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절대 잊으면 안 되는
일본의 10가지 만행
1. 731부대 마루타 실험
일본 731부대에서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끔찍한 생물학 무기 개발을 위해
인간을 생체실험 재료로 사용했다.
그 대상은 한국인, 러시아, 몽골인 등의 전쟁포로.
어린아이,노인, 여성, 심지어 임산부를 대상으로
온갖 잔인한 실험을 벌였다.
희생된 사람은 최소 3천명, 감염된 사람은 수 만명에 이를 것이라고 추정된다.
2. 우키시마호 사건
1945년 8월 15일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독립 한 날.
일본으로 강제 징용되었던 약 9천명의 한국인들을
우키시마호에 태워 부산으로 향하고 있었다.
우키시마호는 예정 항로를 벗어난 곳에서
일본군 200여명을 하선 시키고,
한국인들을 배 밑 선창으로 내려가도록 지시했다.
그 후 세번의 폭발음과 함께 우키시마호는 침몰.
이 사건으로 약 7500명의 한국인이
고국의 땅을 밟지 못했고,
이후 유가족들의 진상규명요구도 무시되었다.
3. 콘크리트로 범벅된 국보
우리나라를 포함해 동아시아에서 가장 큰
미륵사지 석탑.
1910년에 벼락을 맞아 무너진 후
6층 밖에 남지 않았는데,
1915년 일본이 석탑을 수리한다며
콘크리트로 덧씌워버렸다.
결국 석탑은 안정성의 문제로 해체하게 된다.
일본이 덧씌운 아스팔트는 무려 185톤에 달한다.
4. 후쿠자와 유키치
일본 지폐 1만엔에 새겨진 인물 후쿠자와 유키치.
후쿠자와 유키치는 문명국이 되기 위해
서양 문물을 수용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 사상은 우둔한 민중을 문명화 시켜야 한다는
제국주의와 군국주의적 사상으로 변질?다.
아직도 일본은 그를 근대화의 상징이자
오늘날 일본을 만든 인물로 여긴다.
5.길목에 버려진 시신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열린
일왕 생일잔치에 폭탄을 던진 윤봉길 의사.
현장에서 체포된 윤봉길 의사는 총살형으로 사망했다.
일본군은 추운 겨울 윤봉길 의사의 시신을
공동묘지 관리소 가는 길목에 매장하는데,
이 지점은 쓰레기 하차장이라고 한다.
윤봉길 의사의 시신은
광복 후에야 박열이 수습해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6. 조선 동물
일본은 일본인 이외의 아시아인은 미개하다는
논리를 내세우며 나머지 아시아인을 짐승 취급한다.
일본은 오사카 박람회에 조선인 2명을 전시하고,
이 외에도 타이완, 류큐 등에서 데려온
다른 아시아인도 전시한다.
살아있는 사람을 전시하여
구경거리로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시대.
일본인은 런던박람회에서 구경거리가 되어본
경험이 있음에도 똑같은 행동을 일삼았다.
7. 강제징용 미국엔 사과했다.
일본정부와 전범기업은
교묘한 말장난을 통해 조선인 강제징용에
강제성이 없었다고 회피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 전범기업 미쓰비시 그룹은
전쟁포로 신분으로 노역에 동원된 미국인들에게는
직접 90도로 머리 숙여 사과했다.
조선인이 강제 징용된 지역에
역사적 기록을 남기는 것도 꺼리는 일본의
이중적인 태도를 알 수 있다.
8. 창경궁 훼손
경사가 가득한 집이라는 의미의 창경궁.
일제는 조선왕조를 말살하기 위해서 창경궁을 훼손했다.
1909년 3월 25일 궁 안에 동물원을 만들고,
식물원과 박물관도 잇따라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궁궐에
일본식 정자를 짓고 당시 일본 국화인 벚나무를 심었다.
1911년에는 창경궁의 이름도
‘원(苑)’으로 격하시켜 ‘창경원’ 이라고 불렀다.
9. 관동 대학살
1923년 일본 간토 지방에서
규모 7.9의 대지진이 발생하면서
약 10만여명의 희생자가 발생한다.
이로 인한 민란의 조짐을 차단하기위해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타고 폭등을 일으킨다.” 는
유언비어를 퍼뜨린 후 계엄령을 선포.
그 결과, 일본 군인과 경찰, 자경단은
무고한 조선인 6천명을 학살한다.
10. 코 무덤(귀 무덤)
일본 교토시에 위치한 코 무덤.
많은 이들이 일본 관광지로 꼽는 교토에서
찾을 수 있는 우리의 슬픈 역사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과 보고용으로
조선인의 코를 잘라 소금에 절여 보내라고 명령한다.
병사들은 1인당 3개의 코를 보냈고,
현재 교토 코무덤에는 조선인
12만 6천명의 귀와 코가 묻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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