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브이로그] 재미와 배움이라는 두 마리 토끼

내가 스타트업에서 교육앱을 만드는 이유 [배움의 씨앗을 심다]
[한경잡앤조이=에누마 김은파 님] 지금까지 살면서 들었던 여러 수업 중에 가장 좋았던 것 하나를 꼽자면 대학에서 들었던 라틴어 강의다. 고전 라틴어는 생소한 데다 문법도 복잡하고 어려웠지만, 암호문을 해독하듯 문자에 담긴 의미에 조금씩 다가가는 과정이 흥미로웠고 수업에서 배운 라틴어 속담이나 경구 하나에 교양인이 된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 수업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은 결정적인 이유는, 한 학기의 수업 동안 어려움을 느껴서 흥미가 사그러들 만한 시기마다 교수님이 마치 학생들의 마음을 들여다본 듯 격려하고 도움을 주셨기 때문이었다. 복잡한 문법을 한 번에 제시하고 알아서 외우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단계별로 배우도록 하고, 그럼에도 여전히 어려운 부분에 대해서는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시는 식이었다. 덕분에 학기가 끝날 때까지 포기하는 일 없이, 조금씩 실력을 키워 가며 라틴어라는 새로운 세계를 즐겁게 탐험할 수 있었다.

다들 이런 경험이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그것이 운동이든 수학이든, 배우는 사람으로서 맞닥뜨린 어려움을 좀 더 쉽게 넘어갈 수 있도록 적절한 도움을 받은 경험 말이다. 울퉁불퉁하고 가팔랐을 ‘학습의 길’이 그런 도움으로 인해 완만하고 걷기 좋아져 적은 힘으로도 잘 배울 수 있고 다른 것을 더 배울 마음이 나기도 하는 선순환으로 들어선 경우 말이다. 나에게 어린이들을 위한 학습 앱을 만드는 일이란, 그렇게 ‘좀 더 배울 마음’이 나도록 정성 들여 학습 경험을 디자인하는 일이다.

어떻게 하면 배울 마음이 생겨날까. 어른이라면 배우는 과정이 좀 지루해도 자신의 목적을 생각하며 학습을 지속할 수 있겠지만 저연령의 어린이가 그런 동기를 바탕으로 학습을 시작하고 이어 가리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학습하는 경험이 재미가 있다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찾아서 할 터. 그렇기에 어떻게 하면 앱을 통해 학습하는 경험을 좀 더 즐겁게 만들 것인지를 늘 고민하곤 한다.

단조롭거나 지루해 보이지 않고, 예쁘고 귀여워서 자주 들여다보고 싶은 앱을 만드는 것도 즐거운 학습 경험을 만들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게임의 형태와 방식을 닮은 액티비티들로 흥미를 유발하고, 학습 활동에 대한 여러 보상 장치를 통해 동기를 부여하기도 한다. 해야 할 일과 순서를 모두 지정해 놓는 대신 학습자가 스스로 탐색하며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을 주는 것도 중요하다. 또 하나의 전략은, 학습을 하면서 작은 성공 경험을 많이 맛보게 하는 것이다. 스스로 뭔가를 잘 한다고 느낄 때 기분이 나쁘거나 하기 싫은 사람이 있을까? ‘할 수 있다’고 느낄 때 우리는 으쓱해지고, 계속해 볼 마음, 더 잘 하고 싶은 마음이 들곤 한다. 그래서 앱 내에서도 하나하나의 작은 성공을 축하하고, 실패를 부각하기보다는 다시 한번 시도해 볼 수 있게 격려하는 데 중점을 둔다. 사실 대부분의 활동에는 실패 자체가 없다. 첫 시도에 답을 맞히지 못한 것일 뿐이다. 틀렸다면 다시 도전하면 되고, 도전의 기회는 충분히 주어진다.

내가 스타트업에서 교육앱을 만드는 이유 [배움의 씨앗을 심다]
△실패의 두려움을 주지 않고 성취감을 꾸준히 제공하는 것이 관건이다.
△실패의 두려움을 주지 않고 성취감을 꾸준히 제공하는 것이 관건이다.
틀려 가며 배울 수 있도록 충분히 기회를 주는 것이 듣기에는 쉽지만, 감정이 있는 인간으로서 가르치는 입장이 되면 행동으로 옮기기 꽤 어려울 수 있다. 가까운 사람에게 뭘 가르치다가 “아니 대체 이걸 왜 아직도 몰라, 몇 번을 설명했는데”라며 답답해 했던 경험이 한 번쯤은 있지 않은지. 처음에는 기분 좋게 시작했어도, 시간이 좀 지나면 가르치는 사람은 화가 나고 배우는 사람은 주눅이 드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앱을 통해 학습하는 상황에서는 잘 모른다고 꾸지람을 듣거나 창피를 당할 일이 없다. 읽기에 능숙해지기까지 필요한 수백 수천 번의 연습에서 틀리는 건 아주 당연한 일이다. 몇 번을 틀려도 괜찮은 편안한 배움의 공간이라면 얼마든지 시도하고 실패하며 배워 나갈 수 있다.

이처럼 학습할 때 긴장이나 부담보다는 재미를 느끼게 하는 앱, 그렇다고 재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학습하도록 돕는 앱을 만들기 위해서 종종 학습자인 어린이의 입장이 되어 보려고 하는데, 이게 참 어렵다. 어린이들이 재미있어 하는 것도, 어린이들이 어려워하는 것도 알기 쉽지 않다. 앱을 만드는 나는 이미 어른이 된 지 오래거니와, 어린이라고 해서 다 똑같은 것을 좋아하거나 어려워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나 어른인 나에게는 이미 수많은 배경지식과 선경험이 있다 보니, 나와는 다른 지식과 경험을 가진 어린이들이 어디에서 걸려 넘어질지를 알기 위해서는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우리 앱의 주 사용자는 이제 막 읽기를 배우기 시작한 어린이들이기에, 중요한 정보를 글자로만 전달하지 않고 음성이나 그림을 곁들여 이해를 도울 필요가 있음을 늘 기억하려고 한다. 흔히 사용되는 기호들 또한 낯선 눈으로 봐야 한다. 빈칸에 물음표가 들어가 있을 때, 이미 물음표의 의미를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거기에 답을 집어넣으라는 의도가 명확하게 보일 것이다. 그렇지만 물음표를 본 적이 없는 어린이라면 무엇을 하라는 것인지 어리둥절할 수 있다. 학습자가 느낄 막막함을 알아차려야만, 거기에서 막혀 버리지 않게끔 예시를 보여준다거나 처음에는 아주 쉬운 문제를 제시하는 등 도움을 주는 것이 가능하다.
내가 스타트업에서 교육앱을 만드는 이유 [배움의 씨앗을 심다]
△물음표의 의미를 잘 모르는 어린이들을 위해서는 좀 더 친절한 안내가 필요하다.
△물음표의 의미를 잘 모르는 어린이들을 위해서는 좀 더 친절한 안내가 필요하다.
이렇듯 어른에게 너무 당연한 것들을 어린이 학습자가 어떤 식으로 경험하는지 조금이라도 더 알려면 여러 방법을 동원해야 한다. 이미 다양한 시행착오를 겪어 본 동료로부터 배우고, 같은 분야 사람들이 공유하는 노하우에도 귀를 기울인다. 그렇지만 결국은 나 또한 실패해 가며 배울 수밖에 없다. 일단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앱을 만든 다음, 실제 학습자인 어린이들이 어떻게 앱을 사용하고 학습하는지 직접 관찰하고 데이터를 살펴봄으로써 개선할 지점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전에는 학습자의 가까이에서 사용하는 모습을 볼 기회도 종종 있었지만 코로나19 이후로는 주로 사용 영상을 통해 어린이들을 만난다. 화면 너머로 보기만 해야 한다는 제약은 있을지라도 더 좋은 앱을 만드는 데 필요한 정보는 충분히 얻을 수 있다. 영상 속 어린이들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가거나 깔깔대며 웃을 때는 나도 덩달아 기쁘지만, 갑자기 고개를 갸웃거리거나 손가락이 자신감을 잃고 한곳에 머무르는 걸 발견하면 어디가 잘못되었나 싶어 긴장하게 된다. 한편, 데이터는 사용 영상처럼 각 어린이의 표정이나 행동을 담고 있지는 않지만, 수많은 학습자가 어떤 액티비티에서 특히 시간이 많이 걸리는지, 어떤 문제에서 유독 오답이 많은지 등의 정보를 명확히 보여준다. 이런 방식으로 활동의 성취 기준이 너무 높게 설정되었거나 난이도가 가파르게 올라가서 학습자가 좌절을 느끼는 지점, 의도하지 않은 행동을 유발하는 요소 등을 발견해 다듬고, 목표한 대로 잘 작동하는 부분은 다른 곳에 적용하기도 한다.

재미와 배움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여러 사람의 고민과 노력 끝에 만들어진 앱을 어린이들이 잘 사용하는 걸 볼 때 느끼는 보람과 기쁨은 무척 크다. 부모님이 직접 한글을 가르치려고 할 때면 도망가기 바쁘던 아이가 앱으로는 몇 십분을 꼼짝 않고 학습한다는 이야기, 장애가 있어 또래보다 학습 속도가 느린 아이가 여러 번 반복해서 연습하며 점차 말도 늘고 글씨도 잘 쓰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이 일을 하는 게 얼마나 큰 행운인가 생각한다. 학습자로 하여금 읽고 쓰기를 배우는 걸 꽤 즐거운 활동으로 여기게끔 하는 앱을 만드는 것은, 나에게도 재미와 배움이 모두 있는 일인 셈이다.

김은파 씨는 학습의 기회를 만들고 확장하는 일에 관심이 많다. 이집트, 우간다, 한국 등에서 학습자를 만난 경험을 바탕으로, 지금은 에듀테크 스타트업 '에누마'에서 어린이들이 즐겁게 읽고 쓰기를 배울 수 있는 앱을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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