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브이로그] 오늘 또 다짐한다 ‘내일은 차이지 말아야지’

[한경잡앤조이=유복치] 막판 오르막길을 질주하느라 숨이 턱 끝까지 차 올랐다. 마스크 안은 이미 습기로 가득 찼다. 약속 시간 1분 전, 아슬아슬하게 식당 앞에 도착했다. 바로 문 손잡이를 잡으려다 잠시 멈칫했다. 예전 같으면 별 생각 없이 덥석 잡았겠지만, 지금이 어느 시절인가. 역병이 창궐하는 때다. 사람들 손이 가장 많이 탄 것처럼 보이는 반들반들한 윗부분 대신 가장 손이 덜 닿았을 것만 같은 아래쪽을 주먹으로 밀고 식당에 들어섰다.

누가 봐도 이곳은 소개팅 성지. 꽃병과 식전 빵, 파스타가 놓인 테이블에 청춘 남녀가 얼굴을 마주하고 있었다. 내가 이곳을 찾은 것도 같은 이유다. 바로 소개팅. 솔로 탈출을 위한 근 1년 만의 발걸음이었다.
△드라마 '술꾼도시여자들' 캡쳐화면(TVING).
△드라마 '술꾼도시여자들' 캡쳐화면(TVING).
우리는 서로의 모습을 알지 못한 상태로 한 공간에서 만나기로 했다. 으레 주선자가 서로의 사진을 전달하고 소개팅 성사 여부를 알려주곤 하지만, 이번에는 기본 신상 정도만 알고 만남을 수락했다. 주선자에 대한 믿음도 있었지만, 코로나19가 막 확산하던 시기라 영업 제한이 생기고, 사람 간의 접촉을 꺼리는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만남 자체가 귀했던 탓도 있다. 함께 모여 있는 것조차 조심스러운 상황에서 자연스러운 만남 추구, 일명 ‘자만추’는 빠르게 멸종 위기에 처했다.

이럴 때 ‘사진을 요청한 후 소개팅 가부를 결정한다?’는 거의 지리산 주막에서 트러플 오일 관자 파스타를 주문하는 격이다. 시대와 처한 상황에 맞지 않는 일이라는 말이다. 게다가 서로의 얼굴을 모르는 블라인드 소개팅은 어쩐지 낭만적이기까지 했다. 소개팅 상대와 나는 그 흔한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조차 없었다. 카카오톡에서 서로 주고받은 인사말과 말투, 약속 시간과 장소를 정하는 어법에서 몸에 밴 매너와 습관을 유추할 수 있을 뿐이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묘한 긴장감이었다.

다행히 단번에 소개팅 상대를 찾을 수 있었다. 파란 체크 셔츠를 입은 남성만 홀로 테이블을 지키고 있었다. “저 혹시…” 파란 셔츠 사내 눈이 유리알처럼 반짝였다. “아, 유복치씨…? 안녕하세요. 일찍 오셨네요.” 내가 맞은편 자리에 앉자 약속이나 한 듯 우리는 동시에 마스크에 손을 올렸다. 얼굴 절반을 가리고 살아야 하는 시대에 건진 그나마의 낭만은 보이지 않는 부분을 상상하고 궁금해하며, 기대하게 만드는 이런 순간이 있다는 것이다.

셋. 둘. 하나. 마스크가 내려가는 찰나, 그의 동공이 내 이마부터 턱까지 빠르게 움직였다. 나 또한 마찬가지. ‘코 옆에 점이 있으시네..’ 곧바로 그의 이목구비 존재와 그것들의 조화를 훑었다. 입을 가리고 웃는 척 하며 손바닥으로 빤빤히 콧등과 광대에 눌린 마스크 자국을 정리하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스타트업이라니, 복치씨 대단한데요. 하루하루가 역동적일 것 같아요.” 그가 고른 치아를 드러내며 말했다. 앞니에는 미처 쓸려가지 못한 먹물 리조또 흔적이 남아있었다. 누군가의 하관을 이토록 오래 본 것도 간만이었다. 유관부서에서 스타트업과 일하는 걸 어깨너머로 봤다는 그는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내가 몸담은 세계에 대해 알고 있었다. 우리는 영업 제한 시간이 임박할 때까지 취향부터 관심사를 나눴다. 식당을 나와서는 지하철역까지 함께 걸었다. “즐거웠어요, 복치씨. 다음에 또 봐요.” “네, 건강 유의하시고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에서 명치께가 일렁였다. 파스타가 얹힌 건지, 간만의 설렘인지 당시에는 알 도리가 없었다.

여느 때와 같은 날이 이어졌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그 후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때 한 공간에서 먹물 리조또를 먹은 일조차 까마득할 지경이었다. 우리 둘 다 암묵적으로 알고 있었다. 서로가 주선자 체면을 위해 최대한의 교양과 예의를 갖춘 시간을 보냈다는 것을. 사람 만나는 기회가 아무리 귀하다 한들, 이성적인 호감이 없다면 쉬이 행동에 나서지 않는다는 걸 말이다. ‘한 번 보고 어떻게 아느냐고?’ 아마 지금 이 글을 읽는 독자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셋, 둘, 하나. 마스크가 내려가는 찰나의 순간, 많은 것이 결정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럼 그날 명치께의 일렁임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설렘의 일종이며, 사람의 온기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추정한다. 소개팅이든, 블라인드 소개팅이든, 코로나 시대 소개팅이든 변하지 않는 사실은 ‘내 마음 아실’ 누군가를 만나고 싶다는 것이다. 누군가 내 얘기에 귀 기울여 줄 때, 상대방 말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때 우리는 같은 시공간, 정서를 공유하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나 같은 경우에는 이때 일종의 찌르르함을 느끼는데, 얼굴의 반만 보고 사는 지금 같은 시기에도 여전히 마음 나눌 누군가가 궁금하고 보고 싶은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이 찌르르함과 상대방에 대한 궁금증이 이성적 호감과 결합해 마음을 툭 건드는 순간, 다음번 만남을 기약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비록 (이번에도 어김없이) 마음을 건드는 화학 반응이 일어나진 않았지만 포기하긴 이르다. 나는 아직도 “우리 또 봐요”라고 말하던 그의 동공을 기억한다. 머루알처럼 새까맣지만 또 내 모습이 비칠 만큼의 투명한 눈동자를 마주했을 때, 그 안에 담긴 이야기가 사실은 무척 궁금했다. 애석하게도 셋, 둘, 하나 찰나의 순간 호감 불꽃은 튀지 않았지만, 우리가 나눈 교감과 서로에 대한 궁금증이 쌓이면 새로운 스파크를 틔울 수 있을지도 알고 싶었다. 그리하여 오늘도 “저기… 혹시.. 자요..?”라고, 미처 누르지 못한 메시지 ‘전송’ 버튼을 노려보며 다짐한다. 내일은 차이지 말아야지.

필명 유복치. 유리멘탈 개복치의 줄임말이다. 취미는 입덕, 특기는 덕질인 n년차 스타트업인이다. 좋아하는 대상에 온마음을 쏟으며 살고 싶지만,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언제 깨질지 모르는 멘탈을 부여잡다 보니 2보 전진, 1보 후퇴를 거듭하고 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대부분 차인 날 투성이지만, 한 걸음씩 발걸음을 떼다 보면 두려움 마저도 함께 나누고 싶은 소중한 누군가를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품고 산다. 그래서 오늘도 차이거나, 차인 날을 회상하며 까무룩 잠이 든다. 내일은 차이지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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