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효찬의 ‘인문학이 에너지다’

230년 전 비가 주룩주룩 오는 여름, 연암 박지원(1737~1805)은 중국 베이징으로 가는 3개월 동안 겪은 여정과 느낌들을 메모해 ‘열하일기’를 완성했다. 당시 그의 신분은 어정쩡했다.

35세 때 과거시험을 포기하고 실학 공부에 매진하며 10년 동안 벼슬도 없이 ‘백수’로 지냈다. 그런 연암이 연행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8촌 형인 박명원(영조의 사위) 덕분이었다.

연암은 44세 때인 1780년 청나라 건륭황제의 칠순연에 참석하는 사신단을 이끈 박명원의 수행원 자격으로 6개월 동안의 연행에 올랐다. 연암의 아들 박종채는 ‘과정록(過庭錄)’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마침 아버지의 삼종형인 금성도위께서 청나라 건륭황제의 칠순 생일을 축하하는 사절로 북경에 가시게 되어 아버지에게 함께 가자고 했다. 그리하여 5월에 길을 떠나 8월에 북경에 들어갔다. 곧이어 열하로 가셨다가 10월에 귀국하셨다.”
[Humanities] 창조적 자기 파괴, 연암에게 한 수 배워라
연암의 베이징행은 처음부터 의도된 길이었다. 그것은 친구 홍대용의 영향 때문이었다. 홍대용은 연암에게 중국 여행담을 들려주면서 그곳의 산업과 과학, 그리고 신학문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했던 것이다. 비록 ‘수행원’ 자격이라고는 하지만 거의 백수나 다름없던 연암이 그 호기심 어린 관찰력으로 탄생시킨 것이 바로 ‘열하일기’다.

“오늘날 위대한 작품으로 인정받는 걸작은 대부분 작가가 무명 시절 인세 따위에 연연하지 않는 상황에서 내면의 절박함을 토로하기 위해, 즉 자기 희생을 통해 잉태되었다.” 쇼펜하우어가 ‘문장론’에서 말했듯 ‘걸작’은 가난한 시절에 나온다고 한다.

가난의 한이 사람을 분발하게 하는데 이를 ‘분발심’이라고 한다. 가난한 시절에 마음을 굳세게 하면 역작이 나온다는 것인데 이를 ‘발분저서’라고 한다. ‘열하일기’는 대표적인 발분저서라고 할 수 있다.

즉, 연암의 ‘열하일기’는 그 자신이 겪은 가난에서 출발한 것이고 나아가 조선의 가난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는 조선의 민초들이 가난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새로운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길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연암이 겪은 가난과 조선이 겪은 가난이 그의 실학사상을 낳았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열하일기’는 가난한 조선에 절실했던 신문물을 소개하는 계몽서이자 문명서라고 할 수 있다.

연암은 집안이 가난했던 탓에 15세까지 제대로 공부하지 못했다. 16세에 장가를 간 후에야 비로소 장인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사서삼경이 필독서인 시대였지만 연암은 사마천의 ‘사기’를 좋아한 처숙 이양천(당시 홍문관 교리)의 영향으로 ‘사기’에 흠뻑 빠져들었다.

독서광이 된 연암은 이어 개성 있는 내용의 중국 소설과 에세이를 읽고 글쓰기를 모방하면서 조선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사상가로 우뚝 섰다.

연암은 당대의 필독서인 성리학보다 ‘끌리는’ 책에 더 파고들었고 창작의 보고로 삼았다. 물론 연암은 ‘논어’ ‘시경’ 등 사서오경 역시 섭렵했고 그의 글에 자주 등장한다.

연암에게 가장 영향을 끼친 책으로 ‘사기’가 꼽힌다. ‘사기’는 한나라 사마천이 자신의 아버지 사마담의 유지를 받들어 기원전 90년에 완성했다. 사마담이 죽으면서 자신이 시작한 ‘사기’의 완성을 부탁했고 그 유지를 받들어 완성한 것이다. 그런데 수많은 인물의 이야기인 ‘사기’에는 강렬한 현실 비판 의식과 인간 중심 사상이 깃들어 있다.

사마천은 황제(한무제)의 노여움을 사 궁형을 당했다. 궁형은 남자의 성기를 자르는 것으로 가장 치욕스러운 형벌이었다. 궁형을 당하면 수치심을 이기지 못해 자살하는 게 관례였다. 하지만 사마천은 살아남아 아버지가 완성하지 못한 ‘사기’를 저술하는 데 전념했다.

‘개성적인 책읽기’가 첫걸음이다

연암은 ‘사기’를 읽는 데 그치지 않고 사기의 내용을 활용해 글쓰기를 시도했다. 그렇게 해서 최초로 쓴 것이 ‘이충무전’이다. 이는 ‘사기’에 나오는 ‘항우본기’를 모방해 쓴 글이다. ‘모방이 창작을 낳는다’는 말이 있듯이 좋은 글쓰기는 수없이 베끼고 모방하고 나아가 응용하는 데서 시작한다.

연암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사기’를 읽고 글쓰기를 함으로써 이를 실천한 것이다. ‘사기’는 연암에게 문학 창작의 기본서였던 셈이다. 영어를 잘하려면 성문기본영어부터 시작하고 여기에 나오는 문장을 달달 외우고 쓸 줄 알아야 그다음에 좋은 영작을 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사마천의 ‘사기’는 실제 역사 속에 존재했던 수많은 사람의 이야기다. 이를 ‘열전(列傳)’이라고 한다. 인간 사회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대립과 갈등, 배반과 충정, 이익과 손실, 도덕과 본능, 탐욕과 베풂 등 양자택일의 기로에 선 인간을 제시하고, 그러한 갈등 자체가 인간이 사는 모습임을 이야기한다. 연암은 ‘사기’의 형식을 빌려 소설을 썼는데 ‘광문자전’ ‘양반전’ 등은 ‘전’의 형식으로 쓴 것이다.

연암은 ‘공작관고(孔雀館稿)’라는 책도 썼다. 공작관고란 1793년 안의현감으로 있을 때 공작관이라는 정자에서 쓴 글이라는 뜻이다. 이 책은 그의 창작이 아니다. 그가 즐겨 읽었던 김성탄의 ‘서상기’에 대한 비평과 원굉도의 문학 비평을 모은 것이다. 김성탄은 명나라 말기와 청나라 초기의 문인이자 비평가인데 ‘서상기’나 ‘사기’ ‘장자’ 등에 독특한 비평을 가한 ‘성탄재자서’라는 책이 있다.

원굉도는 오로지 자신의 언어로 개성을 드러내는 것이 문학이라고 주장했다. 연암이 김성탄과 원굉도의 문학 비평을 모아 ‘공작관고’로 묶은 것은 그 역시 이들의 개성적인 글쓰기에 매료되었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다른 사람의 글들을 베껴 쓰면서 연암은 ‘열하일기’ ‘허생전’ ‘양반전’과 같은 기행문과 소설들을 내놓을 수 있었다.

연암은 “나의 문장은 좌구명과 공양고를 따른 것이 있고, 사마천과 반고를 따른 것이 있으며, 한유와 유종원을 따른 것이 있으며, 김성탄과 원굉도를 따른 것이 있다”고 했다. 좌구명은 공자와 비슷한 시대에 살았던 노나라 사람으로 ‘춘추’를 풀이한 ‘춘추좌전(좌씨전)’을 지었고, 공양고는 ‘공양전’을 지은 인물이다.

사마천과 반고는 역사서인 ‘사기’와 ‘한서’를 썼다. 한유는 파격적이고 과감한 문장으로 실용적인 글들을 썼고,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으로 진보주의자였던 유종원은 20대에 정치 혁신을 꾀하다 몰락해 10년 동안 벽지인 영주에서 글을 쓰며 지냈다. 김성탄과 원굉도는 명나라 말기 사람으로 오늘날의 수필가나 문학 비평가다.

당시 청나라에서는 잡설과 같은 새로운 글쓰기가 유행했는데 청나라를 멸시한 조선에서는 이러한 글들을 천박하다고 기피했다. 그러나 연암은 사서오경뿐 아니라 그가 살았던 18세기까지 나온 다양한 책을 읽고 모방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새로운 글을 써서 세상을 놀라게 했다.

연암이 오늘날까지 사랑을 받는 것은 기득권적 질서에 안주하지 않은 ‘창조적인 자기 파괴’ 정신에 있다. 더욱이 연암은 실학을 위해 과거시험을 포기했지만 가족이 계속된 굶주림에 지치자 50세에 9급 공무원이 된다. 선공감감역이라는 건축 담당 하급관리가 된 것이다. 이 또한 연암의 굴욕일 수 있지만 창조적인 자기 파괴인 것이다.

연암처럼 창조적이고 개성적인 문체로 세상을 놀라게 하려면 필독서에 연연하지 말고 개성적인 책읽기를 하라고 조언한다. ‘열하일기’가 230년의 시공간을 뛰어넘어 오늘날 우리에게도 강한 울림을 주고 있는 것은 바로 연암의 개성적인 책읽기에서 시작되었다.

지금 ‘백수’ 처지를 비관하고 있다면 연암을 정신적 ‘사부’로 모시고 자기 파괴에 나서보자. 먼저 끌리는 책을 읽어라! 모든 성공 신화의 주역들이 말해주듯 책을 읽지 않으면 결코 자기 파괴로 나아갈 수 없다.


[Humanities] 창조적 자기 파괴, 연암에게 한 수 배워라
최효찬 자녀경영연구소장·비교문학 박사

기자를 거쳐 현재 연세대 미디어아트연구소 전임연구원 겸 자녀경영연구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5백년 명문가의 자녀교육’ ‘한국의 1인 주식회사’ 등 다수의 책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