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쟁이로 20년, 길쟁이로 5년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핀 4월의 제주올레길에서 서명숙 이사장을 만났다. 영국 출장을 마치고 바로 서울에서 열린 교보생명환경대상 시상식에 참석했다가 새 올레길(18코스)의 개장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새벽 비행기로 내려오는 길이라고 했다.

느리게 걷는 길의 의미를 강조한 그이지만 쉴 새 없이 몰려드는 언론사의 취재 요청과 사람들의 사인 공세에 응하느라 ‘꼬닥꼬닥(천천히)’ 걷는 여유를 즐기기는 힘들어 보였다.

그런데도 그의 걸음엔 여유가 있었다. 거리에서 만난 이들이 인사를 건넬 때 그는 일일이 눈을 마주치며 웃었다. 도라지 파는 할망(할머니)과 한참을 서 이야기를 나누었고 엄마 아빠와 올레길을 찾은 아이들을 만날 때면 걸음을 멈추고 말을 붙였다.
[나의 꿈 나의 인생] 그녀가 들려주는 행복의 법칙
특종 경쟁에 시달리는 언론인으로서의 치열한 삶, 느리게 걷기 열풍을 일으킨 제주올레 이사장으로서 또 한 번의 치열한 삶. 하나의 꿈도 이루기 힘든 세상에서 두 가지 꿈을 성공적으로 이뤄낸 그에게 꿈꾸는 대로 사는 법을 물었다.

“방황하는 청춘이었죠.” 대학 시절의 모습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서명숙 이사장의 첫 마디 대답이었다. 대부분의 젊은이가 그렇듯 그 역시 진로를 고민했다. 그러나 1970년대 유신 시절 대학생들의 고민은 21세기를 사는 현재 대학생들이 걱정하는 것과는 사뭇 달랐다.

서 이사장의 가장 큰 고민은 사회 운동과 취직 사이에서 진로를 선택하는 일. “민주화 운동하다가 감옥에 간 친구들을 보면 내 앞날만 생각하는 게 부도덕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렇다고 아주 굳건한 운동권도 아니었고요.” 이기적이지도 이타적이지도 못했던 20대의 그는 양쪽 경계선을 넘나들며 고민했다. 그리고 선택한 것이 기자라는 직업이었다.

기자의 꿈은 10대 때부터 키워온 것이었다. 중학교 때 읽은 백상 장기영 선생(한국일보 창업주)의 책이 그 시작이었다. 1970년대 ‘젊은 신문’으로 각광받던 한국일보의 편집국 이야기는 사람 좋아하고 사회에 관심 많던 여중생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초등학생 때부터 글짓기에 소질이 있어서 글을 무기로 하는 일을 하고 싶었어요. 아동문학가나 소설가가 되고 싶었는데 그 책을 본 후 골방에서 상상으로 글을 쓰는 직업이 아니라 살아 있는 현장을 볼 수 있는 기자가 되는 게 훨씬 재밌겠다고 생각한 거죠.”

시장에서 장사하며 자식을 뒷바라지한 부모는 딸이 기자가 되겠다고 했을 때 고개를 저었다. 당시 기자는 불안정한 직업 중 하나였다. ‘작가가 굶어죽기 좋은 직업이라면 기자는 가족을 굶기기 좋은 직업’이라는 농담이 나오던 시절이었다.

부모님은 교사가 되길 바랐지만 그는 기자의 삶을 고집했다. “엄마들은 세상에서 자식을 가장 많이 걱정해주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그 지나친 사랑 때문에 자식을 독립적인 존재로 생각 못하기도 하죠. 난 부모한테 저항하지 않고서는 자기 인생이 없다고 생각해요.”

부모에게 저항하지 않고선 ‘내 인생’은 없다
[나의 꿈 나의 인생] 그녀가 들려주는 행복의 법칙
월간지 ‘마당’ ‘한국인’을 거쳐 ‘시사저널’에 입사한 뒤 15년간 사회부, 정치부를 거치며 활약했다. 정치부 여기자 1세대, 여성 최초의 편집장 등 화려한 이력도 많이 남겼다. 처음부터 최고의 자리를 목표로 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기자 일이 좋았기 때문에 열심히 했고 열정이 있었기 때문에 고비가 찾아와도 넘길 수 있었다. “기자 일은 힘들어요. 재수 없는 상사도 만나고 동료들과 갈등도 있고 취재원에게 고소도 당하고…. 나도 5년에 한 번씩 때려치우고 싶은 생각이 들었죠.”

소리 없는 전쟁터인 언론계에 20여 년 몸담으며 깨달은 것은 “최선을 다해 부딪치고 깨지고 피 흘려봐야 그 직업이 줄 수 있는 결실을 얻게 된다”는 것. “조금 해보다가 어려운 일이 생긴다고 그만둬서는 아무것도 되지 못하죠.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 지위나 돈과 같은 조건을 모두 떠나서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일이 좋으면 쓰러지더라도 결국 다시 일어서게 되거든요.”

일과 열정을 일치시켰던 그는 기자 일이 지겹다고 느껴지자 미련 없이 그만뒀다. 기자 인생 23년이 되던 해였다. 기자가 되겠다는 스물일곱 살 딸의 결정을 말렸던 어머니는 이번엔 편집국장 자리를 박차고 나오겠다는 쉰 살의 딸을 붙잡았다.

서 이사장이 어머니에게 ‘미친년’ 소리를 들으면서까지 자기 길을 고집했던 일화는 유명하다. 그는 살면서 세 번 어머니의 반대에 부딪쳤다. 20년 넘게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겠다고 했을 때, 50대 나이로 800km의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겠다고 했을 때, 그리고 제주도에 길을 낸다고 했을 때다.

은퇴 후 걷기의 매력에 빠졌던 그는 산티아고 순례길 위에서 새 꿈을 찾았다. 그의 고향인 제주도에 산티아고 못지않은 세계적인 길을 내겠다는 꿈이었다. 인생의 2라운드 역시 돈보다는 재미와 열정을 중심으로 선택한 것이다.
[나의 꿈 나의 인생] 그녀가 들려주는 행복의 법칙
끝까지 사수한 ‘안티 공구리’ 정신

“좋은 일 한다”는 지인들의 응원을 받으며 고향에 내려온 것이 2007년 7월. 제주도에 남아 있던 남동생과 길 탐사 작업부터 시작했다. ‘글쟁이’에서 ‘길쟁이’ 길로 돌아선 순간이었다. 길 위에 있을 때 그는 행복했다. 길 찾기 작업도 재밌었다. 며칠을 헤매고 다니다 길 하나를 찾으면 기자 때 특종을 잡은 것보다 더 기뻤다고 한다.

“특종은 어쩔 수 없이 남을 가슴 아프게 하는 경우가 있죠. 길 내는 일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작업입니다. 또 기사는 아무리 엄청난 특종이라도 시간이 지나면 전부 잊히는데, 길은 한 번 찾아내고 사람들이 걷기 시작하면 계속 남게 되죠.”

길을 내는 과정에서도 서 이사장의 뚝심은 발휘됐다. 제주올레를 처음 만들 때 내건 슬로건 ‘안티 공구리 정신’을 지키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 4차선 도로 1km를 만드는 데 평균 40억의 비용이 드는데, 올레길은 900만 원의 정부 보조금만으로 15~20km의 길을 냈다.

그중 70%는 팸플릿을 만드는 비용이었다. 기계 없이 자원봉사자들이 손으로 다져가며 길을 만들었다. 올레길 표지를 만들 때도 원칙을 정했다. 친환경 소재를 사용할 것, 사람들이 헷갈릴 만한 갈림길에만 표시할 것, 크기는 되도록 작게 만들 것, 주변 풍광과 어우러질 것.

대규모 콘도와 전시관에 큰 감흥을 못 느끼던 관광객이 오히려 1m 남짓 되는 흙길과 바다 빛을 닮은 푸른색 표지에 반응하기 시작했다. 처음 올레길이 열린 2007년에는 3000여 명이 방문했다. 그 수는 3년 만에 70만여 명으로 훌쩍 늘어났다. 제주올레 사무국의 규모도 상근직원 11명과 400여 명의 자원봉사자를 둘 정도로 커졌다.

급속한 개발에 상처받은 제주를 다독이려는 안티 공구리 정신은 23개 코스를 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제는 마을 주민들이 찾아와서 아스팔트보다는 흙길로 우회하는 도로를 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하기도 해요. 조금 불편하더라도 자연에 가까운 길을 내자는 올레의 정신을 공감하게 된 거죠.”

비영리 법인으로 독립성을 유지한 것도 하나의 원칙이었다. 정부 보조금이 중단되고 사비를 들여서 길을 내야 할 상황에 처했을 때도 독립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유명 기업의 CEO가 두 번이나 찾아와 재정 지원을 제안했을 때도 정중히 거절했다.

제주올레의 순수성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길을 만들어서 여행사 좋은 일만 시키지 말고 여행업을 해보라”는 제안도 많이 받았다. 그러나 지역 주민의 터전인 여행업, 요식업, 숙박업은 손대지 않겠다는 원칙을 지켰다. 대신 올레만이 할 수 있는 수익사업을 벌였다. 제주올레를 모티프로 한 간세인형, 두건, 우비 등을 판매하는 기념품 사업이 대표적이다. 지역 주민과 공생하며 정체성을 지키는 방법을 찾은 것이다.
[나의 꿈 나의 인생] 그녀가 들려주는 행복의 법칙
‘20대는 방황할 특권이 있다’

올레길이 열린 지 만 3년 8개월. 지난해까지 100만 명이 넘는 사람이 올레길을 다녀갔다. 지역경제에 미치는 파급 효과만 700억 원을 웃도는 것으로 예측된다. 길을 걸으며 위로받고 희망을 되찾은 올레꾼들의 메시지는 서 이사장에게 큰 보람과 성취감으로 되돌아온다.

제주올레의 성공 뒤 다른 지역에서도 그 지역만의 길을 내려는 움직임이 시작됐다. 대구 올레길, 지리산 둘레길, 강릉 바우길 등이 대표적이다. 국내뿐 아니라 해외 트레일 코스의 러브콜도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스위스의 체르마트 트레일을 시작으로 지난 4월엔 영국의 코츠월드 웨이와 ‘우정의 길’ 협약을 맺었다. 오는 11월엔 캐나다 브루스 트레일에 제주올레를 개장할 예정이다.

“제주올레를 만들겠다고 처음 나섰을 때 이만큼의 결과를 얻을 거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회상하는 서 이사장은 처음부터 성공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지금처럼 올레에 관심이 쏠리지 않았어도 저는 만족했을 겁니다. 내 인생에서 하고 싶은 일을 새로 발견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요.”

인터뷰 말미 그는 큰아들의 이야기를 꺼냈다. 저서인 ‘제주 걷기 여행’을 통해 “부모 속을 어지간히 썩인 놈”이라며 “기자 노릇 하느라 엄마 노릇 못한 죄값을 이자까지 보태서 치르게 한 아이”라는 사연을 털어놓았던 그 아들이다.

군에 다녀온 뒤에도 학교생활에 재미를 붙이지 못한 아들에게 자퇴를 권유한 것은 학교가 아니라 엄마인 서 이사장이었다. “차라리 등록금 낼 돈으로 여행을 다녀와라, 엄마는 대학을 꼭 나와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죠.”

좀처럼 꿈을 찾지 못했던 아들은 어머니를 따라 제주도에 내려왔다가 우연히 요리에 소질이 있음을 알게 됐다. 지금은 서귀포의 한 포장마차에서 보조 주방장으로 일하고 있다. 열정을 되찾은 아들이 자랑스럽다는 그는 가끔씩 지인들과 함께 아들이 일하는 곳을 찾는다고 한다.

서 이사장은 직업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사농공상을 구분했던 이조시대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꼬집었다. “똑같이 300만 원을 벌더라도 대기업에 다니면 부러워하고 구두닦이를 하면 우습게 본다”는 것. 우리 사회가 너무 규격화돼 있는 것 같다고도 했다.

“대학을 꼭 나와야 하고 스펙을 얼마만큼 쌓아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취업이 안 된다는 식의 이야기가 대학생의 공포를 조장하는 것 같아요. 그런 목소리는 사회에 진출해도 마찬가지죠. 직장을 다니기 시작하면 이제는 아이 교육비와 노후 자금으로 얼마를 모아야 한다는 말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그는 젊은이들에게 다양한 방면으로 길을 모색하라고 조언했다. “사회가 정해놓은 길 안에서 버둥거리면서 살지 않았으면 합니다. 젊을 때부터 한 길로만 가야겠다고 고집하진 마세요. 그것은 확신이기보다 고정관념이나 길들여진 선택일 가능성이 큽니다.”

“20대는 방황할 수 있는 특권이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나이가 어리다고 다 젊은 게 아닙니다. 자신만의 길을 모색하고 모험도 할 줄 아는 게 젊음이죠. 사회가 정해놓은 길로만 가는 건 젊음이 주는 조건을 스스로 버리는 게 아닐까요? 긴 인생길을 20대에 전부 결정지으려 하지 마십시오. 우선 열정을 쏟을 수 있는 대상을 찾길 바랍니다. 그 다음부터는 간단합니다. 열정을 따라가기만 하면 되니까요.”
[나의 꿈 나의 인생] 그녀가 들려주는 행복의 법칙
제주올레는?

‘올레’는 집 대문에서 마을길까지 이어지는 아주 좁은 골목을 뜻하는 제주 방언이다. 20여 년의 언론인 생활을 은퇴하고 산티아고로 떠났던 서명숙 이사장이 길 위에서 얻을 수 있는 치유의 힘을 발견하고, 고향인 제주도로 돌아와 끊어진 옛길을 찾고 이으며 ‘느리게 걷는 길’을 개척해냈다. 지난 2007년 9월 첫 코스를 개장한 이래 ‘걷기 여행 열풍’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현재 378.4km에 이르는 23개 코스가 있다.

2009년 삼성경제연구소 10대 히트상품 선정
2009년 한국관광공사 가족여행지로 가장 가보고 싶은 곳 1위
2010년 문화체육관광부 한국관광의 별 브랜드 대상
2011년 교보생명환경대상 생태보안 부문 대상


제주올레 이사장 서명숙

1957년 제주 성산읍 고성리 출생
1980년 고려대 교육학과 졸업
1983~1989년 월간 ‘마당’ ‘한국인’ 기자
1989~2001년 ‘시사저널’ 정치부 기자, 취재1부장
2001~2003년 ‘시사저널’ 편집장
2005~2006년 ‘오마이뉴스’ 편집국장
2007~현재 사단법인 제주올레 이사장

저서
2004년 ‘흡연여성 잔혹사’
2008년 ‘제주걷기 여행’
2010년 ‘꼬닥꼬닥 걸어가는 이 길처럼’


글·사진 제주 = 김보람 기자 bramvo@hankyung.com│사진제공 (사)제주올레 사무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