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볼 때는 그저 SF영화다운 선문답처럼 들렸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이 장면은 초능력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을 다루는 방식에 관한 은유였음을 알게 됩니다.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은 많습니다. 시장을 이기려는 기업도 많습니다. 그러나 끝내 살아남는 쪽은 대개 외부의 숟가락을 억지로 구부리려는 이들이 아니라 자기 내부의 구조와 인식부터 바꾸는 이들입니다.
최근 나스닥에 입성한 이탈리아 테크 기업 벤딩스푼스(Bending Spoons)가 흥미로운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회사 이름부터 ‘매트릭스’의 그 장면에서 따왔습니다. 출신부터가 반전입니다. 실리콘밸리가 아니라 이탈리아 밀라노, 테크보다는 패션과 디자인으로 기억되는 도시입니다. 2013년 다이어리 앱 하나를 만들다 실패한 창업자들이 청산하고 남은 돈 4만달러로 다시 세운 회사입니다. 그 회사가 지난 7월 1일 상장 첫날 공모가 대비 40% 급등하며 시가총액 257억달러, 우리 돈 약 35조원을 찍었습니다. 올해 소프트웨어 기업 IPO 중 최대 규모입니다.
더 흥미로운 것은 이 회사가 ‘숟가락을 구부리는 법’을 말로만 외친 기업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들은 시장의 유행을 좇지 않았습니다. 생성형 AI라는 가장 뜨거운 무대 한가운데서 모두가 새 회사를 만들고, 새 서비스를 띄우고, 새 이야기를 팔 때 벤딩스푼스는 거꾸로 낡은 이름들을 사들였습니다.
에버노트, 위트랜스퍼, 비메오, 이벤트브라이트, AOL. 한때 인터넷과 모바일 시대를 풍미했지만 지금은 성장의 곡선이 무뎌진 브랜드들입니다. 어떤 것은 잊힌 이름이 됐고, 어떤 것은 충성 이용자는 남아 있지만 더 이상 시장의 상상력을 자극하지 못하는 서비스가 됐습니다. 벤딩스푼스는 바로 그런 자산을 사들였습니다. 시장이 지나간 자리, 벤처캐피털의 조명이 꺼진 자리, 창업자의 신화가 바랜 자리에 들어간 것입니다.
겉으로 보면 ‘디지털 사모펀드’에 가깝습니다. 낡은 소프트웨어 회사를 사서 비용을 줄이고 조직을 손보고 수익성을 끌어올립니다. 실제로 인수 이후 대규모 인력 감축과 과감한 조직개편이 뒤따랐고, 이 때문에 비판도 적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벤딩스푼스의 이야기를 단순한 구조조정 성공담으로만 읽으면 핵심을 놓칩니다. 이 회사가 시장에 던진 진짜 질문은 따로 있습니다. 혁신은 반드시 세상에 없던 것을 발명하는 데서만 오는가. 이미 존재하지만 제대로 관리되지 못한 자산을 다시 읽고 다시 조립하는 것도 혁신이 아닌가.
지난 10여 년간 기술 시장을 지배한 언어는 성장성이었습니다. 이용자를 모으면 된다. 매출을 키우면 된다. 적자는 나중 문제다. 시장을 선점하면 언젠가 이익은 따라온다. 저금리 시대에는 이 문법이 통했습니다. 돈은 싸고 시간은 길었습니다. 미래의 현금흐름을 현재로 끌어와 높은 밸류에이션을 붙이는 일이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고금리와 불확실성의 시대가 길어지면서 시장의 질문이 바뀌었습니다. 얼마나 빨리 커지는가보다 얼마나 단단히 남기는가가 중요해졌습니다. 얼마나 많은 이용자를 데려왔느냐보다 그 이용자에게서 얼마나 지속가능한 현금흐름을 만들 수 있느냐가 중요해졌습니다. 이제 자본시장은 꿈만으로 값을 쳐주지 않습니다. 꿈을 이익으로 바꾸는 능력, 즉 생산성을 요구합니다.
벤딩스푼스가 건드린 지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들은 낡은 서비스를 사들인 뒤 브랜드의 껍데기만 바꾸지 않았습니다. 제품 구조를 손보고 가격 체계를 바꾸고 구독 모델을 강화하고 엔지니어 중심의 운영 체계를 이식했습니다. 여기에 AI를 붙여 개발과 운영의 효율을 끌어올렸습니다.
낡은 자산에는 대개 두 가지 얼굴이 있습니다. 하나는 피로감입니다. 오래됐고 느리고 매력이 떨어진다는 인상입니다. 다른 하나는 축적입니다. 수년 또는 수십 년 동안 쌓아온 이용자, 브랜드 인지도, 데이터, 사용 습관, 결제 관계입니다. 벤딩스푼스의 포트폴리오에는 지금도 월 5억 명의 이용자와 900만 명의 유료 구독자가 살고 있습니다. 많은 기업은 앞의 얼굴만 보고 낡은 자산을 버립니다. 벤딩스푼스는 뒤의 얼굴을 봤습니다. 창업보다 인수가, 발명보다 재조립이, 외형 성장보다 운영 개선이 더 높은 수익률을 낼 수 있는 구간을 찾아낸 것입니다.
여기서 기업들이 읽어야 할 대목이 있습니다. 요즘 많은 경영자가 말합니다. 새 성장동력이 보이지 않는다고. 신사업이 없다고. 젊은 소비자를 잡기 어렵다고. AI를 해야 한다는데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지만 어쩌면 문제는 바깥에 있는 숟가락이 아닐지 모릅니다.
‘매트릭스’의 소년은 숟가락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경영의 세계로 옮겨오면 이렇게 바꿔 말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낡은 회사는 없다. 낡은 방식으로 운영되는 회사가 있을 뿐이다.
아, 그러고 보니 저도 한때 유료구독까지 했던 에버노트 계정 하나를 묵혀두고 있습니다. 10년 전 취재 메모가 가득한, 그러나 오랫동안 열어보지 않은 계정입니다. 망했다고 생각했던 그 서비스가 대서양 건너에서 35조원짜리 회사의 자산이 되어 돌아온 것을 보며, 낡았다고 믿었던 것들의 가치를 다시 계산해보게 됩니다. 에버노트에 다시 한번 접속해보려 합니다.
이홍표 한경비즈니스 편집장
© 한경매거진&북,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