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워킹홀리데이 체험기] 좌절이 희망으로…일본 정착에 성공
전문대 졸업 후 전공과 무관한 업체에서 3년 정도 일하던 때 일본에서 유학 중인 친구에게서 워킹홀리데이 비자에 관해 들었다. 앞으로 수십 년간 같은 생활을 해야 한다는 스트레스와 압박이 컸던 터라 워킹홀리데이가 마치 인생 역전의 기회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처음에는 반신반의했다. ‘일본어도 못하는데 과연 일본에 가서 일할 수 있을까?’ 걱정에 앞서 우선 비자부터 통과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전문가의 말을 듣고 2008년 말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신청했다.

결과는 합격. 일본 워킹홀리데이는 경쟁률이 5 대 1 이상이다. 1년에 7200명, 분기마다 1800명씩 선발하는데 지원자만 5만 명에 가깝다. 하늘이 도와줬다는 생각에 잃었던 용기가 되살아났다. 언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어 공부에 의지를 불태웠다.

초급 이상의 일본어가 되면 하네다공항의 면세점 인턴십이 가능하다는 말을 듣고 우선 초급 정도의 일본어를 마스터하기로 했다.

직장생활을 하고 있어 주말에 학원에 다녔다. 틈틈이 공부를 하고 주말 이틀은 일본어에 올인했다. 그 후 워킹홀리데이 메이커스에서 공항 면세점을 안내해줘 그곳에 이력서를 넣었다. 면접은 국내에서 진행됐고, 보직은 현지에서 정하기로 했다.

2009년 3월 말 출국 후 처음 맡은 업무는 면세점에서 손님들이 미리 예약한 상품을 전달하는 일이었다. 일본어가 서툴러 손님에게 제대로 존대하지 못해 스태프들이 당황하기도 했다. 다행히 주변 일본인 스태프들이 많이 도와줘 큰 문제없이 일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일본인 친구들을 사귀고 어느 샌가 회화 능력이 많이 향상되었다. 이런 점이 감안돼 3개월 후에는 공항 손님들과 더 많이 대면할 수 있는 면세점으로 보직이 변경됐다. 급여는 18만 엔으로 큰 변동은 없었지만, 중급 오피스텔 정도의 숙소가 제공되었다. 한국에서 일하던 때보다 좋은 조건이었다.

금전적인 부분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좋았던 점은 1년도 안 되어 현지인들과 거리낌 없이 일하고 있는 나 자신이었다. 일을 통해 자존감이 높아지고 있었다.

야근이나 추가 업무 없이 주 5일 하루 8시간 일을 했고, 업무시간은 정확하게 지켜졌다. 반년이 지나고 생활의 안정을 찾은 후에는 오사카, 홋카이도 같은 관광명소로 여행할 수 있는 금전적·심적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출국 후 6개월 정도 지난 시점에서 좀 더 욕심을 냈다. 현지에서 정규직으로 취업하고 싶었다. 이를 위해 팀장에게 근무시간대를 오후로 변경해달라 부탁하고, 오전 시간을 활용해 일본어 학교 정규 과정을 밟았다.

2010년 1월 전체 인턴 직원을 대상으로 시험이 있었다. 그동안의 업무 능력, 팀장의 평가, 일본어 이 세 가지가 결정적인 심사요건이었다. 9개월간 근무하면서 인간관계를 잘 유지하고 열심히 일했다는 점이 참작돼 정규직 제의를 받았다.

2010년 3월 초 워킹홀리데이 비자에서 정식 취업비자로 변경되었고, 현재는 제품 전체 입고와 판매를 관리 조율하는 부서에서 근무하고 있다.

지금도 근무시간은 동일하며, 주말과 휴일에는 인생의 여유를 충분히 느끼며 살고 있다. 몇 년 전 한국에서 무기력하게 지내던 삶을 생각하면 꿈만 같다.

앞으로 일본에 들어오게 될 워킹홀리데이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틀에 박힌 목표를 고수하기보다는 상황에 따라 융통성 있게 행동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결정한 일에 대해서는 최선을 다하라는 것이다. 변수가 많은 비자이므로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시작하되, 성실하지 않거나 일본어가 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여러 가지 제약으로 중도 하차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인지하고 사전에 준비하자.

주변에 워킹홀리데이로 들어온 사람들 중 아무런 목적 없이 서성이거나, 금전적인 목표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여유와 즐거움은 아예 잊고 사는 경우를 많이 봤다. 가족을 떠나 타지에서 생활하면서 즐거움을 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스트레스에 얽매이지 말고 현지에서 즐겁게 자신의 무대를 만들어갔으면 좋겠다.


**정우식

● 나이 : 31세
● 2009년 4월~2010년 2월 하네다공항 인턴사원
● 현재 하네다공항 판매관리부서 정규직 재직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