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브이로그] 육아, 일 모두 잘하는 원더우먼의 환상은 버리자

[한경잡앤조이=박소현 블랭크코퍼레이션 PRO] 유치원에서 전화가 왔다. 친구들과 갈등이 있었던 모양인데, 그 와중에 아들이 다른 친구를 밀었던 모양이다. 심장이 내려앉았다.
누구보다 친구를 좋아하고 잘 지내던, 기관에 적응이 빠르고 과격하지 않아 여자아이들과 잘 어울리던 아들이었기에 충격은 더욱 컸다.
△워킹맘의 육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아이의 스텝에 맞춘 선택과 집중이 아닐까.
△워킹맘의 육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아이의 스텝에 맞춘 선택과 집중이 아닐까.
일에 몰입하는 자들의 숙명
그쯤이었다. 긴 휴일을 보내면 얼른 유치원에 가고 싶다던 아이, 유치원에서 너무너무 좋아하는 이성(?) 친구에 몰입하기도 하고 기관생활을 즐거워하던 아이가 등원 셔틀을 탈 때마다 엄마 등뒤로 숨어 가지 않으려고 했던 때 말이다.

나는 1남2녀의 막내였다. 나이 차이가 꽤 나는 막내에게 부모님이 기대하는 것은 언니, 오빠와 같은 수재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집안의 분위기 메이커이자 사랑받는 것이 너무 당연한 막내의 운명에 유일한 결핍은 ‘뛰어남에 대한 인정’ 이었다. 이미 공부를 잘하는 언니, 오빠를 거쳐간 부모님에게 어지간한 학업성취나, 재능은 감흥이 없었을 테니 말이다.

이러한 성장 배경 때문인지, 타고난 성향이었는지 나는 ‘스스로 일을 만드는’ 사람이었고 어떤 집단에 속하든 목표를 정한 후, 성과를 내지 못하면 그 또한 스스로 불안했다. 이러한 성향이 스타트업을 만나면 증폭이 되는데, 대개의 스타트업이 그러하듯 업무와 솔루션을 본인이 찾아서 해야 하는 환경에서 어떻게든 그 목표를 이루고자 하는 사람에게 회사는 판을 깔아주는 무대가 되기 때문이다.

그 시기 회사는 중요한 신규 비즈니스를 시작했고 전사회의를 다시 시작하며 내외부로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한 시점이 되었다. 외부적으로는 새로운 비즈니스에 대한 스토리텔링에 여념이 없었고 내부적으로도 더 나은 커뮤니케이션을 고민하며 사람들과의 접점을 늘려갔다. 집에서도 슬랙과 메일을 수시로 확인했고 일에 대한 생각은 장소만 바뀌었을 뿐 내 머릿속에서 그대로 머물러 계속해서 일 생각을 떨쳐내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은 아이에게는 매우 소홀해지기 쉽다. 역설적이게도 내 일이 성과가 날수록, 내가 일에 몰입할수록 아이에게 섬세하고 세심한 애정을 주기는 힘들다.

선생님의 전화를 받고, 아이가 셔틀을 타지 않겠다고 버티던 모습이 생각났다. 그간 유치원 생활이나 아이의 모습에 별다른 이상이 느껴지지 않아 뭐 그러다 말겠지 하고 그냥 넘기고 만 나를 자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적인 자리에서나 가족을 만나서도 회사나 일에 대한 얘기로 몇시간이고 지치지 않는 나를 보며 언니가 했던 말이 생각나 마음을 후벼 팠다.

“일에 쏟는 열정의 반만이라도 애한테 좀 쏟아봐.”
목표지향적인 사람에게는 육아가 특히 힘들다. 유아기의 아이는 인풋을 넣었을 때 단기 아웃풋으로 연결되는 존재가 아니다.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케어와 훈육, 기다림이 쌓이고 쌓여 아주 장기적으로 아이의 인격과 생활습관에 영향을 미친다.

아이는 내가 아무리 열심히 정성 들여 음식을 만들어도 그런 엄마의 정성이 미안해서라도 먹는 시늉이라도 존재도 아닐 뿐 더러 왜 노는 것을 멈추고 그 시간에 밥을 먹어야 하는지도, 시간 맞춰 준비해서 나가야 하는 것에 대한 개념도(수백번을 말하지만) 없다. 온종일을 분주하게 집안청소와 정리를 한다 한들 5분이면 집은 아수라장이 되고(심지어, 그리고 슬프게도 나는 정리 강박이 있다.) 해야 하는 ‘당위성’으로 동기부여가 지극히 힘든 존재다.

의지가 없는 아이를 목적에 맞는 행동으로 리딩하는 것은 하염없는 기다림과 인내를 필요로 하는 일이자 목표와 성과, 속도가 중요한 타입에게는 고역과도 같은 일이다.

고백하자면, 당시 나는 일과 회사에 심취해 있었다. 입사한지 6개월이 채 안 된 시점이었음에도 회사는 업무에 대한 전문성과 의견을 존중해 주었고 이는 일에 대한 강력한 동기부여와 몰입으로 이어졌다. 잘하고 싶었고 기여하고 싶었다. 그럴 자신도 있었다.

그리고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스스로의 면죄부가 있었다. 약 30개월의 시간을 오롯이 육아를 전담하며 루틴되는 업무들에 최선을 다했다. 거의 매일을 빠지지 않고 자기전에 아이와 책을 읽었으며 어떤 시판 음식도 인스턴트 음식도 아닌 직접 만든 이유식과 간식을 준비하고 엄마를 찾으면 즉각적으로 함께 해 주지 않았던가. 그래서 아이는 정서가 안정되고 또래 집단과의 생활도, 규칙도 잘 적응하고 따라주는 아이로 자라지 않았던가.

내게도 일에 몰입할 자격이, 그래서 인정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제껏 쌓은 마일리지가 꽤나 누적되어 괜찮을 거라고 지레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이 무너지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일을 시작하고 여러가지 도우미 이모님 이슈와 환경의 변화에도 잘 따라와줬던 아이기에 안일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과거에 쌓은 마일리지가, 그래서 비교적 안정돼 있다 생각한 아이의 정서가 흔들리고 있을 수도, 그것을 내가 일에 몰입한 나머지 캐치하지 못한 것은 아닌지 죄책감이 밀려왔다.

아이와 계속해서 대화를 시도했다. 유치원에서 스트레스가 있는 건 아닌지, 학습량이 너무 많거나부담되는 건 아닌지, 친구 때문에 속상한 건 아닌지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둔 채 아이 뿐 아니라 담임선생님께도 솔직한 나의 고민을 털어놓았다.

일단, 방과 후에 하는 한글을 재미없어 하는 아이를 위해 주 2회 한글시간은 자유놀이로 대체했다. 무서운 걸 싫어하는 아이에게 “creepy” 한 이야기로 계속 장난을 치는 친구에 대해서는 그럼에도 절대 밀거나 때리거나 던지는 행위는 안된다는 걸 계속해서 말하고 하원 후 아이와 선생님께 행동을 매일 확인했다.

셔틀을 탈 때 기분 좋게 나와서 다리 뒤로 숨는 건 지금도 계속되고, 유치원이 싫은 것이 아닌 엄마와 떨어지는 그 순간이 싫다는 아이의 마음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오늘은 좋아하는 과학을 하는 날이네, 즐겁겠다 그치? 잘 다녀와. 엄마도 우리 아들이 보고 싶지만 회사에 가야해. 00이는 유치원을 가야하고. 재밌게 놀고 와서 저녁에 우리 또 만나자. 사랑해”

그냥 덤덤하게 굳이 고치려고 하지 않고 부정도 하지 않고 이렇게 말하고 떨어지지 않으려는 아이를 셔틀에 태우고 웃으면서 헤어진다.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공존을 위한 최선의 방법을 찾아가는 것”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겪으며- 앞으로도 계속해서 겪을 것이며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나는 일과 육아의 양립에 더 많은 고충을 체감할 것이다- 아이의 고충도 나의 고충도 부정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일 욕심이 있고, 성취욕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래서 일에 에너지를 쏟아내고 몰입한다는 것을, 아이를 위해 내 일을 포기하고 머무르는 것이 나를 얼마나 시들게 했는지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전업주부에 비해 한계가 있다는 것 또한 부정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내가 일을 하는 것 또한 중요한 가치라는 것에는 아직 변함이 없기에 양립하기 위해 나도 아이도 여전히 애를 쓴다. 나의 강박을 내려놓고, 아이의 감정선을 더 디테일하게 따라가며 중요하게 지켜야 할 것들을 강조하는 대신 다른 것들은 나도 아이에게도 공간을 만들려고 노력한다. 내가 일터에 있기 때문에 포기해야 하는 육아 선택지에 대한 불안함은 나의 소신과 아이에 대한 믿음으로 대체하기 위해 계속해서 마음을 잡는다.

육아의 모든 것을 잘해야 하고, 잘하고 싶다는 강박을 내려놓는 대신 아이에게 가장 중요한 것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아침에 꼭 밥이 아닌 빵이나 간편식이면 어떠랴. 발표차례에 근사하고 대단한 준비 대신 퇴근 후 지친 몸을 이끌고 아이와 함께 쓴 엉성한 그림과 글 몇줄이면 어떠하며, 나중에 있을 레벨 테스트를 위한 집에서의 복습이라든가 어느 학원이 어떻게 좋고 무엇을 준비할 것인지가 그렇게 중요하단 말인가.

장점도 있다. 출근을 하는 엄마 때문에 자는 시간과 기상시간, 등원을 칼같이 지킬 수밖에 없는 아이가 짠한 적이 많았지만 생활습관이 그 덕에 매우 잘 잡혔다는 것.

아들의 행동을 고발(?) 하는 것이 글의 시작이었기에 만회(?) 에피소드를 들자면 다행히 그 이후로 누구보다 친구들과 잘 지내고 있으며 와중에 월반을 하게 되면서 기존 친구들과 헤어졌지만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는 것에 대한 흥분으로 들떠 있다.

박소현 씨는 올해 7살 아이의 육아와 일을 병행하는 워킹맘이다. 중어중문학을 전공한 그녀는 기자, 아나운서를 거쳐 현재 브랜드 빌딩 비즈니스 스타트업 블랭크코퍼레이션 커뮤니케이션 담당 프로로 제 2의 인생을 설계 중이다.

<한경잡앤조이에서 '텍스트 브이로거'를 추가 모집합니다>

코로나19로 단절된 현재를 살아가는 직장人, 스타트업人들의 직무와 일상에 연관된 글을 쓰실 텍스트 브이로거를 모십니다. ‘무료한 일상 속에서 느꼈던 감사한 하루’, ‘일당백이 되어야 하는 스타트업에서의 치열한 몸부림’, ‘코로나19 격리일지’, ‘솔로 탈출기’ 등 다양한 주제를 통해 직접 경험한 사례나 공유하고픈 소소한 일상을 글로 풀어내시면 됩니다. 자세한 사항은 아래 링크를 참고하시면 됩니다.

<텍스트 브이로거 자세한 사항은 여기 클릭!>


kh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