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다른 감성의 작가들 - ② “퇴근 후 맥주 한 잔 함께하는 ‘동네언니’가 될래요.” 최현정 작가

그림=최현정 작가


한 때 ‘힐링’이라는 단어가 서점을 강타한 적이 있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그만큼 ‘아픔’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당연시되어버린 시대가 도래했다는 의미기도 하다. 그러나 이 시대에 어쭙잖은 ‘힐링’ 대신, 톡 쏘는 ‘돌직구’를 택한 이들이 있다. 현대를 살아가는 냉소적인 ‘빨강머리N’을 그린 최현정 작가를 만났다.


남다른 감성의 작가들 - ② “퇴근 후 맥주 한 잔 함께하는 ‘동네언니’가 될래요.” 최현정 작가

그림=최현정 작가


낭만적인 빨강머리 앤은 NO! 냉소적인 ‘빨강머리N'이 왔다!


“엘리자가 말했어요. 세상은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건 정말 멋지네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일어나는 걸요.” 빼빼 마른 몸매에 주근깨가 가득한 얼굴, 거기에 곱게 땋은 빨강 머리까지. 어렸을 적 일요일 오전마다 TV 앞으로 어린이들을 불러 모은 빨강머리 앤. 이 사랑스럽고 낭만적인 소녀가 이 시대를 살아간다면? 낮에는 회사원으로, 밤에는 일러스트를 그리고 책을 쓰는 최현정 작가는 그동안 쌓인 회사생활의 스트레스를 일러스트로 솔직하게 풀어냈다. 그 일러스트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빨강머리 앤’이다. 솔직하고 유쾌한 일러스트와 글에 많은 사람이 공감했고, 그 결과 책 <빨강머리N>은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작년에 휴직했어요. 잦은 야근과 주말근무, 그렇게 7년 정도 생활을 하다 보니 몸도 마음도 쉽게 지치더라고요. 일을 잠시 쉬는 공안 많은 생각을 했어요 ‘그동안 쌓인 감정들을 어떻게 풀어내야 할까?’ 고민도 많았죠. 나는 이렇게 지쳤는데, ‘희망’과 ‘긍정’에 대해 이야기하는 세상에 대한 반발심이었는지도 몰라요.” 휴직 기간 동안 그녀는 자신의 ‘부정적이고 나약한 모습’에 집중하고자 생각했고, 우연히 ‘빨강머리 앤’을 떠올렸다고 말했다. 그러다 최 작가는 ‘지금 이 시대를 빨강머리 앤이 살아간다면, 아무리 긍정적인 그녀일지라도 냉소적으로 바뀌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됐고, 그렇게 ‘빨강머리 N’이 탄생한 것이다.


남다른 감성의 작가들 - ② “퇴근 후 맥주 한 잔 함께하는 ‘동네언니’가 될래요.” 최현정 작가

그림=최현정 작가


진짜 내 주변의 이야기, ‘버티는 삶’에 대하여


“<빨강머리 N>에 나오는 이야기의 85%는 실제 저의 경험담이고, 나머지 15%는 각색이에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보여주지 않는 이유는 시커먼 마음에도 색동옷을 입혀서 내보내야 사람들이 받아들일 때, 그래도 한 번은 피식 웃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기 때문이죠.” 특히 최 작가는 온갖 진상 행동을 다 하는 ‘김 부장’ 캐릭터에 대해서는 특정인을 두고 구성했다기보다, 보고 들었던 모든 상사의 안 좋은 점을 다 꺼내 몰입시킨 캐릭터라 설명했다.


희망적인 미래에 대해 예견하듯 써내려가는 자기개발서와 달리 혹독한 현실에 관해 이야기하는 그녀는 줄곧 이렇게 강조했다. “꾸준히 열심히 하되,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말자.” 그녀는 열심히 한다고 다 성공하는 사회는 지나갔다고 말했다. 단, 성공한 사람은 다 열심히 했으니, ‘꾸준하게 열심히 하는 것’은 변치 않은 성공의 진리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열정페이’ ‘헬조선’이라는 단어가 난무하는 사회에서 현실적으로 ‘희망과 기대’만으로 삶을 살기에는 무척 벅차다고 말을 이었다. “그러니 우리 모두 하루하루 열심히 살되, 큰 기대는 하지 말아요. 버티는 삶을 사는 거죠. 이런 사회에서 버티는 것만으로도 참 훌륭한 것이거든요.”


남다른 감성의 작가들 - ② “퇴근 후 맥주 한 잔 함께하는 ‘동네언니’가 될래요.” 최현정 작가

그림=최현정 작가


“동네에 가면 있을 것 같은 백수 언니가 되어줄래요.”


인터뷰 내내 호탕하고, 유쾌했던 그녀는 기억에 남는 리뷰가 있냐는 질문에 ‘동네 언니랑 술을 마신 것 같다’는 댓글이 가장 고마운 답변이었다고 답했다. “잠깐은 자기개발서가 위로도 돼요. 하지만 그런 책이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순간이 오죠. 그때 알았어요. 누군가 써준 글과 그림이 나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칠 수는 없다는 것을요. 그래서 저는 제 그림과 글을 보고 그냥 사람들이 하루에 한 번 웃으시면 좋겠어요.”


차기작에 대해서 그녀는 조금 더 에세이다운, 구체적인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 말했다. 이제는 개인적인 이야기가 아닌, 더욱 넓은 사회 전반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가 단 한 가지 변하지 않을 것에 대해 약속했다. “일상 속에 소소함을 나누는 그런 작가가 되고 싶어요. 언제까지나 힘들 때 전화해서 상사를 같이 욕해줄 수 있는 작가, 함께 맥주 한잔 마실 수 있는 그런 작가 말이에요.”


지연주 인턴기자 sta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