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원식의 법으로 읽는 세상]
[법으로 읽는 세상]
이번 상장의 구조는 이렇다. 신주 최대 1779만 주, 발행주식의 약 2.5%를 원주로 삼아 ADR을 발행하고 조달 자금은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와 청주 첨단 패키징 공장, EUV 장비 투자에 쓴다. 인공지능 메모리 패권 경쟁의 실탄으로는 더할 나위 없는 선택이다. 문제는 자금이 아니라 관할이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에 증권을 등록하는 순간 SK하이닉스는 미국 증권법상 ‘발행인(issuer)’이 된다. 발행인이 되면 해외부패방지법(FCPA·Foreign Corrupt Practices Act)이 전면 적용된다.
이 법의 사정거리는 미국 영토가 아니라 회사 전체다. 세계 어느 사업장의 임직원이나 대리인이 외국 공무원에게 부적절한 이익을 제공하면 미국 법무부와 SEC가 직접 제재할 수 있다.
더 무서운 것은 회계·내부통제 조항이다. 뇌물이 없어도 장부 기재가 부실하다는 이유만으로 거액의 제재금이 부과된 사례가 적지 않다. 여기에 사베인스-옥슬리법에 따른 내부통제 인증 의무, ADR을 매수한 미국 투자자들이 원고가 되는 증권 집단소송 위험이 더해진다. 공시 의무 역시 가볍지 않다. 첨단 반도체는 이미 안보 자산이 된 만큼 미국 투자자 보호라는 이름으로 요구되는 공시가 우리 산업의 민감 정보에 닿을 수 있다.
우려의 핵심은 규제 그 자체보다 규제가 만들어내는 지렛대다. 미국 정부는 자국 시장에 상장한 기업에 대해 상장폐지와 조사, 제재라는 강력한 수단을 쥔다. 주주 기반이 미국으로 이동하면 경영 판단의 준거도 함께 이동할 수 있다. 배당과 투자처, 고객 우선순위를 정하는 국면에서 한국 주주와 한국 고객의 이익이 미국 주주와 미국의 국익 뒤로 밀리는 상황을 배제하기 어렵다.
물론 반론에도 상당한 근거가 있다. TSMC는 1997년부터 뉴욕증시에 ADR을 유지하면서도 세계 파운드리 정상에 올랐다. 미국법의 관할에 들어가는 것이 곧 종속을 뜻하지는 않는다는 실증이다.
외국 민간 발행인에게는 위임장 규칙과 내부자 단기매매차익 반환 의무가 면제되고 본국 지배구조 기준의 준수가 허용되는 등 완화된 규율이 적용된다. 엄격한 공시와 내부통제가 오히려 지배구조 신뢰를 높여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에 기여한다는 시각도 경청할 만하다. 그러나 이 반론이 성립하려면 전제가 있다. 준비된 회사여야 한다는 것이다. TSMC의 안정은 수십 년에 걸쳐 축적한 준법 체계 위에서 가능했다.
결국 물어야 할 것은 상장의 가부가 아니라 준비의 정도다. 45조원의 편익은 분명하지만 그 편익은 FCPA 준법 체계, 글로벌 회계·내부통제, 공시 통제와 소송 대비, 그리고 국내 주주 보호 장치라는 비용을 치른 뒤에야 온전히 우리 것이 된다.
이사회는 조달 규모만이 아니라 법적 비용을 함께 계량했는지 스스로 답할 수 있어야 하고 감독당국은 국내 상장 주식과 ADR 사이에서 한국 주주가 소외되지 않도록 제도적 균형을 살펴야 한다. 나스닥의 초대장은 이미 도착했다. 청구서를 읽고 서명하는 것은 이제 우리의 몫이다.
추원식 법무법인 YK 대표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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