대받는 평가 제도의 보완이 필요하다”는 제안을 던졌다.
이홍표 편집장은 “과거 국책연구소나 대기업 싱크탱크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지금, 대한민국 경제의 유일한 ‘싱크탱크’ 역할을 고수하는 곳은 증권사 리서치센터뿐”이라며 “척박한 환경이지만 자부심을 가지고 리서치의 가치를 지켜달라”고 격려했다. “단기 대응은 AI…‘미래에 가장 먼저 도착하라’”
홍 대표는 스스로를 “국회와 행정부에서 애널리스트 보고서를 가장 많이 본 사람 중 하나”라고 소개하며 과거 의정 활동 시절의 일화를 공유했다. 그는 “국회에서 일반적으로 스크랩 자료를 활용할 때 나는 애널리스트들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정밀한 그래프를 그려 원인과 결과를 짚어내니 타 의원실에서 비결을 배우러 오곤 했다”며 “여러분이 만드는 자료와 업무들이 나라 전체의 정책적 시각을 바꾸고 미래를 비추는 등대 역할을 하고 있으니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고 후배들을 격려했다.
홍 대표는 최근 비제도권의 공세와 시장의 오해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후배들을 위로하며 40년 여의도 경험을 바탕으로 대한민국 리서치의 역사를 생생하게 복기했다. PC가 보편화되지 않았던 1980년대 중반 200일이동평균선을 구하기 위해 대형 노트에 날짜별 시가·종가·거래량을 적어가며 매일 수작업으로 계산하던 막내 시절의 고충을 털어놓았다. “회사마다 계산이 조금씩 달라 점심 때 증권사 막내들이 모여 합의를 보던 시절이었다”며 모눈종이에 주요 종목의 10년치 차트를 직접 그려서 들고 다녔다고 회고했다.
이후 1992년 자본시장 개방과 함께 본격적인 섹터 애널리스트 시대가 열렸으나 IMF 외환위기 직전까지 시장은 제도적으로 미비하고 부작용도 많았다. 홍 대표는 “1990년대 중후반은 자본시장의 체계가 잡히기 전이라 이른바 ‘투기성 작전세력’이 시장을 교란하는 경우가 허다했다”며 당시 시장의 혼탁함을 짚었다. 그는 근거 없는 유언비어로 특정 제조 기업의 주가를 수십 배씩 끌어올린 뒤 부도로 이어지게 만들었던 사례 등을 언급하며 “IMF 이전의 금융 시장은 체계적인 리서치 분석보다는 철저히 정보 비대칭성에 의해 움직이던 혼돈의 시기였다”고 평가했다.
강연의 하이라이트는 최근 리서치 업계를 위협하고 있는 온라인상의 왜곡된 정보와 대중의 ‘확증 편향’에 대한 조언이었다. 홍 대표는 “AI 알고리즘이 사용자가 보고 싶은 정보만 선별해 보여주다 보니 대중의 편향성이 극도로 강해졌다”며 “한국은 인구당 온라인 동영상 및 소셜미디어 집중도가 비정상적으로 높은 편에 속한다”고 분석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일부 온라인 인플루언서들이 왜곡된 정보를 확산시키고 이에 동조한 대중이 애널리스트들을 공격하는 현상이 발생한다는 설명이다. 홍 대표는 이를 ‘탈진실(Post-truth)의 시대’로 규정했다.
특히 특정 기술주나 배터리 광풍을 타고 시장을 교란했던 일부 유튜버들의 행태를 강하게 비판했다. 홍 대표는 “온라인상에서 음모론을 퍼뜨리며 시장의 신뢰를 깎아내리는 이들은 결국 미디어 권력에 중독된 것에 불과하다”고 직격을 날렸다. 이어 “과거 이러한 행위가 극에 달했을 때 관련 유튜버들의 증거 자료를 취합해 당국에 강력한 조치를 요구하기도 했다”며 가짜 정보 근절을 위한 사회적 담론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홍 대표는 해외의 극단적인 음모론 사례들을 예로 들며 “거짓 정보도 자꾸 반복되고 거대해지면 대중은 이를 사실로 오인하게 된다”며 “최근 소신 있게 매도 의견을 냈다가 소송을 당하는 등 애널리스트들의 고충이 크지만 온라인상의 일시적인 공격에 심리적으로 위축될 필요가 전혀 없다”고 후배들을 다독였다.
홍 대표는 향후 리서치 환경이 대전환기를 맞이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AI의 등장으로 인해 “더 이상 과거 방식의 인과관계 분석에만 매달릴 필요가 없어졌으며 기존에 학자들이 만들던 공식과 랜드마크는 무의미해졌다”는 지적이다. 그는 “우리가 알고 있는 기존의 금융 상식이 완전히 바뀌고 있다”는 점을 거듭 강조하며 애널리스트들이 눈앞의 지표나 단기 대응에만 매몰되는 것을 경계했다.
그가 제시한 돌파구는 ‘장기적 인사이트’와 ‘사회과학’이다. 홍 대표는 “시니어가 될수록 깊이 있는 사회과학 서적을 바탕으로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며 “넓은 시야로 패러다임의 변화를 읽어내는 철학을 가져야 비제도권과의 확실한 차별성을 가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동시에 현재의 척박한 리서치 환경에 위축된 후배들을 향한 따뜻한 격려도 잊지 않았다. 그는 과거 함께 일했던 동료들이 대기업 임원이나 IR 팀장 등으로 영입돼 맹활약하는 사례를 들며 “리서치 하우스에서 쌓은 역량은 자본시장 안팎 어디서든 통하는 강력한 무기이며 갈 수 있는 길은 무궁무진하다”고 다독였다. 다만 이를 위해선 과거의 상식에 안주하지 않는 ‘멈추지 않는 공부’를 당부했다. 홍 대표는 “애널리스트의 시선은 과거가 아닌 항상 미래를 향해 있어야 한다”며 “미래에 가장 먼저 도착하는 사람은 애널리스트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한경매거진앤북이 주최한 ‘2026 제주 애널리스트 포럼’은 제주에서 5월 29일부터 30일까지 양일간 열렸다. 김지영 교보증권 리서치센터장, 노근창 현대차증권 리서치센터장, 신중호 LS증권 리서치센터장, 이승우 유진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 조수홍 NH투자증권 리서치본부장, 최현재 유안타증권 리서치센터장, 황승택 하나증권 리서치센터장(가나다순) 등 주요 증권사 리서치센터장과 애널리스트 30인이 참석했다.
행사를 주최한 서정환 한경매거진앤북 대표는 “리서치의 품격은 자본시장이 지켜야 할 가장 강력한 무기이자 마지막 보루”라며 “이번 포럼이 어떤 흔들림 속에서도 사실과 논리로 투자자의 신뢰를 지켜내는 단단한 이정표를 만드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정채희 기자 poof34@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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