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 현장에서는 여전히 과거의 방식대로 말하고 행동하며, 의사결정 시 과거의 성공 알고리즘을 사용하다 자신도 모르게 조직의 변화와 혁신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직급이 높으면 능력도 높을 것이라는 암묵적 인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요즘 시대는 나이와 연차가 ‘현재의 실력’을 보증해주지도, 무조건적인 인정을 담보하지도 않는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이 예능 프로그램에도 반영된 것이 아닐까. 젊은 세대들은 이러한 흐름에 환호를 보내며 속이 뻥 뚫리는 시원함을 느낄 것이다. 반면 필자와 같은 기성세대들은 뭔지 모를 씁쓸함과 불안함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성공이 만드는 ‘역량의 함정’
‘흑백요리사’ 시즌2에서 유독 이 콘셉트가 화제가 된 장면이 있었다. 의령 메추리를 주재료로 한 요리를 심사위원들이 눈을 가린 채 평가한 것이다. 그 결과 미슐랭 2스타 셰프가 자신의 제자이기도 한 도전자에게 패해 본선 1회전에서 탈락하는 이변이 벌어졌다. 현장 참석자들은 물론 시청자였던 필자 역시 큰 충격과 함께 궁금증이 일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한 심사위원은 ‘굉장히 독특하다. 과감한 도전이었는데 무척 조화로웠다’라는 평을 남겼다. 심사위원들은 그동안 셀 수 없이 많은 맛을 경험해왔을 것이다. 그렇기에 익숙한 맛보다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파격적인 시도에 더 높은 점수를 준 것이다. 패배한 셰프 역시 “내가 너무 보수적이었던 것 같다”고 고백했다.
방송을 보며 현장에서 만나는 리더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어느 때보다 똑똑해진 고객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기업은 늘 변화해야 한다. 이를 모르는 리더는 없다. 유연해야 한다, 혁신해야 한다고 늘 앞장서서 외친다. 하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여전히 과거의 방식대로 말하고 행동하며, 의사결정 시에는 늘 자신의 뇌에 깊이 각인된 과거의 성공 알고리즘을 사용하다 자신도 모르게 조직의 변화와 혁신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왜 이런 일이 반복되는 것일까.
스탠퍼드대 제임스 마치 교수가 정의한 ‘역량의 함정(Competency Trap)’이라는 개념이 있다. 과거에 성과를 가져다준 방식에 지나치게 능숙해질수록 조직과 개인은 새로운 대안을 탐색하기보다 익숙한 방식을 반복하는 쪽으로 기울어진다는 것이다. 기존 방식을 더 잘 다듬는 일은 성과가 눈에 보이고 빠르게 나타나지만 새로운 시도는 노력이 더 필요하고 성과는 더더욱 불확실하다. 그 결과 조직은 점점 더 잘하는 쪽으로만 익숙해지고 정작 그 일과 방법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 가능성에는 둔감해진다. 잘하는 것이 결국 발목을 잡는 역설이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대니얼 카너먼은 전문가일수록 자신의 판단이 옳다고 믿는 ‘과잉 확신(Overconfidence Effect)’의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풍부한 성공 경험은 오히려 확률적 사고보다 자신의 직관을 맹신하게 만든다. “내가 이 바닥에서만 15년째야”,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며 확신하는 것이다. 게다가 똑똑한 사람일수록 자신의 논리를 정당화하는 방어기제 또한 정교하게 발달해 있어 자신의 확신이 착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아차리기가 더 어렵다.
머리로 아는 것과 몸으로 바뀌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는 걸 보여주는 재미있는 실험이 있다. 미국 엔지니어 데스틴 샌들린은 핸들을 오른쪽으로 꺾으면 바퀴가 왼쪽으로 향하도록 자전거를 개조했다. 이 자전거는 평소 익숙한 방식과는 정반대로 몸을 움직여야만 탈 수 있었다. 그는 이 원리를 머리로는 완벽하게 이해했지만 페달을 밟는 순간 몸은 수십 년간 익힌 습관대로 움직였고 매번 곧바로 넘어졌다. 샌들린은 그 어떤 사람도 이 자전거를 제대로 탈 수 없을 것이라 단언했으며 실제로도 그러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고 매일 5분씩 새로운 자전거 타기를 연습했다. 마침내 여덟 달이 지난 후 그는 이 자전거를 능숙하게 타게 됐다. 참고로 자전거를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은 그의 어린 아들은 단 2주 만에 이 새로운 방식을 익혔다. 익숙한 습관을 깨는 데는 이만큼의 시간과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혁신의 조건
그렇다면 고착화된 리더십을 탈피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반대 개념인 인지 다양성을 추구하는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 전자는 리더 개인의 경험과 직관에 의존해 의사를 결정하고, 자신과 비슷한 사람을 곁에 두기를 선호하며, 실패 앞에서는 ‘내 말을 안 들어서 그렇다’는 식으로 책임을 돌린다.
반면 후자는 다양한 가설과 실험을 장려하고, 자신을 불편하게 만드는 반대자를 곁에 두며, 실패 앞에서 ‘우리가 놓친 관점은 무엇인가’를 묻는다. 인간이라면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점을 인지하며 극복하려 무던히도 노력하는 것이다.
조선 최고의 성군 세종대왕 곁에는 ‘깐깐함과 반대의 아이콘’이었던 재상 허조(許稠)가 있었다. 허조는 예법과 원칙에 지나치게 엄격하여 세종이 강력하게 추진하려던 파격적인 인사(예: 관노 출신 장영실의 발탁)나 백성 관련 제도에 대해 사사건건 브레이크를 걸며 반대했다. 세종은 수뇌부 회의가 끝나면 주변 신하들에게 “허조는 참으로 고집불통이야”라며 혀를 내둘렀지만 그의 반대 논리에 일리가 있다면 자신의 생각을 전면 수정하거나 보완하기도 했다. 세종은 자신과 성향이 완전히 다른 허조를 끝까지 이조판서와 우의정 자리에 앉혀 두고, 임금인 자신의 판단이 편향에 빠지지 않도록 견제 장치로 삼았다. 최고의 성군은 그냥 만들어지지는 않는 것 같다.
지혜로운 리더들은 이를 시스템으로 만들기도 하는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레드팀이다. 레드팀은 냉전 시대 미국 군대에서 아군(블루팀)의 전략적 취약점을 파악하기 위해 가상의 적군 역할을 하는 부대(레드팀)를 운영한 것에서 시작됐다. 그 후 조직 내 침묵과 동조 현상을 깨기 위해 의도적으로 반대자 역할을 하는 ‘악마의 변호인(Devil’s Advocate)’ 및 레드팀 기법이 등장하게 됐다.
구글은 새로운 소프트웨어, 클라우드 서비스, 생성형 인공지능(AI)제품 등을 전 세계 시장에 정식 출시하기 전 내부의 공식 저격수인 ‘Google Red Team’의 최종 승인을 거쳐야 한다. 이 팀은 제품 개발 부서와 완전히 독립된 조직으로 신제품이 출시됐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시스템 오류, 악의적 악용 가능성, 비즈니스 모델의 맹점을 공격자(Hacker·Abuser)의 관점에서 무자비하게 파괴하고 뚫어야 하는 역할을 한다. 개발 리더들이 밤새 만든 기획을 정면으로 들이받아 출시를 보류시키거나 전면 수정을 요구할 수 있는 강력한 전권을 부여받고 있다.
또한 구글은 시스템 장애나 프로젝트 실패가 발생했을 때 이를 공식적으로 부검하는 포스트모템(Post-Mortem) 문화를 가지고 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철칙은 ‘사람을 탓하지 않는다’이다. “누가 실수를 했는가”가 아니라 “시스템의 어떤 맹점이 이 실수를 유발했는가”, “우리가 놓친 사전 징후는 무엇이었나”에만 초점을 맞춘다. 작성된 포스트모템 문서는 전사 직원에게 투명하게 공개되며 다른 팀원들이 유사한 실패를 반복하지 않도록 학습하는 교과서로 활용된다.
다시 처음의 오디션 프로그램으로 돌아가 보자. 제자에게 패한 미슐랭 셰프는 이 대결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그저 치욕스러운 경험이었을까. 스스로 계급장을 떼고 정면으로 부딪혀본 그의 용기를 떠올려보면 분명 더 큰 발전의 계기가 되었을 것이라 확신한다.
임주영 IGM세계경영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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