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율이라는 파도 앞에서 중요한 것은 물결의 방향을 점치는 예언자가 되는 일이 아니라 어떤 물결이 오더라도 흔들리지 않을 배를 미리 준비해두는 일이다”

지난 8월 23일 서울 명동 거리 한 환전소에 이날 원·달러, 원·엔 환율이 표시돼 있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지난 8월 23일 서울 명동 거리 한 환전소에 이날 원·달러, 원·엔 환율이 표시돼 있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바다를 오래 지켜본 사람은 안다. 밀물과 썰물은 어느 하루아침에 이유 없이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달의 인력, 바람의 방향, 그리고 저 먼 대양의 수온까지 눈에 보이지 않는 힘들이 겹겹이 쌓여 물의 높낮이를 결정한다.

원·달러 환율도 다르지 않다. 2026년 상반기 우리는 17년 만의 높은 파고를 목격했고 여름의 끝자락에서는 그 파도가 눈에 띄게 잦아드는 것을 지켜보았다. 서른 해 가까이 고객의 자산을 지키는 자리에 있으면서 나는 환율이야말로 한 나라 경제의 체온을 가장 정직하게 드러내는 지표라고 믿어왔다. 이 글에서는 환율이 움직이는 원리, 올해 원화가 유난히 흔들렸던 이유, 그리고 최근의 반등이 품고 있는 함의를 차례로 짚어보려 한다.

◆두 나라의 무게를 재는 저울

환율은 결국 하나의 저울이다. 한쪽 접시에는 원화가, 다른 쪽 접시에는 달러가 놓여 있고 그 위에 얹히는 것은 두 나라의 금리, 물가, 성장률, 그리고 무엇보다 자금의 흐름이다.

미국의 정책금리가 한국보다 높으면 투자자들은 더 높은 이자를 쫓아 달러 자산으로 이동하고 그만큼 원화는 상대적으로 가벼워진다. 반대로 한국의 수출이 호조를 보이며 경상수지가 흑자를 쌓으면 벌어들인 달러가 국내로 유입되며 원화 쪽 접시가 무거워진다. 여기에 외국인 투자자의 국내 주식·채권 매매, 지정학적 위험에 대한 회피 심리, 그리고 정부와 중앙은행의 시장 개입까지 더해지면서 저울은 하루에도 몇 번씩 미세하게 기운다.

교과서적으로는 무역수지도 저울의 한 축이다. 원화 가치가 떨어지면 우리 수출품의 가격 경쟁력이 높아져 수출이 늘고, 시차를 두고 경상수지가 개선되며 다시 원화가 힘을 받는 자기교정 과정이 작동한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현실의 저울은 이렇게 단순하게만 움직이지 않는다. 국내 투자자들이 해외 주식과 채권으로 자산을 다변화하는 흐름, 이른바 서학개미의 매수세는 무역수지와 무관하게 달러 수요를 꾸준히 만들어내고 스테이블코인과 같은 새로운 형태의 달러 수요까지 등장하면서 저울추의 종류 자체가 다양해지고 있다. 환율은 그래서 어느 한 가지 뉴스로 설명되지 않는다. 여러 힘이 동시에 저울을 밀고 당기는 결과일 뿐이다.

◆여름 한복판의 폭풍

올해 원화가 유독 무겁게 가라앉았던 배경에는 몇 겹의 폭풍이 겹쳐 있었다. 미국의 관세정책을 둘러싼 불확실성이 장기화하면서 위험 회피 심리가 커졌고 중동 지역의 전쟁이 불거지며 안전자산인 달러로 자금이 몰렸다. 여기에 한·미 금리차가 쉽사리 좁혀지지 않는 가운데 외국인 투자자들의 국내 주식 순매도가 이어지면서 원화는 이중, 삼중의 압박을 받았다.

그 결과 지난 6월 8일 원·달러 환율은 장중 1561원대까지 치솟으며 17년 3개월 만의 최고치를 기록했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의 환율 급등을 몸으로 겪은 세대에게는 아찔한 기시감을 불러일으킬 만한 숫자였다. 실제로 2025년 12월 초순 원·달러 환율의 월평균치가 1998년 3월 이후 최고 수준으로 올라섰다는 소식이 전해지며 시장 곳곳에서 불안한 목소리가 새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와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경상수지는 여전히 사상 최대 수준의 흑자를 기록하고 있고 외환보유액도 충분한 완충 능력을 갖추고 있다. 외환위기가 대외 부채를 갚을 달러 자체가 바닥난 데서 비롯된 유동성 위기였다면 올여름의 고환율은 우리 경제의 기초 체력이 흔들려서라기보다 관세, 전쟁, 금리차라는 대외 변수라는 거센 바람이 일시적으로 몰아친 결과에 가까웠다. 체온계의 눈금이 잠시 높이 치솟았다고 해서 몸 전체가 병든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바람이 잦아들며

폭풍은 영원하지 않다. 8월에 접어들며 원화는 뚜렷한 반등의 흐름을 보이기 시작했다. 반도체를 중심으로 한 수출 호조가 이어지면서 수출기업들의 달러 매도 물량이 꾸준히 시장에 풀렸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주요 기업들이 주주환원 확대를 위해 보유 달러를 원화로 바꾸리라는 기대감도 힘을 보탰다.

한국은행이 두 차례 연속으로 기준금리를 25bp씩 인상해 3%까지 끌어올리며 통화 긴축 기조를 분명히 한 점도 원화 강세에 무게를 실었다. 반도체 수출이 살아나면서 한국은행은 올해 성장률 전망치를 2.6%에서 3.3%로 상향 조정하기도 했다.

이런 흐름이 겹치면서 원·달러 환율은 8월 하순 1370원대까지 내려앉았고 최근 한 달 사이 원화 가치는 5% 넘게 회복했다. 6월의 정점에서 불과 두 달 만에 180원 가까이 되돌아온 셈이니 시장이 그동안 얼마나 과도하게 위험을 반영했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다시 밀물이 될 것인가

그렇다면 앞으로의 물길은 어느 방향을 향할까. 시장의 시선은 엇갈린다. 해외 투자은행들의 전망을 집계한 컨센서스는 올해 말 1400원, 내년 말에는 1350원 안팎을 가리키고 있고 일부 전문가는 관세를 둘러싼 불확실성이 완전히 해소되고 달러 지수가 추가로 약세를 보인다면 1200원대까지 내려올 여지도 있다고 본다.

반면 연말로 갈수록 해외투자 관련 세제 혜택과 세계국채지수 편입에 따른 자금 유입 효과가 서서히 약해지면서 원화 강세가 주춤하고 환율이 다시 반등할 수 있다는 신중론도 만만치 않다. 경상수지 흑자와 지정학적 위험 완화라는 원화 강세 요인과 국내 투자자들의 해외 주식 투자 확대와 외국인 자금의 유출 가능성이라는 약세 요인이 팽팽히 맞서 있는 형국이다. 결국 하반기 환율은 어느 한 방향으로 곧게 나아가기보다 높은 변동성 속에서 등락을 거듭할 가능성이 크다.

한 가지 눈여겨볼 대목은 지금의 원화 강세를 이끈 힘 중 상당 부분이 연말이 다가올수록 자연스럽게 약해질 성격을 지녔다는 점이다. 국내로 되돌아왔던 가계 자금은 해외 투자 관련 세제 혜택에 따라 시간이 지나면 다시 해외로 향할 수 있고 연말 배당과 인센티브 지급을 앞두고 기업들이 보유 달러를 미리 환전해두려는 계절적 수요도 잦아들기 마련이다.

반면 정부로서는 은행의 건전성 지표를 관리해야 할 유인이 있어 환율이 지나치게 한쪽으로 쏠리지 않도록 시장에 개입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이런 요인들을 종합하면 연말 환율은 1400원 안팎에서 등락하며 완만한 균형점을 찾아갈 공산이 크다는 것이 시장의 중론에 가깝다.

이런 국면에서 개인투자자와 기업이 취할 태도는 명확하다. 환율의 방향을 정확히 맞히려 애쓰기보다 변동성 자체를 전제로 자산과 부채의 통화 구성을 점검하는 편이 현명하다. 해외 자산이 있다면 환헤지 비중을 다시 살펴볼 때이고, 달러 자산을 늘리고 싶다면 이번처럼 원화가 강세를 보이는 구간을 분할 매수의 기회로 삼을 만하다.

바다는 밀물 때도 썰물 때도 결국 같은 바다다. 환율이라는 파도 앞에서 중요한 것은 물결의 방향을 점치는 예언자가 되는 일이 아니라 어떤 물결이 오더라도 흔들리지 않을 배를 미리 준비해두는 일이다. 오랫동안 자산관리 상담을 해오며 느낀 것은 환율에 일희일비하는 고객일수록 정작 중요한 장기 자산배분의 원칙을 놓치기 쉽다는 사실이다. 이번 여름의 높은 파고와 그 뒤를 이은 잔잔한 되돌림은 우리에게 그 준비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일러준 셈이다.

박태형 우리은행 TCE 시그니처센터 PB지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