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는 50대 중반이다. 지천명(知天命)을 넘어선 나이다. 하지만 그에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해 보인다. 비전을 논하는 대목에서 세월을 거스른 듯한 에너지가 느껴졌다.

반짝이는 아이디어와 통찰력은 그의 트레이드마크다. 자신이 가진 아이디어를 나눈다는 취지에서 ‘원순씨를 빌려드립니다’라는 책을 썼고 ‘1000개의 직업을 드립니다’라는 강연에 나섰다. 바쁜 일정에 쉴 틈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새로운 것에 관심이 많아요. 언제까지나 현장에서 일하는 실천가로 남고 싶습니다. 어딜 가나 공동 대표니 고문이니 이런 특임 자리에 앉히려고 하는데 제가 욕심이 많아서 일을 더 하고 싶어요. 대우받는 뒷방 마님으로 있고 싶진 않습니다.”

일 년 중 3~4개월은 해외 출장을 나가고 이 밖에 강연, 저술 활동 등으로 스케줄표가 빡빡하다. 이처럼 그를 바삐 움직이게 하는 힘은 어디에 있을까. “나이가 들어도 열정과 도전의 삶을 살면 청춘이다”라고 말하는 ‘원순 씨’에게 삶과 철학, 젊은이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들어봤다.
[나의 꿈 나의 인생] “우물 밖, 남들이 가지 않는 길에서 너의 왕국을 만들어보렴”
박원순 이사가 건넨 명함에서 ‘소셜 디자이너(Socal Designer)’라는 직함이 눈에 들어왔다.

“소셜 디자이너? 처음 들어보는 말인데요.”

“직접 만든 직업이에요. 평소 ‘어떻게 하면 한국 사회를 보다 아름답게 만들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마다 적고 시스템화하는 데 힘을 기울였거든요. 지금까지 해온 일을 한 단어로 표현하면 소셜 디자이너가 아닐까 생각을 한 거죠.”

박 이사는 1995년 참여연대를 결성했고 2002년에 아름다운재단과 아름다운가게를 세웠다. 2006년부터는 희망제작소 상임이사로 일하고 있다. 한 사람이 만든 단체이지만 성격은 각기 다르다.

주주 운동을 통해, 기부 문화의 확산을 통해, 아이디어의 배급을 통해 다각적으로 사회에 기여하는 방안을 고민한다. 그래서 ‘시민 단체’ ‘사회적 기업’ ‘싱크탱크’ 등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그 기저에는 ‘공익’이라는 가치가 있었다. ‘공익적 목적은 양보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남을 행복하게 만드니까요. 사람 사는 데 여러 가지 가치가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부자가 되는 것보다 더 큰 보람과 성취는 사회적 변화에 있다고 봅니다.”

[나의 꿈 나의 인생] “우물 밖, 남들이 가지 않는 길에서 너의 왕국을 만들어보렴”
인생의 가치를 알게 해준 ‘그때 그 시절’

처음부터 사회를 위해 일해야겠다는 목적의식이나 거대한 꿈이 있었던 건 아니다. 어린 시절에는 가난을 탈출하는 데 관심이 많았다.

“중학교 때 시골에서 왕복 30리 산길을 걸어 학교를 다녔어요. 부모님은 평생 농사를 지으셨는데 고생하시는 걸 보고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고 결심했죠. 공부를 억지로 하는 경우가 많은데 저는 정말 하고 싶어서 했어요. 눈에 불을 켜고 마치 사진을 찍듯이 머릿속에 집어넣었어요. 그렇게 시골에서 공부해 경기고에 가고 서울대에 입학을 한 거죠.”

하지만 달콤한 대학 생활도 잠시, 석 달도 채 안 돼서 학생운동 시위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가고 학교에선 제적을 당했다. 당시 주동한 것도 아닌데 복학이 안 돼서 슬펐다고 한다.

“짧았지만 대학 생활이 참 재밌었거든요. 타임지와 사회학개론을 읽고 공동체에 관한 리포트도 쓰곤 했어요. 그러다가 감옥에 가서 부모님을 뵙는데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었죠. 힘들게 공부해서 대학에 갔는데 말도 안 되는 불효를 한 셈이죠. 그 뒤로 5~6년간 방황을 한 것 같아요.”

‘지나고 나면 다 추억’이라는 말은 이런 상황을 이르는 것일까. 그는 오히려 가난했던 어린 시절과 20대 초반의 우여곡절을 ‘행운’이라고 규정했다. “험한 산길을 걸으면서 자신만의 길을 개척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인생의 방향을 결정짓는 커다란 계기가 됐다.

“드라마틱한 시간을 통해 사회에 좀 더 빨리 눈을 뜬 것 같아요. 인생의 많은 것들을 보고 배웠어요. ‘권력의 길만이 성공은 아니다’는 걸 알았죠. 그때 그런 경험이 없었다면 사회의 큰 흐름을 거스르지 못했을 거예요.”

그는 사법고시를 보고 검사가 됐지만 ‘사람을 잡아넣는 데 열정을 바치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검찰에 들어간 지 일 년 만에 사표를 내고 변호사와 인권변호사 일을 시작했다.
[나의 꿈 나의 인생] “우물 밖, 남들이 가지 않는 길에서 너의 왕국을 만들어보렴”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를 하는 이유는?

박 이사의 첫 직업은 검사일까? 아니다. 그 전에 법원 고등고시를 보고 강원도 정선에서 군 단위 기관장을 했다. 24세 때의 일이다.

“산촌에 가서 군수·서장 모임이나 여러 친목 모임에 참여하고 각종 통계 자료도 보곤 했는데 일찍 사회 경험을 한 게 자양분이 된 것 같아요.”

이것을 시작으로 참 다양한 직업을 거쳤다. 해외 유학 이후 본격적으로 시민운동가로 활약했고 이 밖에 자선사업가, 저술가, 강연자, 교수, 사외이사, 사회적 기업가, 소셜 디자이너 등 여러 옷을 입었다. 그중에는 그의 아이디어가 빚어낸 새로운 시도들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사회적 기업을 꼽을 수 있다.

“사회적 기업이란 한마디로 공익적 목적을 비즈니스적으로 해결한 거라고 보면 됩니다. 이 말이 쓰이기 전부터 이미 일을 시작했어요. 아름다운가게가 2002년부터 활동했는데 2005년 돼서야 사회적 기업이라는 말이 사용되기 시작했으니까요.”

현재 박 이사가 소속된 희망제작소의 경우 싱크탱크로 분류되지만 그는 “단체의 성격을 규정하기 애매하다”고 말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론적인 것만 다루진 않거든요. 연구만 하는 것보다 실제로 우리 사회에 적용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게 중요하다고 봤어요. 국내외에 이런 일이 없는데 실천적 과제를 다루니까 아이디어 공장, 아이디어 뱅크로 규정해야 할 것 같아요.”

박 이사는 하나의 단체를 만들고 적어도 7년 이내에 그곳을 떠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렇게 그가 만든 단체가 10여 개에 이른다. 그만큼 하고 싶은 일이 많기 때문에 한 곳에 머물 수가 없다고 한다.

“처음 단체를 만드는 것은 힘들지만 노하우가 쌓이면 점차 쉬워져요. 5년 정도면 단체 하나가 자리를 잡는 것 같아요. 이제 제 취미는 단체 만드는 겁니다.(웃음)”

그의 내면을 지배하는 ‘나눔과 소통’

자신을 ‘단체 제조기’라고 표현한 자신감의 비결은 뭘까. 그는 “아무도 안 가는 빈 틈새를 공략했다”고 했다. 또 “동기 부여가 제대로 될 때, 자기가 하고 싶을 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제까지 걸었던 길은 모두 제 선택이었습니다. 누가 시켜서 한 것이 아니고, 다음번엔 이걸 해야지 계획하고 한 것도 아니에요. 옳다고 생각한 길을 집중해서 걷다 보니 답이 보이더군요.”

인생의 갈림길에 설 때마다 그를 움직이게 하는 신념은 바로 ‘나눔’과 ‘소통’이다.

“인간의 삶은 기본적으로 나눔이라고 생각합니다. 혼자서는 못 살아요. 다 함께 살아가야 즐겁고 발전이 있는 거죠.”

나누기 위해서는 먼저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박 이사는 ‘공익’ 못지않게 ‘수익’을 고민해왔다.

“비영리 단체도 돈을 벌어야 지속할 수 있어요. 현재 아름다운재단은 100% 모금을 통해서, 아름다운가게는 물건을 팔아서, 희망제작소는 프로젝트를 지자체 등에 팔거나 교육을 해서 수익을 내고 있어요.”

박 이사가 관여한 10여 개 단체는 연간 총 400억 원 이상의 매출 혹은 모금 실적을 자랑한다. 이것이 그가 만든 단체들의 독특한 면모다.

박 이사는 한때 정체성의 혼란을 겪기도 했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박원순은 회색 지대에 살고 있다”. 이도 저도 아닌 위치에 서 있다는 것이다.

“경기고에 서울대, 검사를 거쳐 와서 주변에 정통 엘리트 코스를 밟은 친구들이 많아요. 대부분 대기업 임원이나 검찰 고위직, 정부의 요직에 가 있죠. 한편으론 자본가에 대립하는 노동자, 권력의 맞은편에 서 있는 사람들과 지내기도 했어요. 어떤 모임에 가면 노동자를 욕하고 다른 곳에 가면 자본가를 욕하기도 했죠.”

하지만 여기서 ‘소통’과 ‘통합’이라는 남다른 의미를 찾았다. 특정 정파의 입장보다는 모두의 이익을 꾀하는 쪽으로 무게중심을 두게 된 것이다. 그는 인권변호사와 시민운동가를 통해 소수자의 편에 서기도 했고 포스코, 풀무원 등 대기업의 사외이사를 맡기도 했다.

청년들은 ‘새로운 꿈’을 꾸라

박 이사가 이 시대 청년들에게 강조하는 말. 먼저 “자기만의 꿈을 가져야 한다”.

“중요한 건 꿈이에요. 남들 다 가는 길 말고 다양한 길을 개척했으면 좋겠어요. 고속도로같이 뻔한 길을 걸으면 얼마나 재미없나요.”

새로운 길을 걷기 위해서는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한다. 또한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저도 처음 단체를 꾸릴 때 돈도 들어가고 좋은 사람도 필요했는데 그 일에 비전을 갖고 정성을 기울이니 많은 사람들이 모였어요. 처음엔 당연히 시련이 있을 수 있죠. 하지만 실패하더라도 그걸 통해 많이 배우게 되거든요. 젊은 시절에 실패를 해봐야 제대로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여러 사람에게 길을 묻고 도움을 구하면 반드시 도와주는 사람이 나타날 거예요.”

직업을 선택할 때는 “우물 밖 세상을 보라”고 말했다. 조금만 생각을 전환하면 훨씬 넓은 길이 보인다는 것이다.

“돈을 조금 덜 벌기로 결심하면 훨씬 자유롭게 살 수 있어요.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재충전하면서 행복을 찾는 데 투자할 수 있거든요.”

일자리 부족난에 허덕이기보다는 ‘경쟁이 없는 쪽, 사람들이 가지 않는 쪽’을 택하자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아름다운가게도 빈틈을 찾아 들어간 거예요. 누구나 가는 데만 가니까 레드오션인 거죠. 아무도 안 가는 길을 가면 줄만 치면 자신의 왕국을 만들 수 있죠.”

박 이사는 요즘 ‘1000개의 직업’을 학생들에게 제안하는 강연을 하고 있다. 일종의 강연 콘서트 형식으로 대학마다 돌아다니며 새로운 직업을 소개하는 것이다. 1000개의 직업은 새롭게 만들거나 기존에 묻혀 있던 일들이다.

일본에 이미 3만 명이 있다는 ‘채소 소믈리에’나 현지의 특성을 살려 여행 상품을 만드는 ‘공정여행가’, 그리고 ‘그린빌딩 평가사’ ‘지역화폐 운동가’ ‘도시 농업 설계사’ 등이 대표적인 예다.

이렇게 새로운 길을 걷는다는 것, 참 멋있어 보이는 말이지만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박원순 스스로가 그런 삶을 살았기 때문에 제안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자신 있게 말씀드리는 거예요. 남들이 안 가는 길을 가도 성공할 수 있거든요. 누구나 다 저같이 살라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이런 길도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요. 권력이나 큰 부를 얻는 것이 진정한 성공은 아니거든요. 인생에 다른 가치를 창조할 수 있는 것이 더 큰 성공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의 꿈 나의 인생] “우물 밖, 남들이 가지 않는 길에서 너의 왕국을 만들어보렴”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
1956년 경남 창녕 출생
1974년 경기고 졸업
1975년 서울대 법대 중퇴
1979년 단국대 사학과 졸업
1980년 사법시험 합격(22회)
1982년 대구지검 검사
1986년 대한변호사협회 인권위원
1991~92년 LSE(London School of Economics and Sciences) 디플로머 취득(International Law)
1995~2002년 참여연대 사무처장
1998년 감사원 부정방지대책위원회 위원, 성공회대 겸임교수(1년)
2002~09년 아름다운가게 총괄상임이사
2002년~ 아름다운재단 총괄상임이사(현)
2004년 포스코 사외이사
2006년~ 희망제작소 상임이사(현)

저서
원순씨를 빌려드립니다(21세기북스, 2010) 외 22권

수상
1998년 한국여성운동상
2002년 심산상
2002년 서울지방변호사회 공익봉사상
2006년 만해상 실천부문(8월 12일),막사이사이 PUBLIC SERVICE 부문(8월 29일)
2007년 단재상(5월 2일) 등

박원순의 다음 직업은?

희망제작소가 생긴 지 만 5년이 되는 2011년 3월 박원순 이사는 새 직업을 찾을 생각이라고 한다. 그 이름은 ‘희망 수레’다.

“대학생·청년들이 운영하는 소기업, 문화적 소기업, 농촌 소기업 등의 물건만 전문적으로 파는 유통 회사를 만들까 해요. 지금 희망제작소 안에 여러 소기업이 존재하는데 물건을 제대로 팔도록 해주는 게 소기업을 살리는 지름길이더라고요. 직접 수레를 끌고 다니면서 광화문 사거리나 강남 사거리, 여고 동창회 등을 찾아다닐 생각이에요. 외판원 내지는 방문판매원이 되는 것이죠.”


글 이현주 기자 charis@hankyung.com│사진 김기남 기자 kn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