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美 문화원 폭파사건, 첫 상고 사건
[법알못 판례 읽기]
재심에서 무죄가 아니라 면소 판결을 받았다는 이유로 국가의 배상책임을 인정하지 않은 원심을 뒤집은 것이다. 이에 따라 1983년 발생한 ‘대구 미국 문화원 폭파사건’ 피해자들이 43년 만에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게 됐다.
면소 판결 나온 ‘집시법 위반’ 혐의
1983년 9월 22일 대구 삼덕동 미 문화원 앞에 있던 정체불명의 가방에서 폭발물이 터져 1명이 사망하고 4명이 다치는 사건이 발생했다. 박종덕·함종호·손호만·안상학·고(故) 우성수 씨가 수사기관에서 용의자로 지목됐다. 이들은 이후 재판에 넘겨졌다.
박종덕 씨는 국가보안법 위반과 반공법 위반,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집시법) 위반 혐의를 받았다. 함종덕 씨 등 4명에겐 집시법 위반 혐의가 적용됐다. 1984년 1월 대구지방법원은 이들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박 씨에겐 징역 3년에 자격정지 3년이, 함 씨 등 4명에겐 징역 1년 6개월이 선고됐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과거사위)는 2010년 6월 박 씨 등 사건에 대해 진실규명 결정을 했다.
과거사위는 경찰이 당시 박 씨 등을 비롯해 다수의 민간인을 영장 없이 연행해 최대 한 달 가까이 불법 구금한 사실을 문제 삼았다. 경찰관들이 조사 과정에서 연행·구금된 민간인에게 구타와 진술 강요를 한 사실도 드러났다.
과거사위의 이 같은 결정 이후 이들은 2013년 재심을 청구했다. 2019년 법원은 재심에서 박 씨의 국가보안법·반공법 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불법 감금 등에 따라 작성된 박 씨의 진술서 등은 증거 능력이 없다는 판단에서다.
다만 박 씨와 나머지 피해자들에게 적용된 집시법 위반 혐의에 대해선 면소 판결이 나왔다. 이들에게 적용된 집시법 조항(‘현저히 사회적 불안을 야기시킬 우려가 있는 집회 또는 시위’ 부분)이 1989년에 폐지됐기 때문이다.
박 씨 등은 무죄·면소 판결을 바탕으로 2020년 8월 국가를 상대로 총 18억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2022년 1월 1심을 맡은 서울중앙지방법원은 박 씨와 그 가족들에 대해서만 “국가가 630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재심에서 무죄가 나온 박 씨의 국가보안법·반공법 위반 관련 수사와 재판 등 과정에 대해서만 국가의 손해배상 책임이 인정된 것이다. 반면 재심에서 면소 판결이 나온 집시법 위반 부분에 대해선 국가가 배상할 책임이 없다고 판단했다.
1심 재판부는 “재심 법원은 구 집시법의 해당 조항이 이후 개정됨으로써 ‘범죄 후 법률의 개폐에 의해 형이 폐지됐을 때’에 해당한다는 이유로 형사소송법에 따라 면소판결을 선고했다”며 “이 재심 면소 판결이 확정됐다는 사정만으로 집시법 위반의 공소사실에 관한 유죄 판결과 관련된 기소, 재판 및 복역이 곧바로 국가의 불법행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항소심을 담당한 서울고법 재판부도 2023년 12월 1심 판단을 유지했다.
대법 “무죄 판결 선고됐을 것”
그러나 대법원 제3부(주심 엄상필 대법관)는 지난 9월 23일 사건을 파기환송 했다. 집시법 위반 부분에 대해서도 국가의 배상책임을 인정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대법원은 수사관의 불법 구금과 가혹행위 등으로 인해 재심이 개시됐고 국가보안법·반공법 위반 혐의에 대해선 재심에서 무죄가 나온 점에 주목했다.
대법원은 집시법 위반 공소사실에 대해 면소 사유가 없었더라면 이들에게 무죄 판결이 선고됐을 것이란 점에 대해 고도의 개연성 있는 증명이 이뤄졌다고 봤다. 형사보상 청구 사건에서 보상금 지급 의무가 인정된 점도 파기환송 사유로 제시됐다.
상고심 과정에서 소멸시효 완성 여부도 주된 쟁점이었다. 1·2심은 재심 무죄 판결과 달리 재심 면소 판결 확정일은 단기 소멸시효(3년) 기산일이 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집시법 위반 부분 소멸시효 기산일은 과거사위의 진실규명 결정이 내려진 2010년 5월인데 원고들이 소송을 제기한 시점은 2018년인 만큼 소멸시효가 완성됐다는 논리다.
그러나 대법원은 “일반인이 재심을 통해 유죄판결의 확정력이 배제되기 전부터 자신이 수사 단계에서 입은 피해에 대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권을 행사할 것을 객관적·합리적으로 기대하기 어렵다”며 원심 판단을 수긍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유죄판결 효력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 과거사위의 진실규명 결정일을 기준으로 소멸시효를 계산하면 안 된다는 취지다.
이번 사건은 대구 미 문화원 폭파사건 관련 최초의 상고 사건이었다. 같은 날 올해 2월 이전 과거사위로부터 진실규명 결정을 받은 피해자가 소멸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국가배상 소송에서 이미 패소 확정판결을 받았더라도 다시 같은 소송을 낼 수 있다는 취지의 대법원판결도 나왔다.
올해 2월 26일 개정 과거사정리법이 시행됐기 때문이다. 개정법에선 진상규명 결정을 받은 사건으로 발생한 피해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권에는 국가재정법상 소멸시효(5년)와 민법상 소멸시효(불법행위를 한 날로부터 10년)를 적용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담겼다.
[돋보기]
‘억대’ 형사보상금 지급도 잇따라
권위주의 정권 시절 불법 구금 등을 당한 피해자들에 대한 형사보상 결정도 잇따르고 있다.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지난 9월 19일 과거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집시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옥살이했던 A 씨에게 형사보상금 6480만원과 비용 보상 286만원 지급을 결정했다.
형사보상이란 무죄가 확정된 피고인 등에게 ‘억울한 옥살이’에 대한 보상과 명예 회복 차원에서 지급하는 보상금이다. 형사보상금은 구금에 대한 보상이고 비용 보상이란 재판을 위해 사용된 변호사비·교통비 등을 일컫는다.
지난 9월 3일에도 서울중앙지법에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받은 B 씨에게 3억원의 형사보상금 지급 결정이 이뤄졌다. 올해 초엔 1948년 ‘여수·순천 사건’ 당시 포고령 위반으로 처벌받은 희생자 유족 24명이 재심 무죄 판결 이후 광주지법 순천지원으로부터 총 20억5000만원의 보상을 받아냈다.
1985년부터 1991년까지 2000일 넘게 국가안전기획부의 불법 체포로 구금(국보법 위반 혐의)됐던 C 씨도 올해 8억7726만원의 형사보상을 받게 됐다. 대검찰청에 따르면 2025년 지급된 총 1274억원의 형사보상금 중 1084억원(85%)이 재심 무죄 사건이었다.
과거사 사건의 경우 사건 발생 이후 수십 년 후에 무죄로 뒤집히는 사례가 대부분이라 형사보상금 규모가 고액인 편이다. 최근 형사보상금 규모가 법무부가 당초 편성한 예산을 웃돌아 정부가 다른 사업 예산을 끌어다 지급하는 사례도 반복되고 있다.
이인혁 한국경제 기자 twopeople@hankyung.com
© 한경매거진&북,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