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부터 48년 간 시청역 앞서 구두닦이·수선한 김정원 씨
세월 흐르며 노하우 쌓아···한창 땐 직원 두며 수백 켤레 단골손님도
김정원 씨 "잘 고쳐줘 고맙다 손님 한 마디가 뿌듯"

1978년 대한민국 산업화가 한창이던 시절, 서울 시청 앞에는 양복에 넥타이, 반짝이는 구두가 직장인의 '기본 복장'이었다. 그때부터 48년 동안 같은 자리에서 구두를 고쳐온 사람이 있다. 시청역 12번 출구 앞 '구두대학병원' 원장 김정원(73)씨다. 구두를 살리는 손끝으로 두 아들을 키워냈고, 지금도 매일 아침 8시면 어김없이 '병원' 문을 연다. 그의 48년 이야기를 들어봤다.
48년 동안 같은 자리에서 서울 시청 앞에서 '구두대학병원' 을 운영해 온 원장 김정원 씨
48년 동안 같은 자리에서 서울 시청 앞에서 '구두대학병원' 을 운영해 온 원장 김정원 씨
'구두대학병원'이라는 이름부터 눈길을 끕니다. 어떻게 탄생했나요.
"중구청에서 허가를 내 줄때 '구두수선대 몇 호'라고만 하는데, 전 따로 이름을 짓고 싶었어요. 그래서 '구두대학병원'이라고 붙였습니다. 한 번은 옆 건물 치과 원장님이 오셔서 '저랑 같은 원장님이시네요'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같이 웃었어요,(웃음)"

언제부터 이곳을 운영하셨나요.
"1978년입니다. 스물다섯 살 때 시작했어요. 원래는 염천교에 있는 양화점에서 기성화를 만드는 기술자로 일했는데, 만드는 것보다 수선이 저한테 더 잘 맞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시청역 앞으로 자리를 옮겨 구두수선을 시작했습니다."

처음부터 수선 기술을 갖고 계셨나요.
"이십대 때 구두를 만드는 일을 했기 때문에 기본 기술은 이미 있었죠. 구두수선뿐만 아니라 가방 지퍼 교체나 수선도 일이 들어와요. 그런 세세한 기술은 혼자 연구하면서 익혔어요. 결국 기술은 계속 해보면 늘더라고요.(웃음)"

"과거 80~90년대 시절 구두닦이 배달로 300켤레까지···직원도 두세명 두고 수배만원 벌어"

48년 동안 같은 자리에서 장사하셨는데, 시청 앞 분위기도 많이 달라졌겠네요.
"옛날에 법원이 이 근처에 있어 오고가는 사람들이 정말 많았어요. 지방에서 재판 보러 올라오려면 묵혀뒀던 구두를 신고 오잖아요. 그럼 온 김에 구두를 닦고 가는 거예요. 그때 만해도 유동인구가 엄청 났죠."

가장 장사가 잘됐던 시절은 언제였나요.
"코로나 전까지는 계속 바빴어요. 직원도 두세 명 있었죠. 오전, 오후로 배달하는 직원들이요. 오전에 구두를 수거해서 광을 내고 오후에 다시 가져다줬거든요. 요즘에야 직장인들이 운동화를 신고 다니지만 그땐 양복에 넥타이가 기본이었잖아요. 특히나 영업사원들은 폼나게 다녀야 하잖아요. 하루가 멀다 하고 구두를 맡기던 시절이었죠."
"구두로 두 아들 키웠죠"…48년째 자리 지킨 '구두대학병원장' [강홍민의 굿잡]
"구두로 두 아들 키웠죠"…48년째 자리 지킨 '구두대학병원장' [강홍민의 굿잡]
요즘으로 치면 '구독 서비스' 같은 거네요.
"근처 직장인들이 구두를 맡기면 주 2회 수거해서 배달까지 했었어요. 그땐 우리뿐만 아니라 구두닦이집 모두 그랬으니까요. 월 이용료가 5,000원이었는데, 최대 300켤레까지 했었던 것 같아요. 월·목, 화·금요일로 나눠 정기서비스를 한 셈이죠. 당시 구두 한 켤레 닦는 데 몇 백원이었는
데, 그것만으로도 월 150만원 정도 수입이 됐으니 괜찮았죠."

당시 수입은 어느 정도였습니까.
"직원들 월급을 다 주고도 순수익이 월 400~500만원 정도는 남았어요. 잘될 때는 그 이상도 벌었고요. 겨울이 특히 좋았어요. 부츠 수선은 일반 구두보다 손이 많이 가는 만큼 수선비도 더 받을 수 있었거든요.(웃음)"

요즘 구두를 신는 사람이 많이 줄었습니다. 체감하시나요.
"요새 회사에서 복장을 맘대로 입게 하잖아요. 그게 가장 커요. 예전에는 다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다녔는데, 지금은 운동화 신고 출근하잖아요. 구두를 매일 신는 문화 자체가 사라졌어요. 그것 때문에 수입도 많이 줄었어요. 요즘엔 한 달에 한 200만원 정도 수준이에요."

김 원장님만의 기술 노하우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저는 물광보다 기름광을 냅니다. 광 자체가 다르죠. 또 구두를 붙일 때도 무조건 본드만 쓰는 게 아니라 가죽 상태에 맞는 세척제와 접착제를 골라 작업합니다. 재봉틀로 직접 꿰매는 작업도 가능하고요. 그런 기술은 요즘 하는 곳이 많지 않아요."

그 기술은 어떻게 익히셨나요.
"누가 하나하나 가르쳐주는 게 아닙니다. 계속 연구하고 응용하면서 자기만의 방법을 만들어야 해요. 결국 세월이 최고의 스승이지요."

"손님들이 '잘 고쳐줘서 고맙다'고 할 때가 가장 뿌듯해···구두수선으로 두 아들 키워, 건강할때까지 계속 하고파"

기억에 남는 손님도 있을 것 같아요.
"대한항공 본사 앞이라 면접 보러 오는 분들이 많았는데, 한 번은 최종면접을 앞둔 아가씨가 구두가 뜯어졌다며 맨발로 뛰어왔어요. 급하게 수선해드리면서 '꼭 합격하세요' 했는데, 나중에 정말 합격해서 선물을 들고 찾아왔습니다. 아직도 기억에 남아요."
"구두로 두 아들 키웠죠"…48년째 자리 지킨 '구두대학병원장' [강홍민의 굿잡]
가장 보람을 느끼는 순간도 비슷한가요.
"그렇죠. 가장 기분 좋을 때가 손님이 '잘 고쳐줘서 고맙다'고 말해줄 때예요. 손님들 중에는 신발 수선을 받고 박카스를 사 들고 오는 분들도 더러 있어요. 그럴 때가 제일 좋죠. 결국 내 기술을 인정받는 순간이니까요.(웃음)"

48년 동안 이 자리를 지키면서 역사적인 순간도 많이 보셨을 것 같습니다.
"1987년 6월 항쟁 때를 잊을 수가 없지요. 지금 같은 컨테이너도 아니고 비닐을 쳐놓고 장사했는데 정말 살벌했지요. 최루탄 냄새를 맡으면서 구두를 닦았으니까요. 시위대가 뛰어가고 다시 몰려오는 모습을 바로 눈앞에서 봤거든요."

앞으로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다면요.
"거창한 건 없습니다. 건강하게 계속 일하고 싶어요. 이 나이에도 할 일이 있다는 게 행복합니다. 손님들이 계속 찾아와주는 것도 감사하고요. 구두수선으로 두 아들을 다 키워 결혼까지 시켰으니, 이제는 이 시간을 즐기면서 오래 일하고 싶습니다."
"구두로 두 아들 키웠죠"…48년째 자리 지킨 '구두대학병원장' [강홍민의 굿잡]
강홍민 기자 khm@hankyung.com
[사진=김기남 기자 / 고서영 대학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