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원 박영선
잘나가던 ‘스타 기자’였다. LA 특파원, 경제부장을 지냈고 자신의 이름을 딴 인터뷰 코너를 진행하기도 했다. 그의 이름은 박영선. 2000년대 초반 방송을 그만뒀으니, 기자 박영선이 생소한 이들은 국회의원 박영선을 떠올릴 수도 있다. 저격수, 송곳 질문, 민주당 서울시장 후보로, 17·18대 국회의원을 지내며 당내 대표 주자로 부상한 박영선 의원 말이다.
그는 자기 목소리를 잘 내는 사람이다. 기자, 앵커로서는 두말할 나위가 없다. 정치를 하면서도 이견이 많던 금산분리법 등을 통과시키는 데 앞장섰고, 검찰 개혁을 부르짖기도 했다. 날카로운 질문으로 총리 후보 낙마의 공신(?)이 된 일은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다.
한 아이의 어머니기도 하고, 도전을 거듭하는 커리어 우먼이기도 하다. 그의 젊은 과거, 꿈과 인생철학이 궁금했다.
박영선 국회의원은
1960년 생
1982년 경희대 지리학과 졸업
1999년 서강대 언론대학원
1982년 MBC 입사
1995~1997년 MBC LA 특파원
2003년 MBC 보도국 경제부 부장
2000~2002년 경희대 언론정보대학원 겸임교수
2004년 열린우리당 대변인
2004~2008년 제17대 국회의원
2008년~현재 제18대 국회위원(구로을)
2011년 민주당 정책위의장
수상
2010년 제9회 대한민국을 빛낸 21세기 한국인상 정치 공로 부문
2011년 우수국회의원연구단체시상식 우수상
저서
박영선의 인터뷰 사람 향기 미리 밝히자면, 인터뷰 한 달 전쯤 우연히 길에서 박영선 의원을 만났다. 멀리서도 큰 눈이 단번에 보일 정도로 눈에 띄었는데, 차마 가까이 가진 못했다. ‘잘못 걸렸다간 큰일난다’는 선입견 때문이었다.
국회의원 회관에서 만난 박 의원의 큰 눈과 카리스마는 여전했다. 하지만 인터뷰를 하기 위해선 눈을 똑바로 봐야만 한다. 기자에게는 대선배이자, 성공한 여성의 본보기로 배울 점 또한 많지 않은가. 인터뷰 전문가(그는 인터뷰 서적을 출간하기도 했다)가 인터뷰이가 되면 어떤 대답을 할지 한마디 한마디에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었다.
어느 순간이었을까. 대화에 속도가 붙고 있었다. ‘강성 이미지’의 벽을 걷어내자 표정, 몸짓, 언어를 통해 ‘인간 박영선’의 존재가 오롯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기자보다 더 하고 싶은 게 있었다’
모범생. 박영선 의원이 말한 자신의 어린 시절 모습이다. 주도적인 반장이었고, 부모님 말씀 잘 듣는 딸이었다. 외교관을 꿈꾸며 공부에 매진했던 시절. 여성스러움(?)과는 다소 거리가 멀었다고 한다.
“보이시하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같은 반에 인기가 많은 여학생이 있었는데 저와는 달리 여성스러웠죠. 왜 인기가 있나, 그 친구와 내가 뭐가 다를까 고민하던 기억이 있어요.”
공부만 알다가 중학교 때 처음 대중가요를 접했다. 라디오 프로그램을 통해 노래와 기타의 매력에 빠졌다. 고등학교 땐 방송반이 하고 싶었다. 선생님과 아버지는 ‘공부에 방해가 된다’며 반대했다. 박 의원은 순종과 반항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했다.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거 있잖아요. 방송기자는 반발 심리로 생긴 꿈인 것 같아요.”
남보다 늦은 고2 말, 방송반에 합류했다. 대학 시절에는 보다 자유롭게 방송반 활동을 했다. 대학 4학년 때 MBC 공채에 단번에 합격, 진짜 방송국으로 가는 길이 활짝 열렸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다소 실망을 했다고 한다.
“대학 시절엔 방송 이외에 교수에 대한 꿈도 있었거든요. 공부도 즐겁게 한 터라 교수와 방송기자 사이에서 고민을 했어요. 공채 합격 후 학과 교수님께 상담을 요청했죠. 은근 대학원에 진학하라는 답을 기대했는데, 교수님이 ‘너는 방송기자가 제격이다’며 축하해 주시더라고요. 실망을 좀 했죠.(웃음)”
반발심과 실망감, 스타 기자의 시작이 좀 의외다. 기사를 ‘작품’으로 만들다
고민도 잠시, 직장 생활은 많은 도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입사 1년 차, 23세의 나이에 덜컥 심야 뉴스 단독 앵커를 맡게 됐다. 통금 제도가 해제된 직후여서 큰 화제가 됐다.
“밤에 여자가 나오는 것 자체가 파격이던 때예요. 당시 MBC 사장이 워싱턴 특파원 출신이었는데, 미국에서는 바바라 월터스가 뉴스를 장악하던 때였거든요. 한국에도 여성앵커시대를 열어보자 해서 시작하게 됐어요.”
그런데 오디션에 합격한 이유가 흥미롭다.
“기자, 아나운서들이 오디션을 치렀는데, 가장 예쁜 동기 한 명이 선발됐어요. 그런데 사장이 ‘뉴스 앵커가 너무 예쁘면 사람들이 얼굴만 본다. 적당히 생긴 사람으로 뽑아야 한다’고 해서 제가 발탁이 된 거죠.”
박영선 기자로 사는 동안, 여러 시도를 거듭했다. ‘처음’이라는 타이틀이 뒤따라 붙었다. 아침 뉴스 프로그램 첫 여성 메인 앵커, 문화방송 최초의 여성 해외특파원 등이 그것이다.
“기자 생활 하면서 제일 재밌던 시절이 LA 특파원 때예요. 한국 기자로서는 처음으로 미국영화인협회를 출입하면서 할리우드 스타들을 만났어요. 스티븐 스필버그, 소피아 로렌 등 세계 정상 스타들을 인터뷰했죠.”
박영선 하면 앵커 혹은 경제전문기자라는 타이틀이 떠오르지만, 사실 그가 가장 관심을 보였던 분야는 ‘다큐멘터리’다.
“보도제작부에서 다큐멘터리 기자를 한 적이 있어요. 60분짜리 방송인데, 대표작이 ‘중소 북경지대를 가다’ ‘세계 백년’ 등이었어요. 다큐멘터리라는 게 내 눈에 포착된 하나를 집중적으로 파헤치는 것이거든요. 지금 생각해보면 뉴스 진행보다 더 흥미가 있었고, 적성에 맞았던 것 같아요.”
다큐멘터리에 대한 관심과 욕심은 그의 예술적 끼와 관계가 있다. 유치원 대신 KBS 어린이 합창단에 들어갔고, 한때는 예원중학교에 입학할 생각을 했던 박 의원이다. 대학 때 ‘퐁퐁4중창단’이라는 중창단에서 활동한 전력(?)도 있다. “노래를 잘했는데 개성을 살려서 더 발전시켜볼걸 하고 후회할 때도 있어요. 지금도 속상할 때 음악을 많이 듣죠. 가요, 클래식, 가리지 않아요.”
못다 핀 예술의 열정을 그는 방송에 투영했다.
“하나의 작품을 만든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포착하고 싶은 화면과 그에 걸맞은 음악, 스토리를 엮는 일이었어요. 때로는 언어 없이 화면과 음악만으로 메시지를 전달할 때가 있는데 더욱 감동적이죠.”
다큐멘터리뿐 아니라 뉴스에 음악을 삽입하는 새로운 시도를 하기도 했다.
“당시엔 그런 게 없었거든요. 지금으로 치면 뮤직비디오 비슷하게 만든 건데, 반응이 좋았어요. 가수를 정통 뉴스에 출연시키기도 했어요. 가수 해바라기를 인터뷰하고, 제2의 통기타 붐이라는 테마로 접근하는 식이었죠.”
문화 쪽으로 더 발전시키지 못한 것은 지금도 아쉬운 부분으로 남아 있다고 한다. “정치, 아직 잘 몰라”
기자 22년 차, 경제부장을 끝으로 정치에 입문한 박영선. 또 다른 도전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
“정치는 꿈꾸던 직업이 아니에요. 흔쾌히 시작한 것도 아니고요. 처음에는 ‘민주화 운동을 했던 친구들에게 빚 갚자’는 생각으로 했고, 18대 때는 ‘나를 뽑아준 사람에게 봉사한다’는 생각으로 임했어요.”
장고 끝에 결정한 것이지만 정치의 개념을 정리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정치는 1+1이 2가 아닌 세계인데, 처음에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어요. 지금도 갈등이 있지만 피할 수 없는 거구나 해서 받아들여요. 정치는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이렇게 말하지만 대변인, 부대표, 정책위의장, 서울시장 후보 등 중요한 직함을 두루 맡아온 그가 아닌가.
“나에게 주어지는 일을 했어요. 다만 자신 없는 일은 아무리 권유를 받아도 하지 않았어요.”
사실 박 의원은 원칙주의자로도 유명하다. 자신을 정치로 이끌어준 사람에게 “당 의장 시절 얘기를 한번 해볼까요?” 하며 대립각을 세운 일로 기사에 여러 번 언급되기도 했다.
“비록 손해를 보더라도 지켜야 하는 것은 잘 깨지 않으려고 해요. 그래서 사람들이 강하다고 생각하는데 실제로는 반대 면도 많아요. 남녀를 떠나서 리더는 강하다고만 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17대 의원 시절엔 여당이었고, 지금은 야당에 소속돼 있다. 8년간 느낀 소회가 궁금하다.
“후회되는 게, 여당일 때 더 큰 틀에서 상대를 보듬어줬어야 하는데 그렇게 못했어요. 지금 여당이 그래요. 포용력이 중요한데 그게 쉽지 않죠.”
박 의원의 커리어에서 주목할 점이 하나 있다. 대학 졸업 전 취업을 해서 20년 넘게 회사 생활을 했고, 쉴 틈 없이 곧바로 정치에 입문했다는 점이다. 게다가 20대 초반에 얼굴을 알리고 30여 년간 유명 인사로 살았다. 지친 적은 없었을까.
“그럴 땐 목표를 재확인하고, 수정했어요. 기자 시절에는 ‘좋은 작품을 만들어보겠다’는 목표가 있었고, 지금은 ‘기회가 균등한 사회를 만드는 데 일조하겠다’는 목표가 있어요. 슬럼프가 오면 ‘저 사람을 인터뷰해보고 싶다’ ‘특파원을 해보고 싶다’ ‘법을 바꿔보고 싶다’ 나름대로 세부 목표를 바꿔가며 극복했죠.”
박영선에게 회사원으로서의 삶, 정치인으로서의 인생은 각기 다른 의미를 지닌다.
“기자는 전문직으로 일 자체를 좋아했어요. 좋아하는 일은 행복과 함수 관계를 같이하죠. 정치는 행복하진 않아요. 즐기기에는 너무 무겁고, 책임이 커요. 세상을 바꾸려면 싸워야 하니까 힘들고 자기를 규제하는 자정 능력도 필요하고요. 정치는 행복이 아닌 보람의 문제예요.” “즐거운 일을 찾아서 하라”
박 의원이 대학생에게 하고 싶은 말은 바로 “힘든 시기를 경험해보라”는 것이다.
“대학 1학년 때 좌절을 많이 했어요. 원했던 학교와 학과를 가지 못했거든요. 미팅도 하지 않았어요. 대신 대학 생활을 더 진지하게 하기로 결심했죠. 극복하기 위해서 교수가 되리라는 목표를 정하고 공부했어요. 4년 내내 장학금을 받았죠. 스스로에 대한 보상 심리였어요.”
그는 이어서 “좌절을 한 번쯤 겪어볼 필요가 있고 또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기자가 돼서 많은 사람을 만났는데 좌절 없이 큰 사람은 매력이 없더라고요. 남에 대한 배려도 모르고 자기 세계에 빠져 있어요. 힘든 시기를 겪되, 스스로 극복해보는 것! 그것이 중요해요.”
직업 선택을 말할 때는 ‘성장주’에 비유해 설명했다. 주식 투자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젊은 시절엔 이미 고점을 찍은 직업보다는 성장할 분야가 무엇인지를 찾는 게 중요해요. 저 같은 경우 일간지 시험을 치러서 떨어졌어요. 그런데 지금 돌아보면, 성장 산업은 방송이었죠. 발전 가능성을 보고, 무엇보다 즐거운 일을 찾아서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는 또 “최선을 다하고도 되지 않으면 어쩔 수 없지만,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서 남을 탓하거나 불평하는 건 잘못된 것 같다”고 조언했다.
“해보고 싶다는 자기 동력이 필요해요. ‘하고 싶다’ ‘되고 싶다’고 우러나오는 것. 또한 성공하기 위해선 집중력이 있어야 하죠.”
사실 한 번의 짧은 만남을 통해 사람을 온전히 이해하기는 어렵다. 다만 인터뷰 후 한 가지는 분명하게 깨달았다. 말 걸기가 무섭던 박 의원이었는데, 지금은 더 많은 얘기를 듣고 싶어졌다는 사실이다. 포착! 한마디
▶ 여자라서 유리할 때 vs 불리할 때
80년대부터 여성으로서 사회생활을 하며 사회 장벽, 즉 유리 천장을 경험한 일은 없을까.
“여자라서 유리했던 것도 있고 불리한 경우도 있었는데 비율로 따지면 49 대 51 정도라고 할까요. 기자 시절의 예를 들면 고 정주영 회장이 저를 기억하곤 제가 질문하면 대답을 했어요. 출입기자 중 유일한 여성이었거든요. 국회에서도 마찬가지예요. 여성 국회의원이기에 인맥이나 학맥에서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고, 검찰 개혁이나 경제 정의를 추진하기에 유리한 것 같아요. 어려운 점은 한 번 잘못하면 더 도드라져 보이고, 그래서 더 조심해야 한다는 거죠. 기자 시절엔 인정받기 위해서 남보다 두 배로 노력했어요.”
▶ 기억 속 폐지 줍는 할아버지
각국 정상을 비롯해 세계를 움직이는 스타, 수필가 피천득, 추기경 김수환, 비디오아티스트 백남준 등 유명 인사를 두루 만나 인터뷰한 박영선 의원, 아니 박영선 기자. 가장 기억에 남는 인터뷰는 무엇일까.
“가슴에 남아 있는 사람은 안산에서 폐지 수거를 하며 사는 한 할아버지예요. 이산가족상봉 취재 때 만났는데, 평양에서 50년 만에 부인을 만났는데 한동안 할아버지가 말을 한마디도 안 하고 부인만 계속 보고 있는 거예요. 나중에 여쭤보니 “내 마누라인지 확신이 안 서서 그랬지”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이분이 한 달에 25만 원을 벌어서 사시는데, 평생 부인을 그리워하며 혼자 사셨대요. ‘이렇게 사는 분도 있구나’ 생각할 때마다 제 자신이 겸손해져요.”
글 이현주 기자 charis@hankyung.com│사진 김기남 기자 kn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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