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업소만 210개, 구두는 사치죠”...여성 주류영업 사원 김유리

[젠더타파] 롯데주류 영업사원 김유리 “여성파워, 잠원동을 주름잡다”성별이 직업을 결정하는 시대는 지났다. ‘그들만의 리그’에서 멋지게 성공한 신입사원들을 만나본다.


지난 1월 9일, 잠원동의 한 업소에서 만난 롯데주류 유흥판촉팀 신입사원 김유리(26) 씨(오른쪽)가 담당 업주(왼쪽)와 밝게 웃고 있다. 사진=이승재 기자

김유리1991년생2016년 2월 숙명여대 경영학 졸업2015년 9월 롯데주류 유흥판촉팀 입사
오전 11시, 롯데주류 유흥판촉팀의 2년차 사원 김유리(26) 씨의 하루가 시작된다. 우선 사무실로 출근해 전날 거래현황을 꼼꼼히 파악한다. 개별 상권에 배포할 판촉물을 디자인하는 것도 그의 몫. 오후 3시가 되면 현장으로 나가 업소 영업이 활발해지는 6시 전까지 포스터를 붙이거나 입간판을 세우는 POP작업을 한다. 틈틈이 업주들을 만나 “요즘 ‘처음처럼’이 이모님 덕에 잘 나간다~”며 훈훈한 농담을 던지기도 한다.
‘독립적’과 ‘능동적’. 두 관형사야말로 자신을 가장 잘 대변한다고 말하는 김 씨는 그래서 지금의 업무가 정말 재미있다고 했다. 그리고 ‘재미있는 일’을 찾은 비결로 그는 “여자도 할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을 갖는 대신 나에게 잘 맞는가만 생각한 것”이라고 답했다. ‘주류영업은 남성적일 것’이라는 편견은 김 씨가 직업을 선택하는 데 아무런 장애물이 되지 않았다.


#18전17패1승 #롯데주류_스펙태클_전형 #서류전형_없음
김 씨가 주류영업에 관심을 갖게 된 건 대학 때 타사 주류브랜드에서의 마케팅 인턴실습 직후였다. 수시로 열리는 소비자 행사를 위해 트렌드에 맞는 기념품을 정하고 단독부스를 맡아 직접 운영해보면서 변화가 빠르고 활동적인 주류업계의 문화에 흠뻑 빠졌다.
“워낙 스스로 해결하는 것을 좋아했어요. 대학 때 ‘내일로’로 전국을 다 돌고 미국, 싱가포르, 홍콩 등 해외여행도 혼자 다녀왔어요. 혼자서는 배우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을 모두 경험할 수 있다는 게 좋았죠.”
본격 취업준비는 2015년 상반기부터 시작했다. 8학기를 마치고 취업을 위해 한 학기 유예하면서였다. 스터디 두 개를 번갈아 참여해 서로 자소서를 첨삭해주고 인적성검사나 시사상식을 함께 공부했다. 대학 취업센터에서 진로 강연도 빼놓지 않고 들었다.
2015년 3월, 17전 17패의 쓴맛을 보며 좌절해있던 그에게 롯데주류의 하계인턴 소식이 들려왔다. 롯데주류는 신입사원을 모두 정규직 전환형 인턴으로 채용한다. 게다가 그룹이 ‘스펙태클’이라는 탈스펙 전형을 막 도입하면서 서류전형 없이 10~15장 분량의 PPT만 제출하면 바로 면접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PPT 주제는 ‘롯데주류 제품과 판매시장을 하나씩 선택해 마케팅 전략을 세우라’는 것. 김씨는 제품으로는 평소 즐겨 마시면서도 흔하지 않은 소재인 마주앙 와인을, 시장으로는 마트를 선택했다. 그 뒤 곧바로 대여섯 군데 마트를 돌며 판매원과 고객을 대상으로 와인 판매동향조사에 나섰다. 결론은 주로 매대 진열제품이나 행사상품을 구매한다는 것. 당시 유행하던 캠핑용품과 묶음행사로 판매하자고 제안했다.



#당황해도_당황하지_않은_척 #소신있게_답하라
다음은 PPT 발표면접, 임원면접, 인성검사를 통과해야 했다. PPT면접은 1차 과제전형 때 제출했던 자료를 바탕으로 10~15분간 발표한 뒤 20분간 면접관과 문답을 주고 받는 시험이다. 당시 타사 브랜드와 비교한 마주앙 인지도 설문조사 결과를 제출했는데 면접관으로부터 ‘두 제품은 판매처가 달라 비교할 수 없다’는 지적이 들어왔다. 또 김 씨가 제안한 프로모션도 이미 회사가 시행한 것이었다. 하지만 김 씨는 ‘가장 중요한 포인트라 생각해 다시 한 번 언급한 것’이라고 당당하게 답했다.
“사실 많이 당황했어요.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었거든요. 그래도 자신감 없는 모습을 더 안좋게 보실 것 같아 최대한 당당하게 답했고 덕분에 합격한 것 같아요. 지금도 가끔 입사 조언을 구하는 후배들이 있는데 ‘소신있게 답하라’고 말해주죠.”
약 30분의 인성면접은 자신을 묻는 시험이었기에 거짓만 없다면 어렵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대학 활동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라는 질문에 1년간 자전거 동호회에 참석했던 이야기를 했다. ‘어떤 역할을 했는지’ 다시 질문이 이어졌다.


“마침 대부분 40대이고 제가 막내여서 모임글 게시나 잡무를 다 담당했어요. 특히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과 소통한 게 입사 후에 종업원이나 업주와 일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답했죠.”
면접까지 합격한 김 씨에게 7~8월, 인턴실습 기회가 주어졌다. 방이동 상권에 배정받아 다양한 프로모션을 해야 했다. 8주간 조원들과 할인 이벤트가 적힌 전단지를 만들어 돌리거나 맛집거리에 클라우드 스트릿을 만들어 게임을 진행하며 쉴틈없이 발로 뛰었다. 점심시간에 근처 회사원들에게 생수나 미숫가루를 나눠주면서 “저녁에는 물을 타지 않은 클라우드를 마시라”는 재치만점 멘트도 날렸다.
한 여름, 쓰러질 만큼 힘들었지만 그에게 직무경험과 사람을 안겨준 값진 시간이었다. 8주간의 활동을 녹여낸 조별 PPT발표와 개별 임원면접을 거쳐 마침내 2015년 9월, 정식 신입사원이 됐다.


#담당업소_210개 #여자라서_안_되는_일은_없다
김 씨는 현재 잠원동과 서래마을 일대의 상권을 총괄하고 있다. 담당 거래처 수는 약 210개. 이중 15~20개 업소를 매일 들른다.
“대부분 업주가 잘 대해주지만 정말 무관심한 분도 있어요. 그럴 때는 자주 방문하는 게 최고죠. 출력물이나 판촉물 재고를 독촉하는 경우도 있는데 처음에는 안절부절못했지만 요즘은 많이 친해져서 ‘정말 없어서 못 드린다’고 아예 당당히 말해요. 그럼 ‘다음에 제일 먼저 챙겨 달라’며 웃으며 넘어가주시죠.”
경쟁사 영업사원과의 에피소드도 빼놓을 수 없다. 등신대나 포스터 위에 자사 출력물을 덧붙이는 것은 기본, 한 번은 클라우드 모델인 AOA 설현의 등신대 절반을 잘라간 적도 있다. 잠깐의 기싸움(?)을 거쳐 요즘은 다행히 타협 단계에 들어갔다. 서로 겹치지 않는 제품군에 한해 친한 업주에게 상대방 제품을 적극 추천하기도 한다. 포스터 역시 업체별로 사이좋게 구역을 나눠 붙인다. 특별한 날, 이를 테면 ‘사장님이 뜨는’ 비상상황에는 서로의 구역을 내어주기도 한다.



“본격 영업이 개시되는 오후 6시부터 9시까지는 주로 장사가 되지 않는 곳을 찾아가 업주와 이야기를 나눠요. 대부분 다른 영업점 상황을 꼭 물어보는데 그럴 때면 ‘그래도 여기는 있는 편’이라며 위로를 건네기도 하죠. 그래서 예전엔 업주들과 술도 많이 마셨다고 하는데 요즘은 주류영업사원이어도 술을 마실 일이 거의 없어요.”
‘무한 긍정맨’인 그이지만 사람을 상대하는 데서 오는 피로함은 어쩔 수 없다. 업주, 종업원은 물론 심지어는 발레파킹 직원이 ‘월 100만원은 받느냐’ ‘대학은 나왔느냐’며 상처를 주기도 한다. ‘개인 연락처를 알려 달라’고 집요하게 괴롭히는 사람도 있다. 예쁜 옷차림의 사회인 친구들이 부러울 때도 있다. 입사 전 그렸던 ‘커리어우먼’으로서의 모습과 달리, 구두를 신다 발뒤꿈치에 온통 까만 상처 딱지가 내려앉을 만큼의 고통을 맛본 후로는 매일 편한 옷과 신발을 고집해야 하는 현실이 속상하기도 하다.



하지만 보람이 더 크다. 특히 업계 특성상 여성 직원이 많이 없다보니 업주들이 쉽게 기억하고 친절하게 대해준다. 이모 업주와의 공감대 형성은 덤. 또 길거리에 직접 만든 배너나 간판이 줄지어 서 있는 것을 바라볼 때의 뿌듯함도 쏠쏠하다.
“정말 무서웠던 업주 언니가 있어요. 처음엔 신입사원을 배치했다며 엄청 불평하셨죠. 하지만 굴하지 않고 매주 찾아가서 사소한 이야기까지 건네다 보니 지금은 거의 절친이 됐어요. 네일아트나 화장품 정보도 나누고 가끔은 남자 업주를 상대로 변호도 해주시죠. 직업과 함께 사람까지 얻은 거예요.” “저도 취업준비 할 때 ‘캠퍼스 잡앤조이’를 많이 읽었어요. 그래서 후배들에게 취업 조언을 남기고 싶어요. 처음 입사 준비할 때, 여자라서 안 될 거라는 충고를 많이 들었어요. 그러나 제가 정말 잘 할 수 있는 일이었기에 도전했고 마침내 성공해서 재미있게 일하고 있죠. 여러분도 원하는 일이 있다면 포기하지 말고 계속 노력하세요.”
이도희 기자(tuxi0123@hankyung.com)사진=이승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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