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눈·굳은살은 면책 피부질환에 해당”
전소 기판력 법리 오해는 지적
이 사건은 보험계약의 반사회성과 면책조항 해석, 그리고 확정판결의 기판력 차단 요건이라는 세 가지 쟁점이 맞물린 복합 사건이다.
월수입 절반을 보험료로
1984년생 A 씨는 2016년 7월 B사와 질병으로 수술받을 경우 1회당 30만원을 지급받는 내용의 건강보험계약을 체결했다. A 씨는 이미 2013년부터 이 사건 보험계약을 포함해 총 26건의 보험계약에 가입해 있었고 월 납입 보험료 합계는 약 133만원에 달했다.
A 씨의 주된 수입은 편의점·건강식품 판매 아르바이트로 최대 월 300만원 수준이었다. 2012년부터 2021년까지 종합소득세나 근로소득세를 납부한 이력도 없었다. 월수입의 절반에 가까운 금액을 보험료로 납입한 셈이다.
A 씨는 2016년 9월부터 2020년 11월까지 여러 병원에서 티눈·굳은살 제거를 위한 냉동응고술을 379회 받고 B사에 보험금을 청구했다. B사는 이 중 114회분에 대해 합계 약 3493만원을 지급했으나 나머지는 거절했다.
B사는 이에 앞서 2017년 별도 소송을 제기해 보험계약 무효 확인과 기지급 보험금 반환을 구했으나 항소심까지 모두 패소했고 2020년 2월 판결이 확정됐다(이하 ‘전소 판결’). 당시 법원은 “A 씨가 보험금을 부정 취득할 목적으로 계약을 체결했다고 인정하기에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전소 변론종결일인 2020년 1월 8일 이후 A 씨의 수술 횟수는 급격히 늘었다. 2020년 73회, 2021년 414회, 2022년에는 무려 1150회에 달했다. A 씨가 다른 보험사들로부터 받은 보험금도 J사로부터 약 103억8000만원, I사로부터 약 50억2500만원에 이르렀다.
A 씨의 아버지 P 씨도 2021년 3월경 티눈·굳은살을 이유로 한 보험사에 3480만원, 또 다른 보험사에 1억5120만원의 보험금을 청구한 사실도 기록에 남아 있다.
이 사건에서 A 씨는 본소로 2017년 10월부터 2018년 12월까지의 냉동응고술에 대한 미지급 보험금 8250만원을 청구했고 B사는 반소로 보험계약이 무효이거나 면책조항이 적용된다며 기지급 보험금 약 3493만원의 부당이득반환을 구했다.
“판결 한 번 이겼다고 끝이 아니다”
서울중앙지방법원 항소심은 2025년 11월 두 가지 근거를 병렬로 제시하며 B사 손을 들었다.
우선 재판부는 전소 변론 종결 이후 A 씨가 수술을 폭발적으로 늘리고 다액의 보험금을 청구·수령한 사실은 전소 판결과 모순되는 사정변경에 해당하므로 기판력이 차단되고, 법원은 이 사건 보험계약이 민법 제103조에 따라 무효인지 다시 판단할 수 있다고 봤다.
그리고 보험계약 체결 당시부터 보험금을 부정 취득할 목적이 있었다고 추단했다. 또 설령 계약이 유효하더라도 티눈·굳은살은 이 사건 약관 면책조항의 피부질환에 해당하므로 B사는 보험금 지급 의무가 없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먼저 기판력 법리에 관해 원심이 잘못 판단했다고 밝혔다. 기판력이란 확정된 판결의 판단이 이후 소송에서도 구속력을 갖는 효력을 말한다.
전소 소송물과 동일한 후소를 허용하지 않음은 물론 전소의 판단이 후소의 선결문제가 되거나 양자가 모순관계에 있을 때에도 후소에서 전소 판결과 다른 주장을 할 수 없다. 다만 전소 변론 종결 후 새로 발생한 사실관계로 전소 판결과 모순되는 사정변경이 있는 경우에는 기판력이 차단된다.
원심은 A 씨가 전소 변론 종결 이후 수술 횟수를 급격히 늘리고 다액의 보험금을 청구·수령한 사실이 바로 이러한 사정변경에 해당한다고 봤다.
그러나 대법원은 이 판단을 정면으로 뒤집었다. 기판력을 차단하는 사정변경은 어디까지나 새로운 사실관계의 발생을 의미하는 것이지 기존 사실관계에 대한 새로운 증거자료나 새로운 법적 평가가 생긴 것은 이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소 변론 종결 이후 A 씨의 추가 수술·보험금 청구는 아무리 그 규모가 크더라도 결국 A 씨가 보험계약 체결 당시 부정 취득 목적을 가지고 있었는지라는 기존 쟁점에 관한 새로운 증거자료에 불과하다고 봤다.
대법원은 나아가 그러한 사후 사정만으로 2016년 7월 계약 체결 당시 부정 취득 목적이 있었다고 단정하기도 어렵다고 덧붙였다.
어느 법률행위가 민법 제103조에 의해 무효인지는 그 행위가 이뤄진 때를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기존 대법원 법리(2015다200111 전원합의체 판결)에도 부합하는 결론이다.
따라서 B사가 이 사건에서 보험계약 무효를 주장하는 것은 전소 판결의 기판력에 저촉되어 허용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법리는 고쳤지만 결론은 유지
그러나 대법원은 이 법리 오해가 판결 결과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결론지었다. 원심이 제시한 두 번째 근거, 즉 면책조항 판단이 독자적으로 유효하기 때문이다.
대법원은 티눈·굳은살이 이 사건 면책조항에서 정한 피부질환에 해당하므로 냉동응고술에 대한 B사의 보험금지급 의무가 없다는 원심 판단이 정당하다고 수긍했다.
A 씨 측이 주장한 작성자 불이익 원칙(불명확한 약관은 보험사에 불리하게 해석해야 한다는 원칙)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사마귀와 티눈에 동일한 수가 기준을 적용하고 있는 점, 그리고 A 씨가 근본 치료나 재발 방지 조치 없이 보존적 치료인 냉동응고술만을 의도적으로 낮은 강도로 반복해 받아온 점이 오히려 티눈을 심각한 질환으로 볼 수 없음을 방증한다고 봤다.
결과적으로 A 씨의 본소 청구는 기각되고 B사의 반소 청구 중 2017년 5월 31일 이후 냉동응고술에 대한 기지급 보험금 부당이득반환 부분이 인용됐다.
한편 피고 B사로부터 이 사건 보험계약 관련 채권을 양수했다고 주장하며 대법원에 참가 신청을 한 C사에 대해서는 법률심인 상고심에서 승계인의 소송 참가는 허용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신청을 각하했다.
[돋보기]
기판력 차단 요건 못 박은 대법원
이 사건은 보험 분야에서 확정판결 이후 재도전이 가능한 요건을 정밀하게 재정리했다. 대법원은 아무리 극단적인 추가 청구 사실이 있더라도 그것이 계약 체결 당시 부정 취득 목적을 뒷받침하는 새로운 증거자료에 그친다면 기판력을 차단하는 새로운 사실관계로 볼 수 없다는 선을 명확히 그었다.
보험사 입장에서는 기판력의 장벽을 넘으려면 단순히 ‘이후에 더 많이 청구했다’는 사실을 넘어 전소 변론 종결 이후에 성질 자체가 달라진 새로운 행위 사실을 구체적으로 특정해야 한다는 점이 명확해졌다.
면책조항 해석에서 심평원 수가 기준이 법원 판단의 실질적 근거로 명시적으로 활용된 점도 유사 분쟁에서 주목할 대목이다. 피부질환 관련 면책조항을 둘러싼 향후 분쟁에서 심평원 기준이 하나의 유력한 잣대로 기능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아울러 A 씨 아버지 P 씨의 유사 청구 사실이 판결문에 명시적으로 기재된 점도 눈길을 끈다. 법원은 이를 A 씨의 보험금 부정 취득 목적을 뒷받침하는 간접사실의 하나로 언급했다.
향후 가족 단위의 조직적·반복적 보험금 청구 사건에서 개인의 청구 행태뿐 아니라 가족 구성원의 동종 청구 패턴까지 종합적으로 고려되는 판단 구조가 자리 잡을 가능성이 있다.
허란 한국경제 기자 wh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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