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 손으로 직접 만드는 ‘마을 속 거점’ 작은도서관
세대와 이웃을 아우르는 마을 속 문화 거점, 동네 작은도서관

'웃는책 작은도서관’ 전경(방민우 학생기자)
'웃는책 작은도서관’ 전경(방민우 학생기자)
서울 강동구 천호동. 마을 골목길을 따라 걷다 보면 간판도 소박한 ‘웃는책 작은도서관’이 모습을 드러낸다. 평일 오전임에도 안은 책을 읽는 주민, 도화지를 펼친 아이들, 독서 모임에 참여한 이들로 북적였다. 단순히 책만 빌려주는 공간이라 생각했다면 의외의 풍경이다. 서울 곳곳의 작은도서관들이 책장을 넘어, 지역 커뮤니티의 새로운 중심지로 변모하고 있다.

책을 넘어 ‘만남’을 만드는 공간
김자영 웃는책 작은도서관 관장은 “예전에는 책 대출·반납 등 실무가 주 업무였지만, 요즘은 모임과 프로그램 지원으로 더 바쁘다”고 말했다.

실제로 도서관 벽면에는 ‘그림책스케치’, ‘온라인 책번개’, ‘우리동네 식물화 그리기’ 등 주민 주도 프로그램 안내지가 빼곡했다. 동네 작은도서관이 단순한 독서 공간에서 ‘책을 매개로 사람을 잇는’ 거점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웃는책 작은도서관 내 다양한 프로그램들
웃는책 작은도서관 내 다양한 프로그램들
주민이 직접 만드는 프로그램
이곳에서는 8개의 성인 동아리와 자원활동가들이 운영하는 10여 개 프로그램, 피아노 수업, 어린이 합창단 등 다양한 활동이 진행된다. 대부분은 동네 주민이 직접 제안하고 기획하며, 일부는 운영까지 주민이 맡는다. 독서회, 환경 캠페인, 합창단 등 프로그램 주제도 주민 제안에 따라 무궁무진하다.
그림책 독립출판 동아리 ‘그림책스케치’(방민우 학생기자)
그림책 독립출판 동아리 ‘그림책스케치’(방민우 학생기자)
웃는책 작은도서관의 그림책 독립출판 동아리 ‘그림책스케치’도 그중 하나다. 2018년 한 주민의 제안으로 시작된 이 모임은 매년 8권 안팎의 책을 꾸준히 발간하며 성장해 왔다. 다섯 해째 동아리를 운영 중인 주민 김애경 씨는 “작은 모임에서 시작했지만, 지금은 출판사까지 갖춘 독립출판 동아리로 발전했다”며 “매주 도서관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그림책을 만들며 더 큰 공동체가 형성됐다”고 말했다.

이처럼 작은도서관은 사서 중심의 운영을 넘어, 주민이 직접 주도하는 ‘참여형 도서관’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동아리 ‘그림책스케치’가 발간한 책들(웃는책 작은도서관 제공)
동아리 ‘그림책스케치’가 발간한 책들(웃는책 작은도서관 제공)
맞춤형 교류 프로그램으로 세대를 잇다
현재 전국에서는 6,975개의 작은도서관이 운영되고 있으며, 각 도서관은 연령과 관심사에 맞춘 프로그램을 강화하고 있다. 초등학생 책놀이·토론, 청소년 진로 탐색, 청년 취업스터디, 시니어 디지털 교실까지 세대를 아우른다.

청년 1인 가구 특화 도서관인 장충동작은도서관은 재무 점검과 자산관리 교육을 다룬 ‘혼라이프 금융백서’, 미술 심리 치료 프로그램인 ‘혼라이프 심리백서’등 생활 밀착형 시리즈를 운영하며 청년 세대와 호흡하고 있다.

서울 도서관에서 운영 중인 다양한 프로그램
“PC방보다 재밌다” 요즘 동네 작은도서관 가봤니?
강서구립 곰달래도서관은 다문화 이용자를 위한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다문화 초등학생에게는 심리치료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다문화 성인을 대상으로는 전래놀이 지도사 자격증 과정을 운영해 자립과 역량 강화를 지원한다.

성북구의 기쁨이 자라는 작은도서관은 미스터리 장르에 특화돼 있다. 미스터리 도서 전용 서가를 구축하고, 관련 작가 초청 강연과 독서 동아리를 운영한다. 어린이 대상 1박 2일 추리 게임도 열어 마니아층은 물론 일반 이용자도 즐길 수 있는 독특한 경험을 제공한다.

웃는책 작은도서관은 어린이를 위한 합창단, 미술 수업, 온라인 동화 낭독 모임 등을 이어오고 있다. 최근에는 큰글자 도서 서가를 마련해 시니어 이용자 서비스를 확대했으며, 앞으로는 5060세대를 고려한 고전 낭독 모임도 준비 중이다.
어린이 합창단의 공연 모습(웃는책 작은도서관 제공)
어린이 합창단의 공연 모습(웃는책 작은도서관 제공)
지역 공동체를 회복시키는 힘
작은도서관은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지역 커뮤니티를 활성화하고 주민들을 하나로 잇는 역할을 하고 있다.

독립출판 동아리에서 네 권의 책을 펴낸 논술 교사 길희숙 씨는 “아이를 키우다 보면 만나는 사람의 반경이 줄어들어 도태되는 기분이 들 수 있는데, 동아리 활동을 통해 세상과 연결될 수 있었다”며 “내게 독립출판 동아리는 ‘숨구멍’ 같은 존재”라고 말했다.

독서 모임에 참여 중인 60대 박정수 씨(가명)도 “작은도서관 프로그램 덕분에 지적인 활동을 이어갈 수 있어 감사하다”며 만족감을 드러냈다.

김 관장은 “도서관을 이용하는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어울리며 부모가 안심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다”며 “멀리 사는 자녀가 부모와 도서관을 연결해 주는 경우도 있다”고 전했다. 그는 이어 “이웃이 사라져가는 시대에 작은도서관은 안전한 사랑방이자 공동체의 중심”이라며 “지식 습득의 공간을 넘어 더 나은 관계망을 만들어주는 매개”라고 강조했다.

여전히 남은 과제 "양보다 질적 안정화"
그러나 이런 변화가 모든 작은도서관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일부 도서관은 인력과 예산 부족으로 상시 프로그램 운영이 어렵고, 주민 참여가 낮아 단순한 책 대출소에 머물기도 한다. 현장 사서들은 “주민 참여를 끌어낼 홍보·지원 체계 구축”과 “공간·인력 확충”을 가장 큰 과제로 꼽았다.

김 관장은 “작은도서관이 전국에 7,000곳에 이르지만 이제는 양보다 질적 안정화가 중요한 때”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공공도서관 사서와 달리 작은도서관의 사서들은 실핏줄처럼 지역 독서 문화를 만들어가는 역할을 한다”며 “주민과 장기적으로 관계를 맺고, 책을 사람에 맞게 추천할 수 있는 ‘커뮤니티 활동가’ 같은 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작지만 단단한 ‘마을 속 거점’
퇴근길에 잠시 들러 책을 빌리고, 토요일엔 아이와 독서 모임에 참여하며, 다음 달에는 내가 기획한 환경 캠페인을 열 수 있는 곳. 작은도서관은 책장 사이에서 마을의 시간을 켜켜이 쌓아 올리고 있다. 작은도서관에서 만난 사람들은 모두 입을 모았다. “책을 빌리러 왔다가, 사람을 빌려 갑니다” 이 작은 공간에서 만들어지는 연결이야말로, 도시 속에서 가장 소중한 자산일지 모른다.

강홍민 기자 khm@hankyung.com
[방민우 대학생 기자]