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업적을 보라, 너희 강대하다는 자들아, 그리고 절망하라!”
미국 드라마 ‘브레이킹 배드’는 제 인생의 콘텐츠를 몇 개 꼽으라면 빠지지 않는 작품입니다. 이 드라마를 통해 알게 된 시가 있습니다. 영국 낭만파 시인 퍼시 비시 셸리의 ‘오지만디아스(Ozymandias)’입니다.
오지만디아스는 자신의 위대함을 이렇게 선언합니다. 그러나 이 문장이 새겨진 곳은 화려한 궁전이 아닙니다. 사막 한가운데 버려진 석상의 받침대입니다. 몸통은 사라졌고 두 다리만 서 있습니다. 부서진 얼굴은 모래에 반쯤 파묻혀 있습니다. 왕이 자랑했던 도시도, 군대도, 백성도 없습니다. 주변에는 끝없는 모래뿐입니다.
강대한 자들에게 자신의 업적을 보고 절망하라고 했던 왕. 정작 수천 년 뒤 사람들을 압도하는 것은 그의 업적이 아니라 그것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사실입니다.
‘브레이킹 배드’ 제작진은 마지막 이야기를 앞두고 월터 화이트를 연기한 브라이언 크랜스턴이 이 시를 낭송하는 예고편을 내놨습니다. 월터가 쌓아 올린 범죄의 제국이 무너지는 결정적인 에피소드의 제목 역시 ‘오지만디아스’였습니다.
이번 주 이 시를 다시 떠올린 이유가 있습니다. <한경비즈니스>가 커버스토리로 ‘흔들리는 제국’, 한때 세계를 호령했지만 지금은 경영이 악화되고 있는 글로벌 기업들을 다루기 때문입니다. 자연스럽게 지금은 이름조차 희미해진 한국의 대기업들도 떠올랐습니다.
1970년대에는 율산이 있었습니다. 1975년 창업해 불과 4년 만에 14개 계열사를 거느린 그룹으로 성장했습니다. ‘율산 신화’라 불렸지만 급격한 확장과 자금난을 견디지 못하고 1979년 무너졌습니다. 제국을 만드는 데도, 사라지는 데도 4년이면 충분했습니다.
1980년대에는 국제그룹이 있었습니다. 20여 개 계열사를 거느렸지만 1985년 해체됐습니다. 훗날 헌법재판소는 당시 해체 과정에서 이뤄진 공권력 행사를 위헌으로 판단했습니다. 기업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다고 믿었던 관치경제의 시대 역시 영원하지 않았습니다.
1990년대에는 한보가 있었습니다. 은마아파트로 성장한 한보는 철강으로 사업을 넓히며 막대한 돈을 빌렸습니다. 1997년 한보철강이 부도 처리됐을 때 부채는 5조원 규모였습니다. 계속 돈을 빌릴 수 있다는 믿음이 깨지자 한보라는 제국도 멈췄습니다.
그리고 대우가 있었습니다. 김우중 회장은 ‘세계경영’을 내걸고 자동차와 조선, 전자, 건설, 금융으로 영토를 넓혔습니다. 외환위기 이후에도 성장 기조를 상당 기간 이어갔지만 1999년 주력 계열사들이 워크아웃에 들어가며 재계 2위의 거대 그룹은 해체의 길을 걸었습니다. ‘세계경영’의 제국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율산과 국제, 한보와 대우가 무너진 이유는 모두 다릅니다. 이들을 탐욕이나 오만이라는 한 단어로 묶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묘하게 닮은 점이 하나 있습니다. 전성기에는 그들이 사라진 세상을 상상하기 어려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업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한 시대를 지배했던 산업도, 기술도, 국가도 그렇습니다. 성공은 어느 순간 특별한 착각을 만들어냅니다. 지금까지 자신을 정상으로 올려놓은 방법이 앞으로도 통할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시장은 변하고 기술은 바뀌며 돈의 흐름도 달라집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성공한 사람과 기업이 그 변화를 가장 늦게 알아차릴 때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너무 많이 맞았기 때문에 자신이 틀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입니다.
오지만디아스의 착각은 거대한 제국을 건설한 데 있지 않습니다. 신이 만든 제국이 영원하리라고 믿은 게 잘못입니다.
오늘 우리 앞에도 영원할 것처럼 보이는 기업들이 있습니다. 세계 시장을 지배하는 기업, 수십 년 동안 1위를 지켜온 기업, 시가총액이 웬만한 국가의 경제 규모와 맞먹는 기업들입니다. 그중 상당수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강할 것입니다.
하지만 기업이 가장 위험한 순간은 위기가 찾아왔을 때만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너무 잘돼 지금의 성공이 당연하게 느껴질 때가 오히려 더 위험할 수 있습니다. 시장의 변화는 일시적인 소음으로 보이고, 부채는 자신감이 되며, 확장은 능력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사막에 남아 있는 오지만디아스의 얼굴은 여전히 자신만만합니다. 하지만 그가 내려다보던 제국은 없습니다.
기업에도 영원한 전성기는 없습니다. 그래서 좋은 기업을 판단하는 기준은 얼마나 거대한 제국을 만들었느냐만이 아닐 겁니다. 자신의 전성기가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얼마나 빨리 깨닫느냐. 그리고 전성기가 끝나기 전에 다음 시대를 얼마나 일찍 준비하느냐.
어쩌면 기업의 진짜 실력은 정상에 오르는 순간이 아니라 정상 그 이후에 드러나는지도 모릅니다.
이홍표 한경비즈니스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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