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효찬의 ‘인문학이 에너지다’

이번 칼럼에서는 ‘위대한 바보’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흔히 ‘바보’라고 하면 조롱의 대상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위대한 바보’는 조롱과 비아냥거림의 대상이라기보다 ‘바보스러움’과 ‘우직함’으로 교훈적일 뿐 아니라 존경심까지 우러나는 대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러는 자신을 낮춰 ‘바보’라고 하는 이들도 있죠.
[Humanities] ‘위대한 바보’에게 배우는 승리의 기술
고 김수환 추기경이 그랬고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그랬습니다. 이번에는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遍義自見)이라는 말을 생각나게 하는 조선 중기의 김득신이라는 인물에 대해 이야기할까 합니다. ‘독서백편의자현’이란 책이나 글을 백 번 읽으면 그 뜻이 저절로 이해된다는 뜻이죠.

학문을 열심히 탐구하면 뜻한 바를 이룰 수 있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흔히 노력하는 사람을 당할 수 없다는 말이 있는데 ‘독서백편의자현’이 바로 그런 경우를 나타냅니다. 이 말은 당나라 시대의 두보가 쓴 시에 나옵니다.

두보는 중국 최고의 시인으로 흔히 ‘시성’이라고 불립니다. 그는 소년 시절부터 시를 잘 지어 시성으로 명성을 누렸는데, 과거시험에는 합격하지 못했답니다. 과거시험은 공무원이 되는 시험이죠. 옛날에는 과거시험에 합격해 공무원이 되는 것이 최고였답니다.

두보는 평생 방랑을 하다 결국 59세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시는 지금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두보가 만약 과거시험에 붙었다면 시인으로서는 크게 이름을 떨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우연일까요. 김득신은 59세에 과거시험에 합격했습니다.

요즘 고시 문제로 시끄럽습니다. 외교부 장관 딸이 특채된 게 드러나고 여기에 특혜 의혹까지 불거져 많은 고시생에게 절망감을 주고 있습니다. 고시 제도는 먹고사는 문제와 신분 상승의 문제가 얽혀 있어 과거 제도처럼 사회적으로 민감한 사안인데 정부에서 너무 쉽게 손질을 한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필자도 대학 때 외무고시를 보려다가 군사정권의 하수인 노릇을 하는 것 같아 그만둔 적이 있습니다.

59세에 과거시험에 합격한 김득신

김득신(1604~1684)은 두보처럼 소년 시절부터 시를 참 잘 지었다고 해요. 두보가 과거시험에 합격하지 못한 반면 김득신은 과거시험에 합격을 했습니다. 그런데 김득신이 과거시험에 합격한 나이가 상상을 초월해요.

자그마치 59세에 비로소 과거시험에 합격했기 때문이죠. 대부분 30대까지 과거시험에 응시하다 계속 떨어지면 포기를 하는데 김득신은 그렇지 않았어요. 그에게 포기란 없었습니다. 도전하고 또 도전해 60세를 바라보는 나이에 합격을 했습니다. 인간 승리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요.

그는 과거시험에 떨어질 때마다 과거시험을 때려치우라는 비아냥거림과 조롱을 들어야 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대부분의 사람은 자포자기하기 쉽습니다. 예전에는 사람의 수명이 60세도 넘기기 어려웠는데, 죽는 날이 다가오는데도 과거시험에만 매달렸으니 어쩌면 세상의 웃음거리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김득신은 결코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았습니다. 생전에는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지만 죽어서는 ‘끈기의 아이콘’이자 ‘집념의 화신’으로 회자되었습니다. 김득신이 끝까지 과거시험을 포기하지 않고 합격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평소 아들이 총명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책을 읽어도 이내 이해를 잘 못하기 일쑤였어요. 아들이 비범하지 못하고 평범한 아이들보다 어리석은 듯이 보였습니다.

그는 아들을 ‘노둔’하다고 표현했습니다. 한마디로 어리석고 우매하다는 거죠. 아이가 똑똑하고 총기가 있기를 바라는 게 모든 부모의 한결같은 소망인데 소년 김득신은 그렇지 못했어요. 과거시험에 번번이 낙방하자 아버지는 보다 못해 아들에게 하나의 지침을 내렸습니다. “예순 살까지는 과거에 응해보라!” 이 말을 들은 김득신은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것 같아 아버지가 밉기도 했어요.

“아, 나는 왜 이리 머리가 나쁜 걸까. 외워도 외워도 돌아서면 까먹다니….” 때로는 자신을 낳아준 부모가 원망스럽기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먹고 다시 책을 펼쳤습니다.

“그래, 끝까지 해보는 거야. 아버지 말씀처럼 예순 살까지 과거시험을 보지 뭐. 밑져봐야 본전 아니겠어.”

김득신은 아버지의 지침을 늘 마음속에 되새기며 결코 포기하지 않고 과거시험 공부에 전념했습니다. 김득신은 점점 끈기 있는 사람이 되어갔습니다. 아무리 주변에서 비아냥거리고 멸시해도 끄덕하지 않았습니다. 그럴수록 책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 반복하며 읽었습니다. 그러다가 몇 번 반복해서 읽었는지를 표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횟수를 보면서 자신이 놀라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자신감이 불끈불끈 생겼습니다. “그래, 나만큼 책을 반복해서 읽은 사람이 있다면 나와보라지!”

그런데 과거시험에는 번번이 낙방을 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김득신은 ‘시험울렁증’이 있었던 거죠. 과거시험장에서 시험관이 문제지를 거는 순간 김득신은 너무나 긴장한 탓에 외우고 있던 내용조차 깡그리 잊어버리고 말았어요.

그럴수록 김득신은 책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책의 내용을 전부 외울 때까지 반복해서 읽었답니다. 얼마나 읽었는지는 그가 직접 쓴 ‘독수기(讀數記)’에 나옵니다. 독수기란 책을 몇 번 읽었는지에 대한 기록이라는 뜻이죠. 그는 1634년부터 67세인 1670년에 이르기까지 36년 동안 고문을 읽으며 1만 번 이상 읽은 36편의 이름과 횟수를 기록했습니다.

- 백이전은 1억1만3000번
- 노자전, 분왕, 벽력금, 주책, 능허대기, 의금장, 보망장은 각각 2만 번
- 제책, 귀신장, 목가산기, 제구양문, 중용서는 1만8000번
- 송설존의서, 송원수재서, 백리해장은 1만5000번
- 제약어문은 1만4000번

사마천의 ‘사기’에 나오는 ‘백이전’은 무려 1억1만3000번을 읽었답니다. 오늘날로 보면 ‘기네스북’에 오를 수 있는 인물이 아닐까요.

‘책을 백 번 읽으면 그 뜻이 저절로 이해된다’

김득신이 가장 좋아한 작가는 중국의 한유입니다. 그가 1만 번 이상 읽은 36편 가운데 한유의 책이 20편으로 가장 많아요. 다음으로는 사마천, 유종원, 소식, 유향, 소순 등의 순이에요. 시인답게 사서삼경보다 문장가의 글을 많이 읽은 게 특징이죠. 김득신은 독수기에 “만약 훗날 나의 자손들이 나의 ‘독수기’를 보면, 내가 책읽기를 게을리하지 않았음을 알 것이다”라고 적었습니다.

“나는 태생이 노둔해서 다른 사람보다 배나 읽었으니 … 그중에서 ‘백이전’을 가장 좋아해서 일억 일만 삼천 번이나 읽고는 서재를 ‘억만재’라 이름 지었다.” 그가 남긴 문집인 ‘종남총지’에 나오는 말입니다.

그의 말처럼 김득신은 노둔(어리석고 둔함)한 자신을 알고 스스로 애써서 공부를 한 거예요. 과거시험을 볼 때도 자신의 문장력이 모자람을 알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집요하게 반복해서 읽은 거죠.

김득신의 독서 열정에 다산 정약용 선생님도 찬사를 아끼지 않았답니다. “글자가 생겨난 이후로 상하 수천 년과 종횡 3만 리를 통틀어 독서에 부지런하고 뛰어난 이로는 당연히 백곡(김득신의 호)을 제일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칭찬했습니다.

김득신은 죽기 1년 전 자신의 인생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답니다. “나는 애써서 터득한 사람이다. 결국에는 성공하는 데에까지 이르렀으니 뜻과 소원을 다 이루었다.” 김득신은 후대에 조선시대의 8대 문장가라고 말할 정도였어요.

그는 높은 벼슬은 하지 못했지만 시를 416수를 남기고 81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김득신은 ‘노력하면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교훈을 주기에 충분한 인물이 아닐까요.


[Humanities] ‘위대한 바보’에게 배우는 승리의 기술
최효찬 자녀경영연구소장·비교문학 박사


기자를 거쳐 현재 연세대 미디어아트연구소 전임연구원 겸 자녀경영연구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5백년 명문가의 자녀교육’ ‘한국의 1인 주식회사’ 등 다수의 책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