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로 보는 스포츠 영웅 이야기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정지용 시인의 대표작 ‘향수’의 한 구절이다. 이 시가 묘사하는 아름다운 마을은 정지용 시인이 태어난 ‘충북 옥천’. 금강이 한가운데를 가로지르고 동쪽으로는 소백산맥이 수려한 자태를 뽐내는 ‘청풍명월’의 고장이다. 이곳에서 자라난 한 소년의 꿈은 옥천의 순박한 이미지처럼 작고 소박했다.

배구 특기자로 대학에 입학해 고향의 학교에서 체육 교사가 되는 것. 하지만 이 시골 소년은 배구공을 처음 잡은 지 10년여 만에 세계 최고의 오른쪽 공격수로 선정됐고 그 덕분에 이름 석 자 앞에는 ‘월드 스타’라는 별칭이 늘 따라다녔다. 그 소년의 이름은 김세진. 코트를 떠난 지금도 각별한 배구 사랑으로 공중파 방송에서 해설가를 맡고 있기에 올드 팬이 아니더라도 들어봤음직한 이름이다.
한국의 김세진이 아르헨티나 미린코빅,말리의 브로키을 피해 오픈 강타를 날리고 있다.

      시드니=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한국의 김세진이 아르헨티나 미린코빅,말리의 브로키을 피해 오픈 강타를 날리고 있다. 시드니=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197cm 운명을 가른 그의 키

김세진이 처음 배구공을 잡은 것은 옥천 삼양초 4학년 때. 병치레가 유난히 잦은 허약 체질임에도 공에 대한 센스 하나는 충만한 선수였다. 하지만 문제는 키가 너무 작았다는 것. 옥천공고 1학년 때 그의 키는 170cm로 남고생 평균보다 조금 클까 말까한 정도였다. 당시 그의 포지션은 다른 선수들이 공격할 수 있도록 공을 띄워주는 ‘세터’였다.

큰 키가 비교적 필요 없다는 이유였지만 170cm는 사실 세터로 뛰기에도 턱없이 부족한 신장이었다. 작은 키 때문에 한때 배구를 포기할까하는 생각도 여러 번 했을 정도. 하지만 고교 2학년이던 1990년 한 해 동안 23cm나 자라 190cm를 훌쩍 넘겼다.

키가 커지니 포지션도 ‘공격수’로 바뀌었다. ‘그저 그렇고 그런 선수’였던 김세진의 진가는 이때부터 드러났다. ‘그저 그렇고 그런 팀’이던 옥천공고를 전국체전 준결승으로 이끌며 주목을 받게 된 것. 그의 존재는 왼손 스파이커 부재로 고민하던 한국 배구에 커다란 희망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고교 졸업이 얼마 남지 않았던 그에게 잊지 못할 졸업 선물이 주어졌다. 태극 마크, 최연소 국가대표로 발탁된 것이다.



7.43 1994 월드리그에서 기록한 세트당 공격 성공 수

대학 시절 김세진은 두 가지 신조어를 만들어냈다. 지금은 조금 진부하게 느껴지지만 당시에는 사회 현상으로 분석되기까지 한 ‘오빠 부대’가 첫 번째다. 뛰어난 실력에 훤칠한 키, 수려한 외모를 가진 그에게 소녀 팬들이 몰려든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 모 일간지에 ‘풀잎 같은 남자’로 소개되기도 하는 등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두 번째는 ‘월드 스타’다. 요즘은 가수 비(현 정지훈 이병) 앞에 주로 붙지만 원조는 김세진이다. 그 별칭을 있게 한 대회는 배구 강국만 모인 ‘1994년 월드리그’. 전년도 아시안게임에서 교체 멤버였던 그는 이 대회부터 스타팅으로 나서며 ‘국제 대회에서도 통하는 선수’로 각인됐다. 김세진은 이 대회 C조 예선 12게임에 모두 출전, 670개의 공격을 날려 84득점과 265득권을 올리며 성공 349개로 세트당 평균 7.43개의 공격을 성공시켜 이 부문 1위를 차지했다. 베스트 6에 오르며 ‘세계 최고의 오른쪽 공격수’로 등극한 그에게 ‘신예’ ‘미완의 대기’라는 기존 별명 대신 ‘월드 스타’라는 새로운 별칭이 붙기 시작했다.



9연패(連覇)
그의 소속팀 삼성화재가 만들어낸 불멸의 기록

대학 졸업 후 화려한 실업 무대 데뷔를 꿈꿨지만 부상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1995년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당한 무릎 부상이 재발해 코트는 고사하고 수술대에 오를 수밖에 없었던 것. 소속팀 삼성화재는 주장 김세진을 포함해 많은 선수가 부상에 시달려 당시 가장 큰 대회인 ‘슈퍼리그’에 불참할 수밖에 없었다. 재활을 끝내고 코트에 돌아온 김세진은 더욱 강력한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백어택의 파워는 전보다 강해졌으며, 블로킹 타이밍은 더욱 정확했고, 비껴 치는 스파이크는 정교해졌다. 월드 스타의 눈부신 활약은 소속팀 삼성화재의 돌풍으로 이어졌다. 1997년 슈퍼리그에서 창단 2년 만에 우승을 따내더니 김세진의 은퇴 전해인 2005년까지 9연패(9년 연속 우승)라는 금자탑을 쌓았다. 2001년부터 2004년까지 ‘77경기 연승’은 앞으로 가장 깨지기 힘든 기록 중 하나로 손꼽히기도 한다. 삼성화재의 9연패·77연승 신화를 김세진 혼자만의 공으로 돌리기는 힘들다. 하지만 기록은 기억한다. 그 9년 동안 김세진이 무려 5회 MVP를 수상했다는 것, 그리고 그가 은퇴한 2006년 삼성화재가 우승에 실패했다는 것을 말이다.
[Milestone]월드 스타가 된 시골 소년 김세진
글 양충모 기자 gaddjun@hankyung.com│사진 한국경제신문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